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IS 대전] 감독사퇴·삼미·비·노태형…한화가 18연패 탈출하기까지
일생일대의 경기였다. 어렵고 또 힘겨웠다. 그러나 마침내 기나긴 터널의 끝이 왔다. 한화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하나로 엉켜 모처럼 승리의 포효를 나눴다. 그 한복판에는 역대 최악의 불명예 문턱에서 한화를 구한 '난세 영웅' 노태형(25)이 활짝 웃고 있었다. 한화가 두산을 만난 14일 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 전운이 감돌고 긴장감이 가득했다. 특히 홈팀 더그아웃이 그랬다. 한화는 지난 12일 대전 두산전 패배로 18연패를 기록해 1985년 삼미가 남긴 역대 KBO 리그 최다 연패 기록에 타이를 이뤘다. 이제 1패만 더 하면 프로야구 출범 39년 만에 가장 처절한 연속 패배의 역사가 새로 쓰여질 참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아픔도 겪었다. 창단 이래 최다 연패(14연패)를 경신한 지난 7일 대전 NC전이 끝난 뒤, 한용덕 전 감독이 지휘봉을 놓고 물러났다. 그 하루 전엔 1군과 2군 코칭스태프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구단 내부 갈등이 밖으로 드러나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한화는 퓨처스(2군) 사령탑이던 최원호 감독에게 감독대행을 맡기고 1군 엔트리를 대폭 조정하면서 분위기 전환을 꾀했지만, 돌파구가 없는 팀 상황에선 '백약이 무효'였다. 최 감독대행이 지휘봉을 잡은 뒤에도 4경기를 내리 졌다. 그 사이 한화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쌍방울(1999년 17연패)을 따라잡아 현존 구단 최다 연패 기록을 보유하게 됐고, 끝내 35년 전 사라진 삼미의 기록을 2020년 프로야구에 소환하기에 이르렀다. 당초 19연패 기록 달성 여부는 하루 전인 13일 결정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하늘마저 도와주지 않았다. 비가 그 도전에 쉼표를 찍었다. 그야말로 우여곡절의 연속이자 야속한 드라마였다. 선발 로테이션에 구멍이 난 한화는 13일 경기에 1군에서 공 하나 던져 보지 않은 고졸 신인 한승주를 선발 투수로 내세웠다. 엄청난 부담감을 안고 데뷔전을 치르게 된 한승주는 1회초부터 흔들렸다. 두산 네 타자를 상대로 안타, 볼넷, 안타를 내준 뒤 밀어내기 볼넷으로 선취점을 허용했다. 그러나 와르르 무너지지는 않았다. 계속된 무사 만루서 김재환을 헛스윙 삼진 처리한 뒤 후속 타자 김재호에게 중견수 희생플라이를 내줘 1점과 아웃카운트 하나를 맞바꿨다. 2실점으로 선방한 채 1회를 마쳤다. 한화는 1회말 곧바로 반격했다. 간판타자 김태균이 1사 1루서 왼쪽 담장을 넘어가는 동점 2점포를 날렸다. 그러나 한승주가 2회초 2사 후 박건우에게 좌월 솔로홈런을 내줘 다시 1점 차로 뒤졌다. 여기서 얄궂게 날씨의 방해까지 받았다. 홈런 직후 폭우로 무려 76분간 경기가 중단됐다. 오후 5시 28분부터 6시 44분까지 경기 재개를 기다리는 동안, 양 팀 선발투수들의 어깨는 식어 내려갔다. 한화는 결국 투수를 불펜 이현호로 바꿨다. 이현호가 경기 재개 직후 호세 미구엘 페르난데스에게 우월 솔로포를 맞아 한 점을 더 줬다. 그러자 한화도 2회말 노시환이 중월 솔로포를 쏘아 올리며 3-4로 추격했다. 오랜만에 펼치는 대등한 경기. 한화가 마침내 연패 탈출을 향해 고삐를 조이는 듯했다. 그러나 다시 비가 쏟아지면서 경기가 중단됐고, 이번엔 30분 넘게 기다려도 잦아들 줄 몰랐다. 결국 한화가 3-4로 뒤진 3회말 한화 공격 선두타자 정은원 타석 때 서스펜디드(일시 정지)가 선언됐다. 다른 시즌이었다면 우천 노게임이 선언됐겠지만, 코로나19로 개막이 늦어지면서 생긴 특별 규정에 따라 14일 오후 2시 같은 장소에서 중단 전 상황 그대로 경기를 이어가게 됐다. 시즌 1호 서스펜디드 경기가 하필이면 한화의 연패 신기록 여부가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온 것이다. 당초 예정됐던 한화의 14일 경기 선발은 외국인 투수 워윅 서폴드. 한화가 과연 최다 연패 기록을 막기 위해 서폴드 카드를 서스펜디드 경기에 꺼낼 것인지 관심이 쏠렸다. 한화의 선택은 결국 서폴드가 아닌 왼손 김범수였다. 최 감독대행은 "김범수는 두산전 평균자책점이 2점대고, 서폴드는 4점대다. 서폴드의 퍼포먼스가 나올 수 있는 루틴을 지켜주면서, 확률이 높은 김범수를 쓰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어렵게 재개된 경기. 한화는 4회말 1사 2루서 최재훈이 우중간 적시타를 때려내 4-4 동점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다만 리드는 오래 가지 않았다. 5회초 두산 선두타자 김재환이 투스트라이크에서 다시 재역전 솔로홈런(시즌 8호)을 터트렸다. 7회말 1사 1·2루서는 정은원이 우중간을 가르는 2타점 역전 적시 2루타로 승부를 뒤집었지만, 김태균의 좌전 안타로 이어진 1사 1·3루서 제라드 호잉이 삼진으로 돌아서면서 추가 득점을 하지 못했다. 한화는 8회부터 마무리 투수 정우람을 올려 1점 리드를 지키기 위한 총력전에 나섰다. 그러나 정우람이 2사 1·2루서 이유찬에게 동점 중전 적시타를 내줘 다시 6-6 동점. 한화 더그아웃에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렇게 9회가 찾아왔다. 승리를 위한 마지막 기회. 다시 마운드에 오른 정우람은 2사 3루서 국해성을 삼진으로 돌려 세우고 더 이상의 실점을 막는 데 성공했다. 9회말 한화 공격은 1번 이용규부터 시작됐다. 이용규가 김강률을 상대로 볼넷을 고르자 정은원이 주자를 2루까지 보냈고, 두산은 김태균을 고의4구로 거른 뒤 다음 타자 호잉과 승부를 선택했다. 호잉은 2루수 인필드플라이로 돌아서 그 선택에 확신을 줬다. 아웃카운트가 하나 남은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지난해까지 1군 기록이 하나도 없는 7년차 내야수 노태형. 모두가 무승부로 연패의 연장을 예감하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무명 선수의 패기와 절박함이 그 섣부른 편견을 이겨 버렸다. 노태형은 2사 2·3루서 함덕주를 상대로 3루수와 유격수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끝내기 좌전 적시타를 만들어 냈다. 3루주자 이용규가 홈을 밟았고, 한화는 19경기 만에 귀한 승리를 신고했다. 노태형은 경기 후 "야구선수로서 꿈꿔왔던 순간이 현실로 다가왔다는 게 아직 믿기지 않는다"며 "다음 경기가 남아있기에 마냥 좋아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만, 길었던 연패를 끊는 데 일조한 것이 정말 기쁘다"고 활짝 웃었다. 젊은 유망주들의 반란과 성장. 한화가 가장 기다리는 순간이다. 노태형은 "내가 야구선수로서 우리 팬분들께 기억되는 선수가 돼 보자는 마음,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로 마지막 타석에 들어섰다"며 "앞으로도 계속 1군에서 활약하는 게 목표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대전=배영은 기자
2020.06.14 1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