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스포츠랩소디] 품격있는 스포츠 중계가 보고 싶다
일간스포츠

입력 2022.04.20 06:06

김식 기자
2021년 2월 7일 V리그 3위를 결정짓는 빅 매치가 열렸다. 도로공사와 IBK기업은행은 세트스코어 2-2 접전을 벌였다. 도로공사가 5세트에서 14-3으로 앞서며 매치포인트를 잡았다. 하지만 KBS2는 승리까지 단 1점을 남긴 순간에 중계를 종료했다. 화면 하단에는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방송을 마친다. 양해 바란다. 이후 경기는 앱을 통해 계속 시청할 수 있다”라는 내용의 자막이 떴다. 이어 KBS2는 주말 드라마를 재방송했다. 각본 있는 드라마의 재방송을 위해 각본 없는 드라마의 생중계를 끊은 것이다.
 
2011년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5차전 SK와 롯데전을 보여주던 MBC는 9회 말 2아웃 2스트라이크에서 중계를 끊었다. 공 하나만 더 던지면 경기가 끝날 수도 있는데, 그것을 못 참은 것이다. 남은 경기를 MBC 스포츠 케이블 채널을 통해 보여주지도 않았다.
 
배구·야구와 달리 시간 계산이 가능한 스포츠도 예외는 아니다. 2008년 프로축구 K리그 개막전에서 전년도 챔피언 포항과 FA컵 2연패를 달성한 전남이 맞붙었다. 1-1로 팽팽한 상황에서 KBS1은 후반 40분에 중계를 끊었다. 8분 후 포항은 골을 기록하며 극적인 승리를 거둔다. 시청자는 이 장면을 볼 수 없었다. 
 
지난 칼럼에서도 언급했듯이 필자는 영국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수많은 경기를 TV로 지켜봤다. 영국 지상파 TV가 가장 부러웠던 점은 경기를 끝까지 중계한다는 것이다. 국내 방송국의 스포츠 중계 끊기에 익숙해진 필자에게,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영국 TV 중계는 신선함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했다.
 
시간 계산이 어려운 스포츠도 있다. 테니스가 대표적이다. 의류 브랜드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테니스 스타 프레드 페리가 1936년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에서 3-0으로 이길 때 걸린 시간은 단 40분이었다.  
 
최근의 예를 살펴보자. 2018년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전에서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가 케빈 앤더슨(남아공)을 3-0으로 꺾는데 걸린 시간은 2시간 19분이었다. 하지만 다음 해인 2019년 윔블던 결승에서 조코비치가 로저 페더러(스위스)를 세트 스코어 3-2로 꺾고 우승할 때는, 무려 4시간 57분이 걸렸다. 2019년 대회부터 시행된 마지막 5세트의 게임 스코어 12-12의 타이 브레이크(tie-break, 계속되는 게임 듀스로 경기가 무한정 지속하는 것을 방지하는 제도)가 없었다면, 사실 이 경기는 5시간을 훌쩍 넘겼을 것이다.
 
조코비치는 2019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전 5세트 타이 브레이크에서 7-3으로 승리하며 우승했다. [AP=연합뉴스]

조코비치는 2019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전 5세트 타이 브레이크에서 7-3으로 승리하며 우승했다. [AP=연합뉴스]

이렇듯 테니스 같은 종목은 경기 시간을 예측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BBC를 포함한 영국 공중파 TV는 경기 도중 이해할 수 없는 핑계를 대며 중계를 끊지 않는다.  
 
국내 TV 시장도 케이블 채널이 활성화되면서, 근래에 들어 스포츠 채널은 경기를 끝까지 중계하는 편이다. 팬들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쉬운 점은 여전히 있다. 다수의 중계가 경기가 끝나기 무섭게 방송을 종료하기 때문이다.
 
경기 종료 후 팬들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지나간다. 경기가 남긴 여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승리에 진한 감동을 할 때도 있고, 자신이 응원한 팀이 아쉽게 진 후 선수들이 서로를 격려하는 장면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질 때도 있다. 따라서 스포츠 중계를 맡은 방송국은 경기 후의 이런 장면 등을 최소한의 시간을 투자해서라도 시청자에게 보여줄 의무가 있다.
 
특히 중요한 경기가 극적으로 끝난 후 팬들이 느끼는 감정은 남다르다. 하지만 팬들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중계를 끊고 서둘러 광고를 내보내는 방송국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급할까?  
 
다시 한번 영국 지상파 TV와 비교된다. 이들은 경기가 예상보다 훨씬 늦게 끝나더라도, 방송을 바로 종료하지 않는다. 영국 TV는 언제나 일정 시간을 할애해 경기 종료 후 선수나 관중의 환호나 좌절, 그리고 하이라이트와 감독 등의 인터뷰를 보여준다.
 
사실 스포츠 중계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필자는 지상파 TV가 영화를 보여준 후 엔드 크레딧(end credits, 영화의 마지막 장면 뒤에 나오는 모든 출연진, 제작진의 이름 목록)을 끝까지 틀어준 것을 본 적이 없다. 특히 감동적인 영화를 본 시청자는 대미를 장식하는 음악을 들으며 여운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한다. 하지만 국내 방송국은 단 몇 분의 시간이 필요한 엔드 크레딧마저도 시청자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2018 평창올림픽 1만m 스피드 스케이팅을 중계하던 MBC는 5조 경기 후 이승훈 선수가 4위로 밀리자 중계를 종료했다. 한국 선수가 메달권을 벗어났으니 더 볼 필요 없다는 의미인 것 같다. 바로 뒤 6조에는 국내에도 팬이 많은 ‘빙속 황제’ 스벤 크라머(네덜란드)가 대기 중이었다. 특히 그는 올림픽 1만m에서 유독 운이 없어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던 터였다.
 
한국의 TV 방송국은 올림픽에서 특정 종목의 국제신호를 제작하고, 중계 기술을 해외에 수출할 정도로 수준급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올림픽, 월드컵과 같은 메가 스포츠 이벤트가 다가오면 지상파 채널들은 서로 감동을 선사하겠다며 무한 경쟁에 들어간다. 그들이 주고자 하는 감동은 과연 무엇일까? 그걸 당최 알 수 없다는 건 필자 혼자만의 생각인지 궁금하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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