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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꼬집는 눈, 통(通)-장석주의 쾌설] ‘칼의 노래’에서 받은 감동이 지루해졌다…왜?
고증된 사실을 다루는 역사와 역사를 빌려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역사 소설'은 엄연히 다르다. 역사 소설은 상상과 허구로 비벼서 만든 '역사'이기에 고증된 사실을 요구하지 않는다. 역사 소설은 역사를 취하되 재현·반복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낱낱으로 허물어 상상적인 그물로 다시 붙잡는다. '단종애사'(이광수),'임꺽정'(홍명희)에서 '토지'(박경리), '객주'(김주영), '장길산'(황석영), *'칼의 노래'(김훈), '황진이'(전경린), '미실'(김별아)에 이르기까지 역사 소설의 계보를 잇는 작품들에서 고증된 '역사'를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들은 지어낸 이야기다. 거꾸로 조선 왕조의 공공적 사건을 적은 '조선왕조실록'은 날것 그대로는 결코 소설이 될 수 없다. 소설과 역사 기록은 다르다. 기록이란 기억할 만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분별이다. 기억은 욕망의 지속성이란 피를 수혈 받아 이 분별을 수행한다. 허나 소설은 본질에서 허구의 기록이다. 소설은 반(反)기억이라는 뜻이다. 작가는 망각의 영역에 묻힌 개별자들을 살려내 이야기를 짓고, 그 이야기 속에서 숨은 진실을 구조화할 따름이지 역사의 진위에 대해 책임지지는 않는다. 기자 노릇을 오래 하며 간간이 산문이나 쓰던 김훈이 역사 인물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칼의 노래'(2001)를 내놓으며 소설가로 크게 성공한다. '칼의 노래'는 "한국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동인문학상을 받고, 누적 판매부수 100만 부를 훌쩍 넘겼으니, 문학성과 대중성이라는 환상의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셈이다. 이 뒤로 김훈은 '역사'를 취하는 소설들을 잇달아 내놓으며 우리 문단의 알만한 문학상들을 차례로 거머쥠으로써 당대 최고의 작가라는 명예를 듬뿍 누린다. 그의 역사 소설을 성공으로 이끈 동력은 문체의 힘에서 나온다. 그의 문체는 건조하다. 그는 문장을 쓸 때 수사의 넘침을 배제하면서 그것의 주어부와 서술부가 맥락없이 엉키지 않고 정제된 가지런함을 목표로 삼는다. 그는 문장에서 형용사와 부사를 애써 지운다. 사실과 사실 사이를 잇는 인과관계를 밝힐 때, 그의 문체는 더욱 건조하고 삼엄해진다. 그의 문장은 사막에 뒹구는 뼈와 같이 살점 하나 붙이지 않은 채 가파름으로 선다. 허무를 드러낼 때, 혹은 삶의 비루함을 묘사할 때 그 건조함이 누그러진다. 그가 허무에 대해 적을 때 문체는 물기를 머금으며 화사해진다. 출세작 '칼의 노래'는 약육강식의 질서에 사로잡힌 몸과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마음의 진퇴양난에 대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통해 몸의 삶이 토해내는 마음의 윤리성에 대해 끈질기게 묻는다. 그 물음을 속으로 감싸 안으며 떠오르는 게 바로 피로다. '이순신'의 몸은 피로에 눌려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거나 코피를 쏟아낸다. 몸은 감당할 수 없는 것(임금과 조정이라는 권력의 포획 장치)에 맞부딪치면서 그 피로의 찌듦에 도달한다. 이때 피로는 몸이 이 세계와 자아 사이를 가르는 경계라는 것, 욕망들이 솟구치고 가라앉는 장소라는 것, 세계에 대해 항상적으로 실패하는 것임을 말한다.김훈의 역사 소설들을 읽자면, 그가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이념을 믿지 않고, 세상을 의롭게 만든다는 신념들을 의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몸을 믿고 자연의 어김없는 순환성에 기대는 것은 그것들이 만지고 볼 수 있으며, 사람을 피와 살을 가진 현존으로 되돌려놓는 까닭이다. 그는 이념과 신념에 의해 날조되는 인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연인 사람을 묘사하기를 즐긴다. 아울러 그의 무른 살과 느슨한 신념들이 어떻게 세계에 부딪쳐 깨지고 무너져 내리는가를 따라간다. 그는 이념의 옥죔을 싫어하고, 신념으로 분출하는 당파성을 혐오한다. 그는 이념보다는 밥에, 신념보다는 똥과 오줌에 더 이끌린다. 전자는 헛것이고, 후자가 실상이라고 믿는 까닭이다.그가 역사소설로 돌아왔다. 바로 왕정은 문란하고 여린 백성들이 왕정 너머의 세상을 꿈꾸다 치죄 당하는 이야기를 담은 '흑산'이다. 그는 국가와 같은 권력 집단과 어긋나는 사람의 비극을 주로 다루는데,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왕정은 내부의 어지러움과 문란함은 돌아보지 않고 사학에 홀린 자들을 찍어 솎아낸다. 묵은 진리를 지키려는 왕정 권력과 새 진리를 좇는 사학 무리는 쫓고 쫓기고, 베고 베임을 당하는 관계인데, 이런 구도는 겨우 살아서 밥 먹는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을 드러낸다. 작가는 입으로 들어오는 밥과 이것이 오장육부 속에서 소화되어 똥과 오줌으로 나가는 경로를 살핀다. 묵은 생명들은 흘러가고 새 생명들은 흘러와서 새 세상을 이룰 진데, 그때에도 생명을 감당하는 것은 밥일 테다. 그 밥이 뭇 생명들에게 고루 돌아가는 세상만이 의로울 것이다.아랫것들은 눌리고 찢긴 삶에 진절머리를 치다가 새로운 세상을 꿈꾼 '죄값'으로 살이 터지고 피가 사방으로 튀며 뼈가 바수어지고 목이 잘려 강물에 내던져진다. 새 세상을 꿈꾸는 일은 목숨과도 맞바꾸는 불온함이다. 작가는 배교와 순교의 틈바구니에서 찢기고 깨지는 그 아비규환을 시종 담담하게 그려낸다. 말의 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자리에 널브러진 몸이 있다. 이 몸이 감당하는 것은 뜻없는 삶의 암담함과 공허다.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사는 것과 죽는 것의 하찮음, 세상에서 뜻을 세우는 것의 허무에 이르는데, 이 허무는 곧 작가의 허무다. 그래서 작가는 제 몸을 깨고 부수는 매질이 지식인의 내면 형질을 어떻게 바꾸고 그것이 세상의 변동과 연결되는지를 굳이 따지지 않는다. 정약전은 권력의 중심에서 한없이 멀어진 제 삶의 가엾음으로 세상의 가엾음을 끌어안지만, 사건의 그럴 수밖에 없음에 굳게 서지 않음으로 소설 속에서 그 존재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 순매가 정약전의 식생활을 돌보고 몸도 주고 마음도 주며 정약전을 위로하고 섬기는데, 정약전은 제 존엄성으로 그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허나 그 존엄성은 제 인간됨에서 받쳐지지 않고 봉건사회에서 남성 엘리트의 기득권에 의탁한 존엄성이다. 그에 반해, 순매는 남성 욕망의 도구적 존재에 그친다. 이전의 역사 소설에서 보여준, 여성이 인격적 개별성 없이 남성의 성적 종속물로써만 그려지는 저 지독한 남성 중심주의가 솟구친다. 아울러 '흑산'은 문장의 밀도가 높고 단숨에 읽히지만, 문학적 성취는 '칼의 노래'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밥에 기대 목숨을 잇는 일의 비루함과 몸이 감당하는 산 자의 고통은 통렬한 문장을 얻지만, 정약전·황사영·마노리·박차돌·강사녀·길갈녀·아리·김개동·육손이·조풍언 등등 작중인물의 유기적 관련이 느슨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움직이는 이치에 대한 철학적 통찰은 그 이전의 것을 넘지 못한다. 작가는 계통과 질서가 무너진 현실 앞에서의 허무주의, 여성을 남성의 필요와 욕구의 도구가 되는 것을 당연시 하는 위험한 마초의 발상들, 밥과 존재의 비루함을 맞바꾸어야 하는 삶의 곤혹을 되풀이한다. 그래서 '칼의 노래'에서 감동을 받은 사람도 '흑산'에서는 반복에서 오는 지루함을 피할 수가 없다. 김훈의 역사 소설들은 한 이야기를 ‘인물’만 바꿔서 다시 늘어놓는 되풀이를 피할 수는 없는 것인가! 시인·문학평론가※용어설명 *칼의 노래 2001년 발표된 김훈의 대표작. 백의종군하는 장면부터 시작해 노량해전에서 사망하기까지 치열했던 이순신의 삶을 건조하면서도 강렬하게 담아냈다. 이순신을 삶의 허무에 맞서는 인물로 그렸다.*정약전(1758~1816) 정약용의 둘째 형. 신유사옥(1801) 당시 다른 천주교도와 함께 화를 입고 흑산도로 유배돼 생을 마쳤다. 흑산도의 어패류를 연구한 저서 '자산어보'를 남겼다.※장석주는 2000년 서울을 떠나 경기도 안성에 정착한 후 '수졸재'를 짓고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다. 문학가로는 보기 드문 부지런함으로 시인·소설가·문학비평가 등의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고 있다. '탐욕스러운' 독서가이기도 하다. 노자·장자·주역 등의 매력에 빠져 지내며 최근 15번째 시집 '오랫동안'을 펴냈다.
2012.02.13 1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