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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일반

이다도시 부친상 공개 “너무 빨리 가셨다… 편히 쉬세요”

방송인 이다도시가 부친상을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이다도시는 19일 자신의 SNS를 통해 지난주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이다도시는 이 글에서 “안타깝게도 지난주에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서 “너무 빨리 가버린 그는 정말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훌륭하고 관대한 사람이었다”며 애도했다. 이어 “아빠! 편히 쉬세요”라고 덧붙였다.이다도시는 199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방송인으로 최근 MBC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 스타’에 출연해 변함없는 입담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는 2023년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프랑스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정진영 기자 afreeca@edaily.co.kr 2023.11.21 16:12
예능

‘라디오스타’ 이다도시 “젊은 사람 나 못 알아봐, MZ 인지도 높이고파”[TVis]

방송인 이다도시가 MZ 세대에게서 인지도를 높이고 싶다고 말했다.이다도시는 8일 오후 방송된 MBC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최근에 부산에 갔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알아봤다. 그랬더니 주변에서 젊은 친구들이 ‘이다도시 뭐냐’고 하더라. MZ 세대 인지도를 높이고 싶어 ‘라디오스타’에 나왔다”고 말했다.이를 들은 김구라는 “10년 넘게 방송을 안 했는데 알아보길 바라는 건 욕심일 수 있다”고 했고, 이다도시는 “전에는 선글라스 끼고 마스크 쓰고 차 안에 조용히 있어도 알아봤다”며 전성기 시절을 언급했다.정진영 기자 afreeca@edaily.co.kr 2023.11.08 23:56
영화

[28th BIFF] ‘2023 프랑스의 밤’ 임순례 감독, 에투알 뒤 시네마 수상

영화감독 임순례가 에투알 뒤 시네마 트로피를 받았다.주한 프랑스 대사관과 유니 프랑스가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를 맞아 7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파라다이스 호텔 부산에서 개최한 ‘2023 프랑스의 밤’에서 영화 ‘교섭’의 임순례 감독이 에투알 뒤 시네마 상을 받았다.‘프랑스의 밤’은 해마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이 되면 개최되는 행사다. 한국과 프랑스 영화인들의 교류를 통해 양국의 우정을 다진다. 에투알 뒤 시네마는 양국의 영화 교류와 발전에 기여한 한국 영화인들에게 수여되는 상이다.‘더 비스트’로 부산을 찾은 프랑스의 대표 감독 베르트랑 보넬로는 “수상자인 임순례 감독과 영화스타일은 다르지만 자유를 주제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큰 공통점이 있다. 임순례 감독에게 이 상을 건네게 돼 큰 영광”이라고 밝히며 임 감독에게 트로피를 건넸다.임순례 감독은 유창한 프랑스어로 “내가 프랑스어를 할 수 있다는 걸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오늘은 꼭 프랑스어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해 좌중을 깜짝 놀라게 했다.임 감독은 “프랑스 문화원에서 누벨바그 영화를 보며 영화감독의 꿈을 꿨고, 프랑스 유학 시절 1000여 편의 영화를 값싸게 볼 수 있었다. 또 프랑스 국립대학에서 학비를 무료로 영화를 배울 수 있어 감사했다”면서 “그때 배운 똘레랑스라는 문화적 차이, 생각의 차이를 수용하는 관용의 마음을 배웠다. 그것이 나의 삶과 영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인사했다.이날 행사는 방송인 이다도시의 사회로 진행됐다. 또 부산국제영화제 남동철 집행위원장 직무대행, 영화진흥위원회 박기용 위원장, 프랑스국립영화영상센터 제레미 케슬레 유럽 및 국제정책 팀장 등이 참석해 축사를 했다.부산=정진영 기자 afreeca@edaily.co.kr 2023.10.09 09:47
연예

'SBS스페셜' 이다도시, 前남편 신상 공개한 이유

이다도시가 전 남편의 신상을 공개한 이유에 대해 밝혔다. 16일 방송된 'SBS 스페셜'에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전 남편의 신상을 공개한 방송인 이다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2010년 5월 전 남편과 이혼했다. 이다도시는 이혼 당시 양육비를 매달 얼마나 지급할지 정한 뒤 협의 후 이혼했다고 했다. 2012년부터 2013년까지 매월 120만 원, 그리고 2017년까지 140만 원,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 2023년까지 매월 70만 원을 주기로 하고 각자 사인을 했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이와 관련, 이다도시는 "아무것도 받아본 적 없다. 이혼하고 약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혼 후 기다렸다. 좀 있으면 균형이 잡혀서 진행이 되겠지 싶었는데 연락 오지 않았다. 아이들도 한 번도 아빠에게 연락받아본 적 없다"고 전했다. 연락을 취해도 소용이 없었고 당장 내일 살 길이 막막하니 책임 앞에서 움직이기 바빠 틈도 없었다고. 이다도시의 고백은 안타까움을 배가시켰다. 5년 전 양육비 이행 관리원이 생겼을 때 쾌재를 불렀지만 전 남편은 어떠한 반응도 없었고 해외에 있어 그 명령이 힘을 발휘하기도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신상 공개 전 많은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상의 끝에 신상을 공개하기로 했고 전 남편이 그때 연락을 해왔지만 해결할 의지는 전혀 없었다고 털어놨다. 주변에서 왜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냐고 많이들 묻곤 했던 상황. 이다도시는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떠나나. 이혼 때문에 내가 갖고 있던 꿈을 접을 필요는 없었다"면서 여러 이유 때문에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았고 대한민국 엄마로서, 아이들을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키우고 싶다는 변함없는 마음을 내비쳤다. 전 남편은 베트남에서 한국 관련 업체 두 곳을 운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얘기할 게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 전부였다. 황소영 기자 hwang.soyoung@jtbc.co.kr 2020.08.1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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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 이다도시, 예비신랑 공개.."사랑#행복#포에버"

프랑스 출신 방송인 이다도시가 재혼한다. 이다도시는 5일 오전 자신의 SNS에 '헐! 다음 토요일에 노르망디에서 재혼합니다!'라는 글과 함께 예비 신랑과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 속에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다도시와 예비 신랑의 모습이 담겼다. 이다도시는 사진을 공개하며 '#재혼만남 #재혼 #육인가족 #사랑 #행복 #forever' 등의 해시태그를 붙이며 결혼을 앞둔 소감을 밝혔다. 이다도시는 1990년대 활발히 활동했던 1세대 외국 출신 방송인이다.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여러 TV 프로그램을 통해 활약했다. 1993년 한국인과 결혼해 두 아들을 뒀고 16년 만인 지난 2009년 이혼했다. 2012년부터 숙명여대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선 기자 park.jungsun@jtbc.co.kr 2019.08.05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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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도시, 이혼 후 생활고 “아들에 돈 빌려 생계꾸려”

방송인 이다도시가 이혼 후 겪은 생활고를 고백했다. 지난 29일 방송된 MBN 예능 프로그램 ‘속풀이쇼 동치미’에서는 ‘돈이 웬수다’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이다도시는 이혼 후 초등학생 아들이 준 500만 원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일부러 부탁한 것은 아니었다”면서 “합의이혼이 아니라 복잡한 소송이었고 1년 반이나 계속됐다. 이혼 소송을 하면 부부 재산이 다 마비된다. 해결될 때까지 손도 댈 수 없다”고 말했다. 프랑스 출신 방송인 이다도시는 지난 1993년 한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으며 2010년 이혼했다. 그는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 프랑스에 작은 집을 하나 구입해 뒀는데 집값을 천천히 갚고 있었다. 그런데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에 환율이 크게 하락했고 갚아야 할 이자는 급등했다. 경제상황은 정말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이다도시는 “당시 큰 아들 유진은 12살이었다”며 “어느 날 아들이 내게 와서 ‘엄마 나 돈 있다. 내가 엄마한테 빌려주면 안 될까?’라고 하더라. 아들이 어렸을 때 광고도 찍고 방송활동도 했다”고 전했다. 홀로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이다도시는 “우리 부모님도 잘 벌었고 나는 우리 부모님보다 더 돈을 많이 버는 것 같은데, 또 굉장히 아끼고 있는데 돈이 안 모인다”며 “요즘 미치겠다. 이렇게 저축할 수 없을 때는 소비도 안 한다”고 설명했다. 이다도시는 아들이 그때 깜찍한 고민도 했다고 말했다. 엄마에게 이자는 어떻게 달라고 해야 할까 걱정했다고. 이다도시는 “‘걱정하지마라. 은행 이율만큼 챙겨줄게’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갚았냐는 MC 박수홍의 물음에 이다도시는 “당연히 갚아줬다. 6년반 전에 다 갚았다”며 “자녀에게 집안 경제에 대해 적당히 얘기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온라인 일간스포츠 2017.05.01 17:57
연예

[밀젠코 취중토크③] "사고 뒤 아내 떠나고, 주머니 속엔 6달러"

국내 예능 프로그램에서 외국인을 보는건 일반인이 대부분이었다. 과거에는 로버트 할리·이다도시같은 일반인이 방송인으로 각광받았다. '외국인인데 한국말도 잘하네'라는 감탄부터 구수한 사투리나 몸에 밴 한국적 생활습관으로 '한국 사람 다됐네'라는 동질감도 갖게도 했다. 지난 몇년간은 그 바람이 더 거셌다. JTBC '비정상회담'으로 알베르토·장위안 같은 전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이 스타가 됐다.최근 얘기를 해보자면 그 반경이 더 넓어졌다. 일반인뿐 아니라, 유명 해외 스타들이 안방 극장을 찾고 있다. MBC '무한도전'에 출연한 잭블랙, JTBC '뉴스룸'에 출연한 휴잭맨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놀라웠던 장면은 MBC '복면가왕'에 출연해 임재범의 '고해'를 부른 록밴드 스틸하트의 밀젠코 마티예비치의 출연이었을거다.해외 스타들의 한국 러시는 어떻게 봐야 할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의 문화 시장의 규모가 커졌고, 그만큼 매력적이라는게 첫 번재 이유일 것 같다. 일간스포츠의 대표 인터뷰 코너 취중토크 또한 한국 엔터테인먼트의 세계화에 발맞춰 첫 번째 외국인 게스트를 맞았다. 밴드 스틸하트의 보컬리스트 밀젠코 마티예비치가 그 주인공이다. 밀젠코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대표 록발라드 넘버 '쉬즈곤'(She's Gone)을 불렀고, '아윌 네버 렛 유 고'(I'll Never Let You Go)로는 빌보드 차트 14위까지 오른 이력의 주인공이다."술 마시면서 하는 인터뷰라니"라며 놀라워하다가, 마른 멸치 안주에 맥주 칭따X 2병을 금세 비웠다. 힘들었던 시절을 이야기하면서는 먹먹해진듯 말도 끊어가고, "로커가 왜 사랑노래만 부르냐"는 호기로운 질문에는 "I'm not a puXXX"(난 계집애가 아냐)라며 열도 받는다. 한국인이나 미국인이나, 일반인이나 할리웃 스타나 '술 들어가니 다 똑같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흥미진진했던 2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사고가 난 뒤 재활의 기간도 끔찍했죠."정말 말도 안되는 돈이 들었죠. 그리고 집에 도착하고 3일 정도가 지나면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찾아왔어요. 두통 때문에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죠. 마치 콘크리트에 머리를 계속 박는 느낌이었어요. 7개월 뒤 겨우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뒤였죠. 수많은 소송과 병원비 때문에 파산한 상태였고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간 뒤였어요. 제 주머니 속에는 6달러가 있었고요. 저와 다니며 백만장자가 된 형은 쓰레기 같은 차 한대만을 줬을 뿐이었어요. 그 차를 몰고 운전을 하다 경찰에게 잡혔을 때 '난 이제 돈도 없고 면허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라고 하자, 경찰이 모른 척 놓아주었을 정도였어요. 집은 추웠고 먹을 것도 없었어요. 심지어 망할 겨울이었죠. 친구들의 집을 전전했고 많은 기억들을 잃었어요." -어떻게 극복했나요."일단 심리적인 치료를 받았죠. 한 여성 심리학자를 만났어요. 카운셀링 도중 집중하는 법을 배웠어요. 제 뇌가 직관적이지 못하고, 방향성을 상실한 상황이라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는 습관이 필요하다고요. 그 뒤로는 다시 예전의 정신으로 돌아오기 위해 저 자신을 끊임없이 테스트했어요. 그러다 영국에서 녹음을 할 때였어요.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와 의자에 앉았는데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키게 된 거예요. 사람들이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죠. 갑자기 내가 돌아온 거였어요. 뭔가 내 정신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거 같았어요. 정말 오래 걸렸죠. 사고가 난게 1992년이고 정신을 차린게 2004년이니까요. 지금은 고음을 낼 때도 통증이 없어요. 완벽한 상태입니다." -록스타가 된거에 대해 후회한 적은 없나요."제가 왜 그러겠어요. 이건 정말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이 록스타가 될 수 없잖아요. 전 제 인생에 록스타가 되거나 '노바디'인 두 길 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전 록스타로 선택받았고 받아들였어요.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배드보스 컴퍼니'라는 한국 회사와 계약을 해 화제가 됐어요. 지금 소속사와 매니저는 어떤가요."싫어요. 최악이죠. 하하. 농담이고요. 그들은 절 믿어주며 뭔가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해요. 전 그들은 존중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죠. 우리는 함께 세운 비전을 이루기 위해 팀으로서 최선을 다할것이고 그것이 제겐 가장 중요해요." -'복면가왕'에까지 나왔어요. 재미있는 경험이었나요."정말 재미있었죠. 제가 모두를 속였다고 생각했을 때 그 때 정말 재밌었어요. 오해하지는 말아주세요. 저도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거든요. 재미가 70%라면 스트레스도 30% 정도는 있었다고요. 이어폰으로 누군가가 '네''아니요''인사하세요' 등의 얘길 일러줬고, 따라 말하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관객들이 내가 한국인인지 아닌지 아예 생각도 못할 때 정말 재밌었어요.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역시 제가 마스크를 벗었을 때였죠.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봤는데, 다들 '이게 뭐지'라는 표정이었어요. 정말 즐거웠죠." -한국에서의 계획은요."한국은 제게 새로운 시작같은 거예요. 정말 그렇게 느껴요. 제가 한국에 올 때마다 항상 많은 사랑과 환영을 받아왔죠. 가장 큰 계획은 역시 음악을 만들고 노래하고 싶어요. 전 한국사람들이 나를 록스타가 아닌 친구처럼 대해주는 것이 정말 좋아요. 정말 이상한 기분이지만 좋아요.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자신의 부인이 날 좋아한다며 사진을 찍자고 해요. 재미있는 일이죠. 이젠 새로운 앨범이 나올 거예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앨범이 될겁니다." 엄동진 기자사진=양광삼 기자장소협찬=홍대 게리슨바[밀젠코 취중토크①] "마약이 음악과의 교감 방해하기 원치 않아"[밀젠코 취중토크②] "왜 사랑노래만 하냐고? Love kills nobody"[밀젠코 취중토크③] "사고 뒤 아내 떠나고, 주머니 속엔 6달러" 2016.03.18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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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젠코 취중토크②] "왜 사랑노래만 하냐고? Love kills nobody"

국내 예능 프로그램에서 외국인을 보는건 일반인이 대부분이었다. 과거에는 로버트 할리·이다도시같은 일반인이 방송인으로 각광받았다. '외국인인데 한국말도 잘하네'라는 감탄부터 구수한 사투리나 몸에 밴 한국적 생활습관으로 '한국 사람 다됐네'라는 동질감도 갖게도 했다. 지난 몇년간은 그 바람이 더 거셌다. JTBC '비정상회담'으로 알베르토·장위안 같은 전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이 스타가 됐다.최근 얘기를 해보자면 그 반경이 더 넓어졌다. 일반인뿐 아니라, 유명 해외 스타들이 안방 극장을 찾고 있다. MBC '무한도전'에 출연한 잭블랙, JTBC '뉴스룸'에 출연한 휴잭맨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놀라웠던 장면은 MBC '복면가왕'에 출연해 임재범의 '고해'를 부른 록밴드 스틸하트의 밀젠코 마티예비치의 출연이었을거다.해외 스타들의 한국 러시는 어떻게 봐야 할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의 문화 시장의 규모가 커졌고, 그만큼 매력적이라는게 첫 번재 이유일 것 같다. 일간스포츠의 대표 인터뷰 코너 취중토크 또한 한국 엔터테인먼트의 세계화에 발맞춰 첫 번째 외국인 게스트를 맞았다. 밴드 스틸하트의 보컬리스트 밀젠코 마티예비치가 그 주인공이다. 밀젠코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대표 록발라드 넘버 '쉬즈곤'(She's Gone)을 불렀고, '아윌 네버 렛 유 고'(I'll Never Let You Go)로는 빌보드 차트 14위까지 오른 이력의 주인공이다."술 마시면서 하는 인터뷰라니"라며 놀라워하다가, 마른 멸치 안주에 맥주 칭따X 2병을 금세 비웠다. 힘들었던 시절을 이야기하면서는 먹먹해진듯 말도 끊어가고, "로커가 왜 사랑노래만 부르냐"는 호기로운 질문에는 "I'm not a puXXX"(난 계집애가 아냐)라며 열도 받는다. 한국인이나 미국인이나, 일반인이나 할리웃 스타나 '술 들어가니 다 똑같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흥미진진했던 2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스틸하트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었나요."원래는 적색경보라는 이름이었어요. 근데 뉴욕에 DJ 적색경보란 사람이 저작권을 갖고 있어서 바꿔야했죠. 하루는 LA 레스토랑에서 우리 이름을 짓고 있었어요. 그 순간 저쪽에서는 누군가가 'heart'란 이름을 애기했고 저 쪽에서는 누군가는 'steel'을 얘기하는 거예요. 두개를 합쳤더니 스틸하트가 된 거죠. 완벽한 이름 같아요. 에너지 정신 소울 뮤직 모든 것이 들어맞는 이름이었어요." -스틸하트는 곧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나요."하루는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는데 아버지가 잘 지냈냐고 묻더군요. 그 자리에서 아버지께 난데없이 '오늘 이 곳을 떠나 LA에서 슈퍼스타가 되겠어요'(I'm going to Hollywood to become a star)라는 얘길 꺼냈어요. 정확하게 그 말이 기억나네요. LA에 도착해 쓰레기 같은 차를 렌트했어요. 그리곤 한 프로듀서도 소개받았죠. '쉬즈곤''캔트스탑러빙유''쉬 러브즈' 같은 곡들을 들려줬는데, 듣자마자 훌륭하다는 반응이 나왔죠. 그래서 그 프로듀서는 우리를 매니저에게 소개시켜 줬어요. 근데 LA에 더 머물 시간이 없다며 돌아서더라고요. 우린 간절했어요. '들어만 봐 달라, 손해볼 거 없지 않느냐'고 졸랐고 매니저는 데모를 뉴욕의 자기 사무실로 보내라고 하더군요. 전 긴급우편으로 보내 그가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사무실 책상에서 우리의 데모를 듣길 원했어요. 일주일이 지나고 전화가 왔어요. 유선상으로 우리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 매니저는 첫 마디로 정확하게 '너 괴물이야?'(You fuXXing freak)라고 하더군요. 빨리 뉴욕의 사무실로 오라는 말과요. 그리고는 순식간에 정식 녹음을 하게 됐어요. 아마추어에서 프로페셔널이 된 거죠." -어려서부터 원하던 꿈을 단숨에 이뤘군요."사실 그렇진 않았어요. 녹음을 하고 앨범을 냈지만 7개월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기획사에서도 더 이상 뭘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어요.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일본에서 우리 노래가 인기가 있단 얘기가 나왔어요. 아마도 1990년일 거예요. 어느 날 매니저가 일본에 가서 인터뷰나 좀 하고 오자고 하더군요. 근데 인터뷰나 하는 수준이 아니었어요. 일본 공항엔 기자들과 팬들이 가득 차 있었어요. 정말 미친 듯이요. 록스타가 되려고 마음먹은 뒤로 11년간 완전한 무명이었는데 그 기다림과 노력들이 일순간 '쾅' 하고 보상받은 기분이었어요. 매니저는 이미 이 상황을 알고 있었어요. 우릴 놀라게 하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였어요. 차에 타기 전에 쿨한 척 인사했지만 차에 타자마자 놀라서 얼마나 흥분의 욕을 했는지 몰라요. 그리곤 얼마나 많은 인터뷰를 했는지 모르겠어요. 3일 동안 인터뷰를 하다 연습이 하고 싶어서 피아노가 있는 방을 물어봤어요. 근데 그 당시 일본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저녁을 먹고 오니 한 일본인이 와서 미안하다며 피아노를 방에 들여오려고 정말 노력했지만 너무 커서 가져올 수 없었다고 하는 거예요. 피아노 있는 방을 물어봤을 뿐인데 콘서트용 그랜드 피아노를 우리 방에 가지고 오려고 했던 거죠. 그 정도로 존중을 받았아요. 첫 공연도 마찬가지였어요. 커튼이 올라가고 객석을 보는데, 심장병이 걸릴 뻔 했죠. 너무 흥분해서 제대로 된 페이스로 공연을 할 수도 없었고요. 무대가 끝난 뒤에는 대기실에 가서 산소 마스크를 쓴채로 3시간을 앉아있었어요. 아마도 우리 커리어의 본격적인 시작이었을 거예요." -스틸하트의 히트곡 중 사랑노래가 유독 많은 이유는요."사랑은 위대하기 때문이에요. 제 성격이 여성스러워서 그런건 아니고요. 그거 아나요. 사랑은 아무도 죽이지 않아요. 약물이나 폭력에 관한 음악도 괜찮죠. 하지만 그건 제가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일 힘든 얘기를 꺼내볼게요. 무대 위에서 큰 사고를 당했고 극복하기 굉장히 어려웠다고 들었어요."(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뒤) 끔찍했어요. 콜로라도의 콜로세움에서 공연할 때 일이에요. 그 공연장에는 큰 기둥이 양쪽에 있었어요.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그냥 서 있었죠. 쓰러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듯 했어요. 하지만 전 로커잖아요. 노래를 하면서 행동도 과격해지고, 점프도 수차례하고요. 결국은 기둥이 넘어진 거예요. 그리고 아주 간발의 차이로 제 뒤통수를 때렸죠. 1초만 더 있었어도 부딪치지 않을 수 있었어요. 결국 얼굴부터 바닥에 닿으면서 코가 부러지고 턱이 깨지고 광대뼈가 망가졌어요. 뒤통수는 찢어졌고 등은 뒤틀리고 무릎도 나간거 같았죠. 사람들이 절 일으켜 세웠지만 그 순간 너무 화가 났어요. 그 때 제 모든 경력이 끝날 것을 알았거든요. 더 높은 레벨로 가고 싶었는데 절망뿐이었어요. 눈은 감았지만 주변이 피바다가 된 것은 알았고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렸어요. 누군가는 병원으로 옮기자고 했고 누군가는 상처만 나서 괜찮다고도 했죠. 그 때 전 신인지, 내 자신인지, 아니면 제 3의 인물인지 모를 존재와 이야기를 했어요. '음악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래, 아니면 지금까지 보다 더한 일을 겪으면서도 음악을 할래'라는 질문이었고, 전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후자를 택했죠." 엄동진 기자사진=양광삼 기자장소협찬=홍대 게리슨바[밀젠코 취중토크①] "마약이 음악과의 교감 방해하기 원치 않아"[밀젠코 취중토크②] "왜 사랑노래만 하냐고? Love kills nobody"[밀젠코 취중토크③] "사고 뒤 아내 떠나고, 주머니 속엔 6달러" 2016.03.18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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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예능시대, 더 이상 그들이 낯설지 않은 이유

우리는 한국에서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에게 '왜 한국에 살면서 한국어를 못하냐'고 묻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우리에게 영어로 뭔가 물어오지 않을까 걱정하며 시선을 피하기 일쑤다. 오바마가 한국어로 '같이 갑시다'라고 한 마디 한 일은 기사 수십 건을 만들었다. 짐 캐리가 영화 '예스맨'에서 한국어를 배워, 건물에서 뛰어내리려는 사람을 보고 '누가 자살하려고 한대요'라고 한국어로 말할 때 우리가 느낀 감정은 짐 캐리의 배역인 칼 알렌이 열심히 사는 데 대한 동경은 아니었다. 미국 사람이 한국어를 '배워줬다는' 고마움이나 짐 캐리는 가졌을 지 알 수 없는 우리의 동질감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사실 짐 캐리의 발음은 자막 없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는데도 말이다.'할린데예'는 그래서 등장과 동시에 열광적인 환호를 받을 수 있었다. 외국인이 한국어를 잘 구사할 뿐 아니라 무려 표준어가 아닌 사투리를 사용했다. 외국인이지만 가장 한국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한국에 정착했고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여 세 아들까지 두었다.이참은 교양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귀화해 스스로 독일 이 씨의 시조가 되었다. 드라마 '천국의 계단', '제5공화국' 등 백인 남성이 필요한 역할 대부분을 독차지했다. 성추문 논란으로 한국관광공사 사장직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방송인으로, 기업인으로, 정치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다도시는 프랑스 출신으로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 학생으로 처음 한국에 와 한국인 남성과 결혼했고, 특유의 프랑스어 억양이 섞인 한국어를 구사하며 방송에 출연해 인지도를 높였다.1999년, '남희석 이휘재의 한국이 보인다'에 중국인 보쳉과 이탈리아인 브루노 두 사람이 등장해 한국 국토 순례에 나섰다. 한국인도 쉽지 않은 국토 순례에 외국인이 도전한다는 것만으로도 신선해 당시 많은 인기를 끌었다. 현재 보쳉은 중국에서 성공적인 기업가로 자리잡았고, 브루노는 이탈리아의 배우로 성장했다.2006년, '미녀들의 수다'가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방송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어에 능숙한 외국인 미녀들을 패널로 출연시켰다. 이들은 한국에서의 일화나 자국 문화를 소개했다. 이 방송을 통해 이탈리아의 크리스티나, 중국의 손요, 핀란드의 따루, 영국의 에바 등 많은 외국인들을 호사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했다. 이 방송은 2010년 폐지되었지만 일본의 사유리는 지금도 고정 프로그램이 있을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2013년, 샘 해밍턴은 '진짜 사나이'를 통해 한국의 군대 문화와 외국인이 삐걱거리며 섞여드는 모습으로 연일 화제를 만들었다. 함께 출연했던 김수로나 서경석, 류수영, 손진영, 미르 등은 아무리 능숙해도, 아무리 미숙해도 샘이 될 수는 없었다. 샘은 외국인의 예능 출연 효과를 다시 한 번 일깨웠다. 이후 '나혼자 산다'에 프랑스인 파비앙이 잘 생긴 외모와 태권도를 앞세워 이름을 날렸고, 가나 출신의 샘 오취리의 얼굴도 시청자의 눈에 익었다.2014년, 이제 '비정상회담'에 이어 '헬로 이방인'이 정규편성된다. 바야흐로 예능의 외국인 전성시대를 맞았다. 외국인 100만 명 시대,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외국인은 이제 더 이상 신선하지 않지만 그들은 아직 한국에 대해 할 말이 많고 우리는 그들에게 들을 이야기가 많다. 온라인 일간스포츠 2014.09.15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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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송지은-한선화, 베트남 왜 갔나했더니…

시크릿 송지은·한선화가 다문화 가정 어린이를 위한 '드림 메이커'가 된다.두 사람은 29일 방송되는 MBC 창사 특집 프로그램 ‘네 꿈을 펼쳐라’에서 다문화 가정의 청소년들을 만나 응원했다. 이번 프로그램은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글로벌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이들이 자신만의 꿈을 키워나가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기획됐다.두 사람은 중학교 3학년인 다문화 가정의 소녀와 어머니의 나라, 베트남을 여행하며 추억을 쌓았다. 소녀에게는 대한민국과 베트남의 가교 역할을 하는 글로벌 리더들을 만나게했다. 소녀가 꿈을 갖고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자 노력했다. 특히 송지은은 자신의 트위터(@SECRETsongjieun)에 베트남을 대표하는 전통모자 ‘논(nonh)을 쓰고 나란히 앉은 세 사람의 다정한 뒷모습이 담긴 사진과 함께 ‘베트남에서 찍은 사진! 방송으로 곧 공개될 예정’이라는 글을 올려 눈길을 모았다. ‘네 꿈을 펼쳐라’는 탤런트 최수종과 아나운서 최현정이 진행을 맡는다. 이 외에도 방송인 이다도시와 사유리, 걸그룹 쥬얼리의 예원과 세미, 국회의원 이자스민 등이 패널로 참석한다. 또한 다문화 가정의 청소년들과 한국인 청소년 100명, 교사 10인, 학부모 10인 등이 일반인 패널로 참석해 다문화 가정들이 경험을 솔직하게 들어보고 이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 등을 생각 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시크릿은 오는 12월 새로운 싱글을 발표하며 오랜만에 완전체로 활동을 재개한다. 엄동진 기자 kjseven7@joongang.co.kr 2013.11.29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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