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만 새겼던 목표를 달성한 날, 박병호(36·KT 위즈)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비로소 자신이 긴 터널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다.
박병호는 지난 27일 수원KT위즈파크에서 열린 키움 히어로즈전에서 KT가 3-4로 지고 있던 9회 말 2사 1루에서, 상대 투수 문성현의 슬라이더를 공략해 가운데 담장을 넘기는 끝내기 투런 홈런을 쳤다. 전날(26일) 열린 1차전에서 역전패(스코어 7-8)를 당했던 KT는 4번 타자 박병호의 극적인 한 방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 한방은 박병호의 올 시즌 30번째 홈런이었다. '거포'를 상징하는 이 기록을 2019시즌(33개) 이후 3시즌 만에 해냈다. 개인 통산 7번째 '단일시즌 30홈런' 달성이기도 하다.
박병호는 "(타격 뒤) 바로 1루로 뛰지 않고 타구를 바라봤다. 그만큼 나에겐 짜릿한 순간이었다"고 홈런을 친 순간을 돌아봤다. 이어 "사실 홈런 개수는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한다. (통산 홈런 5위 진입 등) 의미 있는 기록을 세운 뒤에도 덤덤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날 30홈런은 달랐다. 정말 기뻤고, 큰 의미를 부여한다. 꼭 다시 한번 해내고 싶었던 기록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KBO리그를 대표하는 홈런 타자 박병호는 지난 두 시즌 부진했다. 타율은 2할대 초반, 홈런은 각각 21개(2020)와 20개(2021)에 그쳤다. 나이를 먹으며 운동 능력이 저하되는 '에이징 커브'에 진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병호는 지난겨울 전성기를 보낸 키움을 떠나 KT로 이적했다. 거포 부재에 시달리던 KT는 홈런 20개 이상 때려줄 타자를 찾았고, 이전보다 시장가가 내려간 박병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시 박병호를 향한 기대치는 높지 않았다. 계약을 주도한 이숭용 전 KT 단장과 이강철 감독조차 "20홈런만 쳐도 성공한 계약"이라고 했다. 선수는 가슴에 칼을 품었다. 그는 개막 전 일간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20홈런으로 만족할 수 없다.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마음에 새긴 기록 목표가 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박병호는 올 시즌 전반기에만 27홈런을 기록, 보란 듯이 재기했다. '역시 박병호'라는 찬사가 쏟아졌지만, 정작 그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시즌 30번째 홈런을 친 뒤 박병호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존심을 회복했다는 안도감뿐 아니라 그동안 마음고생을 한 흔적이 묻어났다. 한층 높아진 목소리에서 그가 개막 전 세운 목표가 30홈런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박병호는 "나는 홈런을 치지 못하면 가치가 떨어지는 선수다. 누가 얘기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새로운 마음으로 야구를 하고 싶어서 KT로 왔다. 다시 30홈런을 치며 지난 2년 동안 부진을 조금이나마 털어낸 것 같다. 아마 앞으로 홈런이 더 나와도 이전처럼 덤덤할 것이다. 그러나 (30홈런을 친) 오늘은 정말 기쁘다"고 힘주어 말했다.
박병호가 두 번 더 '단일시즌 30홈런'을 해내면 이 부분 종전 최다 기록을 보유한 이승엽(8번)을 넘어설 수 있다. 박병호는 이에 대해 "그건 아직 먼 얘기"라며 손사래를 친 뒤 "남은 시즌에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하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