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일반
스물 셋 선수가 목숨으로 던진 질문…반복할 것인가, 끊어낼 것인가
"이번과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고 최숙현 선수가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7시간에 걸친 기나긴 회의 끝에 대한철인3종협회 스포츠공정위원회 안영주 위원장이 회의실을 나선 시각은 자정이 가까운 6일 밤 11시 경이었다. 안 위원장은 결과를 기다리던 취재진에게 가해자들의 징계 소식을 전한 뒤, 무거운 목소리로 "이것이 고인이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라는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말을 맺었다. 성적 지상주의와 체육계 서열 문화 등 악습이 빚어낸 지옥과 같은 현실로 인해 고 최숙현 선수가 스스로 세상을 등진 지 꼭 열흘 째 되는 날이었다. 안 위원장을 포함해 법조인과 대학교수 등 6명으로 구성된 대한철인3종협회 공정위원들은 이날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2020년 제4차 스포츠공정위원회에서 고(故) 최숙현 선수 사망과 관련해 전 소속팀인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내 가혹 행위를 조사하고 징계를 논의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김규봉 경주시청 감독과 주장 장윤정, 그리고 남자 선배 한 명이 공정위에 참석해 소명 절차를 밟았다. 하지만 이들의 기나긴 소명에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김 감독과 장윤정 영구 제명, 남자 선배 자격 정지 10년이다. 이들은 오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상임위원회의 트라이애슬론 선수 가혹행위 및 체육 분야 인권 침해 관련 긴급 현안 질의에도 증인으로 나서 자신들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국회에서 고인에 대한 미안함은 찾아볼 수 없는 기색으로 "그런 적 없다", "폭행한 일이 없으니 사과할 일도 없다"는 답변만 반복하던 이들은 공정위 조사에서도 일관된 자세를 취했다. 당초 관계자들도 오후 8시 경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했던 공정위가 밤 11시에나 끝난 이유도, 이들이 공정위가 확보한 증거와 상반된 진술로 '버티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안 위원장은 "회의가 길어진 이유는 공정위가 확보한 진술, 녹음파일, 녹음영상 등 증거와 징계 혐의자들의 진술이 상반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이들이 자신의 혐의를 계속 부인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발뺌으로 버티기엔 증거가 너무나 명확했다. 안 위원장은 "고 최숙현 선수의 진술 뿐 아니라 그와 일치하는 다른 진술, 여러 증거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 이들의 혐의가 매우 중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피해자들의 진술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으며 의도적으로 피해 사실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근거다. 반대로 가해자들의 진술은 신빙성이 떨어졌다는 판단이다. 안 위원장은 "세 명의 진술 내용과 패턴이 같아 조력을 충분히 받은 상태에서 대응 방안을 마련해온 것으로 보였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가 협회 공정위가 내릴 수 있는 최고 수위 징계인 영구 제명, 그리고 사실상 선수 생활 끝을 의미하는 자격 정지 10년이 내려졌다. 하지만 공정위의 징계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볼 수는 없다. 자신들의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한 가해자들이 징계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다. 이들은 이번 공정위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대한체육회에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 아직 사법기관의 수사도 남아있다. 대구지검이 특별수사팀을 구성해 이번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지원팀을 별도로 만들어 유족 심리치료와 범죄피해 구조금, 생계비 등을 지원하고 법률 지원도 할 방침이다. 공정위에서 징계를 내릴 수 없었던 소위 '팀 닥터'라 불리는 안 모씨에 대한 수사와 그에 따른 징계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체육계의 적극적인 변화 의지다. 안 위원장의 말대로 고인이 자신의 목숨으로 던진 메시지는 명확하다. 알면서도 쉬쉬하고 사건이 벌어진 뒤에야 다급하게 봉합한 뒤 묻어두고 잊어버리는 일을 반복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제대로 끊어내기 위해 뿌리부터 뽑아낼 것인지. 물론 그러기 위해선 불과 1년 반 전 조재범 사건에서 한 치도 개선되지 않은 지금 상황부터 돌이켜 봐야 한다. 경주시나 경찰, 국가인권위원회 등은 물론 협회와 스포츠인권센터, 대한체육회 등 체육계조차 고인의 목소리를 외면했던 점을 생각하면 가해자들에 대한 체육계의 수위 높은 징계는 너무 늦은 첫 걸음에 불과하다. 가해자들의 법적 처분은 사법부에서 진행하겠지만, 이번 사건의 책임을 개인의 처벌로 마무리 짓고 끝내버린다면 또다시 제자리를 맴도는 셈이 된다. 제도적 장치와 시스템 변화 등 여러 가지 방안이 논의되겠지만, 실효적인 대책을 강구하고 현장을 바꿔나가는 건 결국 체육계의 몫이다. 이대로 같은 비극을 반복할 것인지, 아니면 악습의 고리를 끊어낼 것인지. 물론 답은 이미 나와있다. 정답을 향해 얼마나 효과적으로 풀어나갈 지 그 과정만 남았을 뿐이다. 김희선 기자 kim.heeseon@joongang.co.kr
2020.07.08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