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전 가을, 양키스타디움의 2만7000여 관중은 모두 자리에 앉지 못한 채 마운드를 초조하게 지켜봤다. 홈팀 좌완 투수의 투구 폼과 마무리는 특이했다. 투구를 준비하는 그의 오른팔에는 우투 글러브가 ‘걸려’ 있었다. 공을 던지는 순간, 그의 왼손은 눈 깜짝할 사이에 글러브를 끼워 차며 수비 태세를 갖췄다. 타자가 친 공이 유격수 앞 땅볼로 처리되며 경기가 종료되자, 양키스 팀 전원은 일제히 마운드로 뛰어갔고 구장 전체는 열광의 도가니가 됐다. 마치 월드시리즈라도 우승한 것 같았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던진 투수 짐 애보트는 자신의 왼손을 하늘 높이 치켜세웠다. 그는 왼손잡이가 아니라 ‘외’손잡이 선수였다.
많은 이들은 선천적으로 오른손이 없는 애보트가 야구를, 그것도 메이저리그에서 뛴다는 사실을 이미 ‘기적’으로 여겼다. 하지만 애보트는 단순히 메이저리그의 스토리 마케팅 도구가 아니었다. 데뷔 첫해인 1989년부터 10승을 거둔 그는 1991년에는 방어율 2.89와 18승으로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 투표에서 3위를 차지했고, 그 다음 해인 1992년에는 방어율 2.77로 시즌을 마쳤다. 그래도 그의 선수 생활 중 최고의 순간은 단연코 1993년 9월 4일에 양키스 유니폼을 입고 일궈 낸 노히트노런이었다.
◇ 신발 끈에서 시작된 신화.
애보트는 걸음마를 뗄 때부터 공을 좋아했다. 애보트는 자신이 벽에 던진 고무공이 튕겨 나오는 것을 우투 글러브로 받는 기발한 기술을 아버지와 함께 개발하고 훈련했다. 나날이 눈-손 협응 능력이 향상된 애보트는 열한 살 때 처음으로 리틀리그에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하기도 했다.
애보트의 유년기는 쉽지 않았다. 또래 아이들은 의수를 찬 그를 보고 괴물 취급했고, 심지어 몇몇 아이들은 손이 없는 그의 팔을 보고 무섭다며 울기도 했다. 어린 애보트는 자신의 ‘오른손’을 숨기기 위해 늘 호주머니에 꽂고 가리는 버릇이 생겼다.
아주 간단한 일상도 그에게는 고난이었다. 그중 하나는 신발 끈을 매는 것이었다. 애보트의 어머니는 아침마다 매듭을 두 번씩 꼭 매 줬다. 그러나 신발 끈은 학교에서 종종 풀렸고, 초등학생 애보트는 창피해 신발 끈을 묶지 못했다. 신발 끈은 애보트에게 자신의 장애를 늘 상기시켰다.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애보트에게 웃으며 말했다. “알아냈다. 네가 신발 끈을 맬 수 있는 방법을!” 선생님은 아이들이 없는 복도로 애보트를 데려가 자신의 비법을 가르쳐 줬다. 애보트는 한 손으로 신발 끈을 묶는 법을 배운 그 순간, 인생에서 자기도 한 손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한 손으로 신발 끈을 묶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 며칠씩 연구한 선생님의 배려는 실로 가상했다. 애보트는 오늘날까지 동기부여에 대한 강연을 할 때마다 자신의 초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 돈 클락슨을 언급하며 감사를 잊지 않았다. 클락슨 선생님 덕분에 놀런 라이언과 같은 명투수가 되고 싶었던 어린 꿈나무는 훗날 자신의 우상처럼 메이저리그에서 노히트노런을 던질 수 있었다.
애버트는 자신의 독특한 플레잉 스타일을 신기해하는 언론에 늘 이렇게 말했다. “다섯 살 때부터 야구를 이렇게 했기 때문에, 내게는 신발 끈을 묶는 것처럼 자연스럽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기자들은 한 손으로 신발 끈을 묶는 법을 상상해야 했다.
◇ 야구보다 위대한 인생.
애보트는 미시간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정상급 아마추어 선수로 명성을 날렸다. 그해 그는 25년 만에 쿠바 국가대표팀을 이기는 미국팀 투수가 되기도 했다. 3학년 때는 1988 서울올림픽 마지막 경기에서 일본을 잡으며 금메달까지 목에 걸었다. 메이저리그에서 10시즌을 보낸 애보트는 통산 탈삼진 888개와 87승을 기록했다.
지명타자가 있는 아메리칸리그 특성상 애보트는 타격을 자주 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그의 외팔 타법은 나름 수준급이었다. 1991년 봄 시범 경기에서는 3루타를 쳤고, 그가 정규 시즌에서 유일하게 타격을 한 1999년에는 21타수 2안타 3타점을 올렸다. 이 정도면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와도 무난한 인물 아닌가?
그런데… 왜 애보트는 메이저리그 생활을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접었을까?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해가 갈수록 타자들이 글러브로 공을 가리지 못하는 애보트의 투구를 미리 예측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1루 주자들도 그의 견제 모션을 읽기가 쉬웠다고 한다. 일부 평론가들은 그의 번트 수비가 미숙했다고 지적하지만, 기록을 살펴보면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많은 경우에 애보트는 번트를 글러브 없이 맨손으로 완벽하게 처리해 냈다.
정작 애보트는 자신의 장애를 탓하지 않았다. 애보트는 느려진 강속구를 조기 은퇴 원인으로 삼았다. 프로 초년 시절 시속 154km에 육박하던 그의 공은 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140km 수준으로 떨어졌다.
물론 수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 애보트의 업적을 그의 메이저리그 성적만으로 요약할 수는 없다. 애보트의 인생은 태생적인 장애를 딛고 도약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 승리’ 그 자체였다. 애보트의 놀라운 여정은 야구를 모르는 이들에게도 영감과 용기를 선사한다.
◇ ‘괴물 투수’를 만드는 법
서울올림픽에서 애보트의 피칭을 본 한국 팬들 역시 많은 감명을 받았다. 저런 입지전적인 선수는 미국에서만 나올 수 있나? 많은 이들은 그것도 다 먹고 살만한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치부했다. 결국은 돈이 많으면 우리에게도 언젠가 애보트 같은 선수가 나올 것이라는 진부한 사고로 고민을 대체했다. 그러나 근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한국의 애보트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는 GDP의 문제가 아니라 구성원들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적 관습이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장애인들과 같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참여를 독려해야 할 이유는 윤리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차별’이 가져오는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모두의 몫으로 돌아온다. 고급 인적 자산을 활용할 기회를 차단하기도 하지만, 더 크게는 노동 인력의 하향 평준화와 인건비 상승을 초래한다. 배제와 배척보다는 포함과 포용을 택했을 때, 노동시장의 공급 자원은 풍성해지고 경쟁력 있는 경제 역시 가능하다.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시장경제와 복지 정책은 상호 배타적일 필요가 없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수많은 짐 애보트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정책적인 시혜가 아니다. 그들은 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균등한 기회를 요구한다. 일반인들과 출발점이 다른 그들은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바랄 뿐이다. 동정의 대상이 아닌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를 가진 인격체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짜 밥’보다 ‘진짜 공동체’를 원한다.
한국에서도 애보트가 나올 수 있게 토양을 만드는 숙제는 돈만으론 해결되지 않는다.일반인들과 다른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동반돼야 한다. 차이를 차별로 직결시키기보다 ‘공통분모’를 찾아내려는 배려가 절실하다. 관점을 달리하면 가치관도 변하고 문화 또한 진화한다.
손 없는 팔을 보는 게 불편한가? 신발 끈을 한 손으로 한 번 매어 보라.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는 새 시대의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장애라는 불편은 불행이 아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과제다. 애보트 같은 인물은 사회가 만들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