21일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패러게임에서 여자 펜싱 에페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수확했다. 사진=공동취재단
영화 '범죄도시'에서 배우 마동석의 분장을 책임졌던 손이 이번엔 펜싱 검을 쥐고 아시아 정상을 찔렀다. 2017년 낙상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던 조은혜(41·부루벨코리아)가 새로운 도전 끝에 한국 장애인펜싱의 새 역사를 썼다.
한국 여자 펜싱 대표팀의 주장 조은혜는 21일 일본 나고야시 이나에 스포츠센터에서 열린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패러게임(APG) 여자 에페 개인전(스포츠등급 B) 결승에서 사이수니 자나(태국)를 15-14로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역사적인 금메달이었다. 한국 펜싱이 2010년 APG 출범 이후 이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신인 아시아·태평양 장애인경기대회(FESPIC)에선 김기홍이 2006년 쿠알라룸푸르 대회 에페 개인전 금메달을 획득한 바 있다.
조은혜는 남다른 이력을 가진 선수다. 과거 영화계에서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했던 그는 2017년 개봉해 68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범죄도시'의 분장팀장을 맡았다. 마동석 등 주요 배우들의 스타일을 책임졌으며,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와 '굿바이 싱글' 등에서도 분장 작업에 참여했다.
21일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패러게임에서 여자 펜싱 에페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수확했다. 사진=공동취재단
하지만 2017년 불의의 낙상 사고가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척수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된 것. 더 이상 예전처럼 영화 촬영 현장을 누빌 수 없게 된 그는 재활에 전념해야 했다.
그런 조은혜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것은 펜싱이었다. 2018년 재활 과정에서 TV 뉴스에 나온 휠체어 펜싱 경기를 우연히 접했고, 흰색 펜싱복을 입고 검을 휘두르는 선수들의 모습에 매료됐다. 이후 직접 장애인펜싱협회에 연락해 펜싱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첫 대회에서는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공격을 허용하며 패했다. 하지만 승부욕을 불태운 조은혜는 두 번째 대회에서 3위에 오르며 가능성을 확인했다. 펜싱을 통해 자신감도 되찾았다.
성장은 빨랐다. 조은혜는 2023년 열린 2022 항저우 APG에서 사브르 B 개인전과 여자 에페 단체전 동메달을 획득했다. 2024 파리 패럴림픽에도 출전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휠체어 펜싱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펜싱 입문 8년 만에 처음으로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
2017 영화 범죄도시에서 스타일리스트였던 조은혜(왼쪽)와 배우 진선규. 조은혜 본인제공/연합뉴스
영화계에서 맺은 인연도 이어졌다. 2024 파리 패럴림픽을 앞두고 '범죄도시'에서 함께 일했던 배우 진선규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응원 영상을 올린 것. 당시 진선규는 "대한민국 화이팅! (조)은혜야 화이팅!"이라며 조은혜와 한국 선수단의 선전을 기원하기도 했다.
결승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자나는 2024 파리 패럴림픽에서 에페·플뢰레·사브르 B 개인전을 모두 제패한 3관왕이다. 세계 최정상급 강호를 상대로 조은혜는 물러서지 않았다.
신중한 탐색전 끝에 선취점을 따낸 조은혜는 1피리어드를 8-6으로 앞섰다. 2피리어드에서도 차근차근 점수를 쌓으며 14-8까지 달아났다. 금메달까지 단 한 점만 남겨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자나의 반격이 거셌다. 조은혜는 2피리어드를 14-12로 마쳤고, 3피리어드에서도 연속 2점을 내주며 14-14 동점을 허용했다. 마지막 한 점에 금메달의 주인이 결정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21일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패러게임에서 여자 펜싱 에페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수확했다. 사진=공동취재단
조은혜는 흔들리지 않았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검을 겨눴다. 두 차례 동시타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지만, 끝내 마지막 한 점을 따내며 극적인 우승을 확정했다.
영화 속 주인공을 빛내던 분장팀장에서 이제는 자신이 주인공이 돼 아시아 정상에 섰다. 2017년 사고 이후 시작된 새로운 인생에서 조은혜가 써 내려간 또 하나의 드라마였다.
도전은 계속된다. 조은혜는 22일 여자 에페 단체전에서 동료들과 추가 금메달에 도전한다. 단체전까지 우승하면 이번 대회 2관왕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