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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北 해상서 쏘고, 그대로 기름부어 불태워…"화장 아니다"

북한이 군 지휘 계통에 따라 해상에서 40대 공무원 A씨를 피격하고, 그 자리에서 기름을 뿌려 불태운 정황이 드러났다. 군 관계자는 "(북측이 인원이) 사격 이후 방호복과 방독면 착용한 채 시신에 접근해 기름을 뿌리고 불태웠다"며 최소한의 장례절차를 지낸 뒤 화장한 게 아니라고 24일 밝혔다. 군 관계자는 또 "22일 오후 9시 40분쯤 총격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며 "몇발을 쐈는지는 추정하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군 감시 장비로 관측 된 불빛으로 시신이 불태워진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군 관계자는 "22일 오후 10시 11분쯤 연평도 군 감시 장비가 불빛을 관측했는데 북한군이 시신에 접근해 불태운 정황으로 보인다"며 "시신의 잔해가 해상에 남아있는지는 NLL(북방한계선) 이북이라 확인할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군 측은 또 총격에 대해 북에 사실관계 확인을 요구했지만, 답변이 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조치에 따라 경계 안에 들어오면 무조건적 사격을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한편 앞서 정부는 지난 21일 서해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상에서 어업지도선에 타고 있다 실종된 A씨가 북한군 총격을 받고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23일 밝혔다. 군 측이 해당 공무원의 자진 월북 가능성을 높게 판단한 가운데, 동료 공무원들은 가능성이 적다고 입을 모았다. 야당에서도 정부의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A씨는 자녀 2명을 두고 있는 평범한 40대 가장이며 평소 특이사항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석현 기자 ko.sukhyun@joongang.co.kr 2020.09.24 13:18
경제

월북한 20대 탈북민, 성폭행 혐의도…교동도서 헤엄쳐 간 듯

군 당국이 26일 일부 탈북민이 3년 만에 다시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북한으로 돌아갔다는 북한 발표를 공식 인정한 가운데 그의 월북 경로 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북한은 이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3년 만에 불법적으로 분계선을 넘은 월남 도주자’ ‘7월 19일 개성으로 귀향’ 등 월북한 탈북민과 관련한 신원 단서를 공개했다. 개성 출신 탈북민이 많지 않고 탈북 시점도 2017년으로 특정된 만큼 탈북민 커뮤니티 등에서는 특정인으로 추정 범위가 좁혀지고 있다. 경기 김포경찰서 등에 따르면 북한이 지난 19일 월북했다고 주장한 탈북민은 김포에 거주하는 20대 남성 A씨일 가능성이 크다. 1996년생 남성으로 개성에서 중학교까지 나온 것으로 알려진 A씨는 지난 2017년 8월 서해 교동도를 헤엄쳐 귀순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지난 2017년 8월 11일 합동참모본부는 “오늘 오전 1시경 교동도 전방 해상으로 귀순해온 북한 주민 1명을 구조했다”고 밝힌 바 있다. 교동도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한 섬으로 북한과의 최단거리가 2.5km에 불과해 북한 주민들이 수영으로 건너와 귀순한 사례가 잦은 곳이다. 2015년 9월 북한 주민 1명이 교동도 앞바다로 남하했고, 2014년 8월에도 20대와 50대 남성 2명이 교동도까지 헤엄쳐 귀순했다. 2013년 8월에도 40대 북한 주민이, 2012년 9월에는 20대 북한 주민이 통나무를 잡고 교동도까지 떠내려와 귀순했다. 이에 따라 A씨가 이번에도 교동도를 통해 월북했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실제 A씨가 월북 전 강화군 교동과 경기도 김포 등을 사전 답사한 정황도 포착된 것으로 전해졌다. A씨의 신원과 월북 방법 등에 시선이 모이는 가운데 A씨가 지난달 중순 김포 자택에서 한 탈북민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사실도 전해졌다. 당시 강간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A씨가 주변 탈북민의 자금 3000만원을 빌려 월북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개성시에서 악성비루스(코로나19)에 감염된 것으로 의심되는 월남 도주자가 3년 만에 불법적으로 분계선을 넘어 7월 19일 귀향하는 비상사건이 발생하였다"고 전했다. 정혜정 기자 jeong.hyejeong@joongang.co.kr 2020.07.27 08:58
경제

월북 20대, 한달 전 유튜브서 "개성공단 폐쇄로 힘들어 탈북"

북한이 26일 개성으로 월북했다고 밝힌 탈북자로 추정되는 김모씨(24)는 채 한달도 되기 전인 지난 6월엔 유튜브에 출연해 자신의 탈북 경위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김씨는 지인인 탈북민 김진아씨의 유튜브 채널인 '개성아낙'에 여러 차례 출연해 2017년 6월 자신이 탈북하게 된 경위 등을 소상히 밝혔다. 지난달 23일 등록된 유튜브 영상에서 김씨는 탈북 계기와 관련, "개성공단이 깨지면서(문을 닫으면서) 살기가 힘들어 한국을 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북에서) 장사를 했는데 개성공단 (폐쇄 이후) 잘 안 돼 금을 캐거나 약초를 캐봤지만 모두 잘 안 됐다"면서 "(어릴 때부터) 양쪽 귀가 잘 안 들린 것도 영향을 미쳐서 힘들고 희망이 안 보였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이어 "그러다가 백마산(개성시 해평리 소재)에 올라가 3일간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지내다가) 마지막에 김포 쪽을 바라봤는데,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초저녁에 불빛이 반짝이는 게 너무 궁금해졌다"며 "죽기 전에 한번 가보기나 하자는 마음으로 (탈북을)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개성공단 폐쇄로 개성의 모든 게 잘 안 돌아갔다. 공단에 다녀 우리를 많이 도와주던 고모네도 상황이 많이 안 좋아져 시골로 내려갔다"라고 말했다. 또 김씨는 "(한국에서 귀를 치료하고) 너무 감사했다"며 "고향의 어머니나 형제들에게 알려주고 싶단 서러움에 병원에서 눈물이 나더라"고 치료 당시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김씨는 3일 후인 26일 등록 영상에선 자신의 탈북 당시 상황에 대해 소개했다. 김씨가 북한 주장대로 월북했다면 탈북 경로를 되짚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김진아씨에 따르면 김씨는 17일 지인과 함께 교동대교 주변을 다녀간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유튜브에서 탈북 당시 상황에 대해 "2017년 6월 (백마산에서 내려와) 38선을 넘어가자고 마음을 먹었고, 고압선과 가시철조망을 밑으로 기어 두 차례에 걸쳐 넘었다"며 "지뢰밭이 나왔을 때는 나뭇가지를 꺾어서 발걸음마다 찌르면서 나아갔다"고 설명했다. 이어 "낮이라 갈대밭에 숨어서 세 시간 정도를 기어 다녔다"며 "갈대밭 오물 속에서 스티로폼과 밧줄을 발견했고 구명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스티로폼으로 구명대를 만들어 준비해 놓고 밤이 되길 기다리는데, 눈으로 봤을 땐 한 시간 정도 소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한참 수영을 하다 보니 공장(으로 보이는) 큰 불빛이 보여 3시간 정도 헤엄을 쳤는데도 (남한) 군인들이 발견을 못 해서 죽겠구나 포기를 하고 있었다"고 소개했다. "그래도 한참 가다 보니 (무인도인) 유도(留島)가 보이더라. 거기를 지나니 군사분계선이 가깝다는 생각에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씨는 "한국 쪽에서 그 소리를 들었는지, 불빛을 비추고 차량이 오가는 게 보였다"며 "그걸 보고 어떻게든 나가보자고 생각해 결국 총 7시간을 버틴 끝에 땅에 올라서자 군사분계선 문을 열고 군인과 경찰 8명 정도가 나오더라"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김씨는 "그때 나가자마자 쓰러졌다"며 "런닝셔츠만 입고 벌벌 떨고 있으니 (한국 군인이) 이불을 덮어주고 차에 태우곤 어디론가 데려갔다"고 밝혔다. 김상진·김다영 기자 kine3@joongang.co.kr 2020.07.27 08:53
연예

[차길진의 갓모닝] 299.밀양의 독립운동가

얼마 전 나는 경남 밀양에 다녀왔다. 밀양은 조선 독립운동의 메카였다. 석정 윤세주 선생, 약산 김원봉 선생과 김 선생의 부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차정 여사, 지강 김성수 선생, 최수봉 선생 등 무려 67명의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가 나라 안팎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운동을 펼쳤다. 나는 어린 시절 지강 김성수 선생과의 특별한 기억이 있다. 지강 선생은 부친인 차일혁 경무관을 친아들처럼 사랑하셨다. 선생께선 종종 우리 집에 장기간 머물곤 하셨는데 그때마다 꼬마였던 내게 마치 친구처럼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셨다. “나는 의열단 활동을 할 때마다 맨 마지막까지 남는 망지기를 했어. 남들이 다 물러나야 그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 내가 잡힐 가능성이 제일 높았지만, 남들이 제일 싫어하는 그 일을 마다하지 않고 했어.”또 내가 밥 먹을 때 반찬투정을 할라치면 지강선생은 “나와 네 아버지는 식량이 없어 구더기가 버글거리는 음식도 반찬삼아 맛있게 먹었단다”하면서 뭐든 맛있게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느 날에는 고문을 당했던 상처라며 끔찍한 흔적들을 모두 보여주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천진하게 웃곤 하셨다. 평생을 아나키스트로 사셨던 지강 선생께서 제일 처음 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던 장소가 바로 밀양의 춘화교회다. 평양에서 내려오신 지강선생의 부모님께서 세운 춘화교회에서 조국의 독립을 향한 열망을 불태우셨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하며 중국 등지에서 열렬한 항일독립전쟁을 벌이셨던 지강 선생은 1933년 주중일본대사 암살계획 정보가 탄로나 18년 형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1945년 8월 15일에 석방되셨으며, 이후 제2공화국 시절엔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지만 집권당에 의해 취소되는 아픔을 겪으시고, 1966년에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밀양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김원봉 선생과 박차정 여사도 빼놓을 수 없다. 김원봉 선생은 항일무장투쟁의 핵심인물이었지만 월북한 관계로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하고 부인만 독립유공자가 되었다.해설을 하신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님은 “한국의 애국지사는 일본에 검거되어 재판기록이 남아야만 인정받는 아이러니가 있다. 만약 일본에 검거되지 않으면 재판기록도, 수감기록도 없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무명 애국열사들이 너무나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많은 독립운동 자료를 일본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공개될 시 자신들의 역사적 과오까지 고스란히 탄로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원봉 선생은 남과 북으로부터 소외되어 무덤조차 없는 상태다. 박차정 여사의 묘소도 현충원이 아닌 쓸쓸한 공원묘지에 잠들어 계신다. 또 두 분의 두 아드님도 지금까지 생사를 알 수 없다고 하니 더욱 안타까웠다. 나는 밀양의 여정을 아랑의 전설이 깃든 영남루에서 마쳤다. 밀양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영남루에 올라 밀양출신의 독립운동가 영령들의 한이 하루빨리 풀어지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했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2014.05.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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