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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배중현의 야구 톺아보기] 이주형의 고충과 에드거 마르티네스

"몸에 열이 나지 않는 것 같다."최근 지명타자 출전 비중이 부쩍 커진 이주형(23·키움 히어로즈)의 고충이다.주포지션이 중견수인 이주형은 현재 수비를 하지 않는다. 햄스트링(허벅지 뒤 근육) 부상 재발 우려 때문에 22일 기준으로 11경기 연속 지명타자로 뛰었다.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타격 성적이 향상할 것 같지만 결과는 반대. 중견수로 출전했을 때 타율이 0.400인데 지명타자로 나섰을 땐 0.273로 차이가 있다.이주형은 "(더그아웃에만 있으니) 잡생각이 많아지더라. 아웃을 당하면 못 친 장면만 계속 떠올리게 된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들쭉날쭉한 컨디션을 '열'에 비유했다. 지난해 KBO리그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받은 베테랑 손아섭(NC 다이노스)도 "(지명타자는) 경기 감각 유지가 가장 어렵다. 몸이 식기 때문에 경기 중 끊임없이 준비해야 한다"고 이주형과 비슷한 얘길 했다.지명타자의 가치는 해묵은 논쟁거리다. 고 하일성 야구 해설위원은 생전에 "프로라면 타격도 하고, 수비도 다 해야 한다"며 "지명타자의 기록을 함께 인정하면 안 된다. 골든글러브에 포함된 것은 물론이고 향후 리그에서 없어져야 하는 제도 중 하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 메이저리그(MLB) 분위기도 다르지 않다. 역대 최고의 지명타자로 불리는 에드거 마르티네스가 2019년, 10수 만에 명예의 전당(Hall of Fame·HOF)에 입성한 게 좋은 예다. 선수 시절 마르티네스는 파워(통산 홈런 309개)와 정확도(통산 타율 0.312)를 모두 갖춘 '무결점 타자'였다. 사이영상을 다섯 번이나 받은 랜디 존슨이 "내가 본 최고의 타자"라고 평가할 정도. 하지만 지명타자 출전 비율이 높아 그의 기록을 평가절하하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마르티네스가 명예의 전당에 도전할 마지막 10번째 투표를 앞두자, 한 기자가 "그가 지금까지 제외된 유일한 이유는 (당시 지명타자 제도가 없던) 내셔널리그 성향의 유권자들이 가진 반 지명타자 감정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전미야구기자협회(BBWAA) 첫 투표에서 36.2%의 지지를 받은 마르티네스는 최종 85.4%의 득표율로 입회 기준(75%)을 가까스로 넘겼다.최근 미세한 변화가 감지된다. MLB는 2022시즌부터 양대 리그에서 모두 지명타자 제도가 운용되고 있다. 오타니 쇼헤이(LA 다저스)와 마르셀 오수나(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지명타자로 엄청난 화력을 뽐내고 팬들은 이들 활약에 환호한다. 자연스럽게 지명타자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받는다. 1987년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자 유승안 한국리틀야구연맹 회장은 "(이주형처럼) 경험이 부족한 젊은 선수들은 지명타자로 밸런스를 맞추는 게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베테랑은 (체력 관리가 가능한) 지명타자의 장점을 활용하면 더 좋을 거 같다"고 말했다. 은퇴 전 지명타자와 대타로 적지 않게 뛴 이숭용 SSG 랜더스 감독은 "(지명타자는) 팀에 필요한 선수"라며 "지명타자로 뛴다는 건 타격을 가장 잘한다는 거 아닌가. 선수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 공격을 더 많이 하는 게 맞다"고 소신을 밝혔다. 배중현 기자 bjh1025@edaily.co.kr 2024.05.23 11:43
야구일반

“어린 선수·가족들 위로 최선” 리틀야구연맹, ‘부적격 선수 몰수패’ 사과

한국리틀야구연맹이 부적격 선수 논란으로 리틀야구 월드시리즈 본선 진출권을 박탈당한 사건과 관련해 공식 사과했다. 연맹은 1일 유승안 회장 명의의 입장문에서 “국내 예선전 우승팀인 남서울A에서 부상선수가 나와 교체 선수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세계리틀야구연맹 측은 그 선수를 부적격선수로 유권해석해 월드시리즈 진출이 좌절됐다”고 밝혔다. 이어 “연맹은 학교와 거주지 둘 중 하나만 충족시키면 그 지역 대표가 될 수 있다는 항목을 보고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세계연맹 측은 예선전에 뛰던 팀의 선수가 아니라고 판단, 원소속팀이 우선이라는 이유를 들어 아시아 예선전 대한민국 모든 경기를 몰수경기로 간주했다”고 설명했다.연맹은 “세계리틀야구연맹의 판단을 존중하나 깊은 유감의 말을 전했고 세계를 관리하는 단체인 만큼 지역의 특수성을 이해해 주는 좀 더 유연한 지침이 있었으면 희망한다고 연맹 측에 전달했다”며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사과의 말씀드린다. 월드시리즈 진출이 좌절된 어린 선수들과 가족들을 위로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고, 재발 방지를 위해 힘을 쏟을 것이라 약속드린다”고 덧붙였다. 앞서 한국 예선 우승으로 대한민국 12세 이하(U-12) 리틀야구 대표 자격을 얻은 남서울 A팀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예선까지 우승해 리틀야구 월드시리즈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리틀야구 월드시리즈는 각 나라별 대표팀을 따로 꾸리지 않고, 각국 예선을 통과한 클럽팀이 나라를 대표한다.그러나 대회 조직위원회는 남서울 A팀의 모든 경기를 부적격 선수로 인한 몰수패로 판정하고, 결승전에서 남서울 A팀에 패배한 대만의 구이-산 리틀야구팀에 월드시리즈 본선 진출권을 대신 줬다. 구이-산 리틀야구 팀은 결승전 몰수승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 예선 우승팀 자격으로 월드시리즈에 나선다.조직위에 따르면 한국 예선 과정에서 남서울 ‘B팀’ 소속으로 출전했던 선수 2명이 아시아-태평양 예선 A팀 소속으로 출전했다. 남서울 B팀 소속은 예선에서 탈락했으나, 소속팀의 탈락 후 A팀으로 옮겨 아시아-태평양 예선에 출전한 게 확인된 것이다.한국리틀야구연맹은 부상 선수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규정을 근거로 B팀에서 뛰던 선수 2명을 A팀에 등록시켰다고 주장했지만, 세계리틀야구연맹은 이를 부적격 선수로 보고 남서울 A팀의 월드시리즈 본선 진출권을 박탈시켰다. 어른들의 실수에 월드시리즈 본선 출전을 준비하던 아이들의 꿈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김명석 기자 2023.07.01 14:37
프로야구

[KBO리그 40년 The moment] 이종도 만루포로 시작해 김유동 만루포로 끝난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올해로 출범 40주년을 맞이했다. 1969년 창간한 일간스포츠는 1982년 프로야구 태동을 현장에서 지켜본 국내 유일의 스포츠 전문지다.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한해도 빠짐없이 프로야구의 성장과 변화 과정을 기록했다. 이 기간 여러 구단의 희비가 엇갈렸고 수많은 별이 뜨고 졌다. 일간스포츠는 프로야구 원년부터 지난 시즌까지 KBO리그 역사를 사진으로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① 프로야구 창립 총회 1981년 12월 11일 서울 중구 소공동 한 호텔에서 프로야구 출범을 알리는 창립총회가 열렸다. 1982년 1월 15일 대전·충청 연고로 OB 베어스가 가장 먼저 창단했고, 1월 26일 MBC 청룡이 서울 연고로 깃발을 올렸다. 1월 30일과 2월 3일에는 해태 타이거즈(광주·전라)와 삼성 라이온즈(대구·경북), 2월 5일과 12일에는 삼미 슈퍼스타즈(인천·경기·강원)와 롯데 자이언츠(부산·경남)가 차례로 창단, 6개 구단이 베일을 벗었다. ② 프로야구 전두환 전 대통령 시구 1982년 3월 27일 오후 2시 24분. 서울운동장(동대문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전 시구자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나섰다. 시포는 MBC 포수 유승안이 맡았다.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시구가 끝난 뒤 유승안이 공을 전달하기 위해 마운드로 향하자 경호원들이 깜짝 놀라 유승안을 몸으로 막아섰다. ③ 이만수 역사상 첫 홈런 리그 첫 홈런의 주인공은 삼성 이만수였다. 개막전 5회 MBC 유종겸을 상대로 짜릿한 손맛을 본 이만수는 앞서 1회에는 리그 첫 안타와 타점을 기록하는 등 말 그대로 '개막전의 사나이'였다. 그는 "안타도 좋았지만, 홈런을 친 뒤 베이스를 돌 때의 그 기분을 잊을 수 없다. 펄쩍펄쩍 뛰면서 지금은 돌아가신 서영무 감독님을 안고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④ 이종도 끝내기 만루 홈런 개막전의 진짜 주인공은 4안타를 때린 정구왕(삼성)도 4타점을 올린 유승안도 아니었다. 삼성은 초반 5-0으로 크게 앞서 손쉽게 승리를 따내는 듯했다. 그러나 7-4로 앞선 7회 말 유승안에게 동점 스리런 홈런을 맞고 승부가 연장으로 흘렀다. 7-7로 팽팽하게 맞선 연장 10회 말 이선희를 상대로 끝내기 만루 홈런을 때려낸 이종도가 마지막에 웃었다. 이날 그의 기록은 5타수 3안타(1홈런) 5타점이었다. ⑤오대석 사이클링 히트 6월 12일 오대석(삼성)은 프로야구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부산에서 열린 삼미전에서 1회 3루타, 3회 2루타, 5회 단타에 이어 6회 삼미 투수 한상연으로부터 투런 홈런을 기록했다. KBO리그 사상 첫 사이클링 히트(히트 포 더 사이클)였다. 역대 두 번째 사이클링 히트는 5년 뒤인 1987년 8월 이강돈(빙그레 이글스)이 해냈다. 지금까지 이 기록은 총 29번 달성됐다. ⑥ 부산 올스타전 개최 프로야구 원년 올스타전은 지역을 옮겨가며 세 차례 열렸다. 1차전이 열린 곳은 부산이었다. 구덕야구장이 조명 시설을 완비하면서 부산의 첫 야간경기로 7월 1일 프로야구 올스타전이 치러졌다. 2차전은 광주, 3차전은 서울에서 개최됐다. 초대 올스타전 최우수선수(MVP)는 김용희(롯데)였다. ⑦ 김유동의 한국시리즈 만루포 프로야구 원년 한국시리즈는 전기리그 우승팀 OB와 후기리그 우승팀 삼성의 맞대결이었다. 길었던 시리즈에 마침표가 찍힌 건 6차전 9회 초 2사 만루였다. 4-3으로 앞서던 OB는 김유동이 짜릿한 만루 홈런으로 우승 트로피를 가져갔다.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린 김유동은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⑧ '4할 타자' 백인천 프로야구 원년 최고의 타자는 MBC 백인천이었다. 71경기에 출전해 타율 0.412(250타수 103안타)를 기록했다. 1994년 이종범(당시 해태)이 104경기까지 4할 타율을 유지, 백인천의 기록에 근접했지만 타율 0.393로 시즌을 마쳤다. 이후 4할 타자는 나오지 않았다. ⑨ '불사조' 박철순 원년 마운드의 주인공은 ‘불사조’ 박철순이었다. 36경기에 등판해 무려 24승을 쓸어담았다. 완투 15회, 완봉 2회, 세이브까지 7개를 올리면서 OB 마운드를 이끌었다. 이후 연이은 부상 탓에 박철순은 이후로 한 번도 시즌 10승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불사조처럼 돌아와 1996년까지 투혼을 불살랐다. ⑩ 행크 애런 내한 미국 메이저리그(MLB)의 전설적인 홈런왕 애런은 1982년 8월에는 삼성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이어 10월에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산하 마이너리그팀을 이끌고 다시 한국을 찾았다. 애런은 선수들에게 타격 기술을 지도했고, 구단 관계자에게는 리그 운영 팁을 건네기도 했다. 배중현 기자 사진=한국프로야구 20년사·30년사, IS 포토 2022.09.08 09:00
예능

종영 '빽 투 더 그라운드', 나이 잊은 레전드들의 복귀 마침표

'빽 투 더 그라운드'가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지난 24일 종영된 MBN 예능 프로그램 '빽 투 더 그라운드'에는 탑클래스가 또 다른 프로야구 은퇴 선수 팀 드림 리턴즈와 맞붙었다. 탑클래스는 15대 7로 패하며 연승에는 실패했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안방극장에 감동을 전했다. 이날 경기 선발 라인업에는 1번 중견수 이대형, 2번 우익수 양준혁, 3번 유격수 윤석민(타자), 4번 1루수 김태균, 5번 3루수 최준석, 6번 좌익수 채태인, 7번 지명타자 홍성흔, 8번 2루수 박종호, 9번 포수 현재윤, 선발 투수 유원상이 이름을 올렸다. 곧이어 유원상의 아버지 유승안 감독, 동생 유민상이 속한 드림 리턴즈가 등장해 이목이 집중됐다. 드림 리턴즈에는 와이번스의 마지막 선발 투수 윤희상, 2018 시즌 홀드왕 오현택, 이글스 철벽 수비 한상훈, 집념의 외야수 양성우 등 KBO를 주름잡았던 반가운 얼굴들이 함께해 기대감을 높였다. 특히 이번 경기에는 지금까지 안타가 없던 54세 양준혁의 노장 투혼이 빛을 발했다. 슬럼프 때문에 아내와 특타까지 했던 양준혁은 1회 말 홈런으로 2점 선취점을 획득하며 더그아웃을 축제 분위기로 물들였다. 7회 말에는 한 번 더 홈런을 날리며 2점을 추가, 멀티 홈런으로 '양신'의 이름값을 입증했다. 지난 경기 창단 첫 홈런의 주인공 김태균 역시 두 경기 연속 홈런포를 터트려 탄성을 자아냈다. 6회 말 상대 투수 민경수의 빠른 공을 제대로 받아넘긴 홈런에 이어 8회 말 윤지웅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추가하며 4번 타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더불어 탑클래스 유원상과 드림 리턴즈 유민상 형제가 투타 맞대결을 펼쳐 흥미를 자극했다. 유원상이 투구한 공이 유민상의 몸쪽으로 향해 벤치클리어링이 발생할 뻔 하는가 하면 동생 유민상은 형을 상대로 통산 첫 안타를 기록하며 눈길을 끌었다. 더그아웃에서 형제를 바라보는 아버지 유승안의 멋쩍은 웃음이 재미를 더했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좋은 구위를 보여준 니퍼트, 부상에도 열정을 보여준 현재윤, 멀티 홈런으로 그라운드를 들썩이게 한 양준혁, 김태균 등 탑클래스 선수들은 끝까지 온힘을 다했지만 아쉽게 15대 7로 경기를 마쳤다. 드림 리턴즈와의 승부를 끝으로 잠시 안녕을 고한 '빽 투 더 그라운드'는 은퇴한 프로야구 레전드들의 그라운드 복귀를 진정성 있게 담았다. 탑클래스 선수들은 독립 야구단 성남 맥파이스와의 첫 연습 경기부터 드림 리턴즈와의 마지막 경기까지 매 경기 야구에 대한 진심을 드러내 보는 이들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야구를 다시 하는 만큼 뜻대로 되지 않는 플레이와 계속되는 실책으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전지훈련, 개인훈련에 매진하며 구슬땀을 흘리는 등 최선을 다한 선수들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나이를 잊은 레전드들은 조금씩 현역 시절의 감을 되찾고 노련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진한 감동을 안겼다. 황소영 기자 hwang.soyoung@joongang.co.kr 2022.05.25 08:33
야구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⑧] 'KBO리그의 집행검' 양의지

일간스포츠가 선정한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 포수 부문 주인공은 양의지(35·NC 다이노스)였다. 양의지는 20대부터 50대까지 세대별 야구인 10명씩 총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24표를 받아 레전드 안방마님 박경완(12표)과 이만수(3표)를 압도했다. 이번 투표에선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을 포함, 현역 선수 4명이 이름을 올렸는데 양의지가 그중 한 명이었다. 양의지에 대한 평가는 호평 일색이다. 장정석 KIA 타이거즈 단장은 "양의지는 결국 가장 좋은 기록을 남기고 역대 최고 포수로 남을 것 같다"고 내다봤다. 이호준 LG 트윈스 코치는 "야구 센스와 수비, 타격 모두 (NC 시절) 옆에서 지켜보니 깜짝 놀랄 정도다. 포지션 구분 없이 역대 최고 선수"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호준 코치는 NC 타격코치를 지내며 양의지를 가까이서 봤다. 포수 포지션은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했다. 후보군이 쟁쟁했다. 박경완이 때려낸 홈런만 포수 역대 최다인 314개. 2000년 5월에는 프로야구 사상 첫 4연타석 홈런을 기록했다. 2000년과 2004년에는 홈런왕, 2002년에는 포수 사상 첫 시즌 40홈런 고지까지 밟았다. '헐크' 이만수는 1983년부터 5년 연속 포수 골든글러브를 받은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타격왕 1회, 홈런왕 3회, 타점왕 4회 등 압도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하지만 표심은 양의지에게 쏠렸다. 김경기 스포티비 해설위원은 "이만수 선배의 기록도 뛰어났지만, 현재 양의지가 보여주는 능력치가 조금 앞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태원 삼성 라이온즈 코치도 "공 배합이나 경기 운영, 리더십을 보면 박경완일 수 있겠지만, 공격력으로 보면 양의지가 압도적"이라고 평가했다. 정경배 SSG 랜더스 코치는 "앞선 선수들보다 강력하다. 더 활약하면 각종 기록을 깰 수 있을 것 같다"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현역 선수인 만큼 앞으로 쌓아갈 기록도 기대된다는 의미였다. 양의지는 대기만성형이다. 광주진흥고를 졸업한 그는 200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8라운드 전체 59번으로 두산 베어스 유니폼을 입었다. 지명 순번은 정범모(2차 3라운드) 이해창(2차 4라운드)보다 더 뒤였다. 그해 2차 지명에서 호명된 포수가 총 10명이었고 양의지는 뒤에서 세 번째였다. 계약금이 3000만원에 불과할 정도로 큰 기대를 받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두산에는 용덕한·채상병 등 포수층이 두터워 그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많지 않았다. 결국 데뷔 첫 시즌이던 2007년 3경기, 1타석 출전에 그친 뒤 입대를 선택했다. 경찰 야구단에서의 2년은 야구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포수 출신 유승안 당시 감독의 지도아래 공수에서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많은 경기를 뛰며 경기를 읽는 눈이 업그레이드됐다. 양의지는 전역 후 첫 시즌이던 2010년 20홈런을 때려내며 신인왕에 올랐다. 조금씩 팀 내 입지를 넓히며 두산의 핵심 전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굵직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지난 시즌까지 포수 골든글러브를 통산 여섯 번(지명타자 1회)이나 받았다. 특히 2020년에는 총 유효투표수 342표 중 340표를 획득, 99.4%의 득표율로 2002년 마해영(당시 삼성)이 작성한 최고 득표율 99.3%(272표 중 270표)를 18년 만에 경신했다. 2015년과 2016년에는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2018년 12월에는 4년, 총액 125억원에 NC로 FA(자유계약선수) 이적했고 2019년 타율 0.354로 타격왕에 올랐다. '포수 타격왕'은 1984년 이만수 이후 35년 만이었다. 그리고 2020년 NC의 창단 첫 통합우승과 함께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로 가치를 증명했다. 그해 124타점을 기록, 2010년 조인성(당시 LG·107타점), 2015년 이재원(당시 SK 와이번스·100타점)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포수 100타점을 달성했다. 단순히 공격만 잘한 게 아니었다. 도루 저지율까지 42.9%로 1위였다. 그의 이름 앞에는 어느새 '우승 청부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지난해 4월에는 포수 사상 첫 사이클링 히트(히트 포 더 사이클)까지 작성하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국제대회도 단골 멤버이기도 하다. 2015년부터 열리는 국제대회에 빠짐없이 출전하고 있다. 2015년 WBSC 프리미어12와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선 우승과 금메달에 힘을 보태며 "역시 양의지"라는 소릴 들었다. 투수 리드와 블로킹을 비롯한 공격과 수비 모두 흠잡을 곳 없는 포수다. 그의 가치는 함께 경기를 뛰는 현역 선수들이 더 잘 안다. 2루수 박경수(KT 위즈)는 "양의지가 안방에 있으면, 투수가 아닌 포수와 싸운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고, 투수 소형준(KT)은 "내가 만약 감독이라면, 양의지 선배를 기용할 것 같다"고 했다. 투수 백정현(삼성)도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더 뛸 수 있다"고 촌평했다. 이밖에 꽤 많은 선수가 양의지에게 표를 던졌다. 김인식 전 국가대표 감독은 "양의지가 선수 생활을 가장 오래 할 것 같다. 앞으로 다치지 않으면 5년은 더 뛸 수 있을 것"이라며 각종 기록을 갈아치울 거라고 전망했다. 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ongang.co.kr 2022.01.20 07:30
야구

'최고 포수 논쟁' 이만수vs박경완에 끼어든 NC 양의지

양의지(34·NC 다이노스)는 현재 KBO리그 최고의 포수로 꼽힌다.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 상은 두 번이나 받았는데 정규시즌 MVP는 아직 거머쥐지 못했다. 올 시즌에는 정규시즌 유력 MVP 후보로 꼽힌다. 양의지는 7일 현재 타율 0.348(2위), 20홈런(1위), 71타점(1위), 장타율 0.664(1위) 등으로 주요 타격 지표 1위에 올랐다. 지난 4월 29일 삼성 라이온즈전에서는 사이클링 히트(한 경기에서 단타·2루타·3루타·홈런을 모두 치는 것)를 작성했다. 포수로는 역대 처음이었다. 양의지 타격 기록 중 눈에 띄는 것은 홈런이다. KBO리그 데뷔 후 이번 시즌을 포함해 9번이나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지만, 아직 홈런왕에 오르지는 못했다. 올해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양의지는 현재까지 72경기에서 20개의 홈런을 때렸다. 한 경기당 평균 0.27개를 치고 있다. 산술적으로 홈런 39개를 기록할 수 있다. KBO리그 사상 포수 홈런왕은 총 5번 배출됐다. 이만수가 3번(83~85), 박경완이 2번(2000·04) 홈런왕에 등극했다. 양의지가 이번 시즌 홈런왕에 등극한다면 17년 만의 포수 홈런왕이 될 수 있다. 양의지는 타점왕도 노려볼 만하다. 지난해에는 124타점으로 2위였다. 올해는 가장 먼저 70타점 고지에 오르면서 페이스가 좋다. KBO리그 사상 '포수 타점왕'은 이만수(1983·84·85·87)와 유승안(89) 둘뿐이다. 주요 타격 기록을 현재처럼 유지하면서 홈런과 타점 1위에 오른다면 정규시즌 MVP 등극 가능성이 커진다. 정규시즌 MVP를 수상한 포수는 83년 이만수(당시 삼성), 2000년 박경완(현대 유니콘스) 두 명밖에 없었다. 양의지가 MVP를 수상하면 역대 세 번째이자 21년 만에 포수 MVP가 탄생하게 된다. 변수는 체력 관리다. 양의지는 시즌 초반 사구로 인한 팔꿈치 통증으로 고생했다. NC를 이끄는 것 외에도 중책을 많이 맡았다. 오는 23일 개막하는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는데, 젊은 선수들로 구성된 대표팀에서 구심점 역할을 맡아야 한다. 또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회장을 맡아 그라운드 밖에서도 신경 쓸 일이 많다. 그는 "개인 기록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몸 관리를 잘하고 있다"고 했다. 야구팬들은 'KBO리그 사상 최고의 공격형 포수는 누구인가'를 두고 이만수와 박경완 지지로 나눠 설전을 자주 벌인다. 최근 몇 년 사이 양의지가 맹활약하면서 이 설전에 양의지 이름도 자주 거론되고 있다. 양의지는 2006년 프로에 입단한 후 뒤늦게 만개했다. 2014년 강민호(삼성)의 4년 연속 포수 골든글러브 수상을 저지하고 골든글러브상을 타면서 최고의 포수가 됐다. 그래서 이만수, 박경완이 이룬 업적을 따라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심재학 해설위원은 "객관적인 기록으로 양의지가 아직 두 전설을 뛰어넘지는 못하지만, 앞으로 쓸 기록이 많기 때문에 역대 최고의 포수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감독은 양의지가 자신을 뛰어넘길 기원했다. 이 전 감독은 "내가 선수였던 시절에는 포수 포지션이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에 양의지가 잘하면서 좋은 조건(2018년 4년 총액 125억원)으로 자유계약(FA)을 맺으면서 포수 위상이 올라갔다. 어린아이들도 이제 포수에 많이 지원하더라. 양의지 덕분이다. 이제는 나와 박경완보다는 양의지가 더 뛰어난 포수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 박소영 기자 park.soyoung0914@joongang.co.kr 2021.07.08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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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IS] "득점권 상황 즐긴다"…'별종' 양의지의 '포수 타점왕' 도전

포수는 '야구판 극한직업'이다. 무거운 장비를 착용하고 경기 내내 쪼그려 앉아 있어야 한다. 다른 포지션보다 체력 소모가 크고, 부상 위험도 높다. 그래서 공격에서의 기대치가 낮다. 수비만 잘해도 'A급 선수'로 인정받는다. 풀타임을 소화하기 어려워 개인 타이틀 경쟁에서 명함을 내밀기도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NC 양의지(34)는 '별종'에 가깝다. 올 시즌 양의지는 '포수 타점왕'에 도전 중이다. 팀이 치른 첫 52경기에서 47타점을 쌓았다. 경기당 0.90타점. 8일 기준 KT 강백호와 타점 부문 공동 선두다. 노시환(한화·46타점), 나성범(NC·44타점), 김재환(두산·44타점) 등과 타이틀 경쟁에 돌입했다. 4월(23경기·23타점)과 5월(22경기·21타점) 월간 성적에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꾸준하다. 기복이 없다는 건 그의 가장 큰 장점. 산술적으로 130타점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2020시즌 기록한 개인 한 시즌 최다 타점(124타점)을 가뿐하게 뛰어넘는 페이스다. 지난해 양의지는 2010년 조인성(당시 LG·107타점), 2015년 이재원(당시 SK·100타점)에 이어 역대 세 번째 '포수 100타점' 금자탑을 쌓았다. 하지만 멜 로하스 주니어(당시 KT·135타점)에 밀려 '포수 타점왕'을 눈앞에서 놓쳤다. KBO리그 역사상 '포수 타점왕'은 이만수(1983·84·85·87)와 유승안(1989) 둘뿐이다. 공격형 포수의 표본'으로 불리는 박경완(전 SK)은 물론이고 강민호(삼성)도 달지 못한 훈장이다. 1년 전 아쉬움을 뒤로하고 양의지가 먼지 쌓인 기록에 다시 한번 도전장을 내밀었다. 부상 등 돌발 변수만 없다면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타격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2019년 타율 0.354로 타격왕에 올랐다. '포수 타격왕'은 1984년 이만수(당시 삼성·0.340) 이후 35년 만이었다. 지난 시즌에는 포수로는 사상 첫 3할 타율-30홈런-100타점이라는 기념비적인 발자취까지 남겼다. 더 놀라운 건 찬스 집중력. 올 시즌 양의지는 주자가 없는 상황에선 타율 0.349. 주자가 있을 때도 0.353로 수치가 높다. 득점권에서는 배트가 더 매섭게 돌아간다. 득점권 타율 0.471으로 리그 평균(0.274)을 크게 상회한다. '포수 타점왕'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이유다. 이호준 NC 타격 코치는 "(올 시즌) 양의지 앞에 나오는 타자들이 득점권 상황을 많이 만들어주고 있다"며 "여러 가지 수치로 봐도 주자 유, 무에 상관없이 잘 치고 있다. 중심 타자는 득점권에서 주자를 불러들이지 못하면 부담을 느끼지만, 양의지는 다르다. 팀의 주장과 고참으로 '꼭 불러들이겠다'는 책임감도 있고, 득점권 상황을 즐긴다"고 평가했다. NC는'테이블 세터' 박민우와 이명기의 출루율이 4할 안팎이다. 타점 기회가 양의지를 비롯한 중심 타선에 자주 연결된다. 타점왕에 도전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다. 양의지는 담담하다. 그는 "이호준, 채종범 타격 코치님께서 타석에 들어서기 전에 공 배합에 대한 조언을 많이 해주신다. 그게 도움이 된다"며 "타점 타이틀에 큰 욕심은 없다. 경기마다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말했다. 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ongang.co.kr 2021.06.0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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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안 신임 한국리틀야구연맹 회장 "공부 많이 하겠다"

유승안(64) 전 경찰야구단 감독이 한국리틀야구연맹 회장에 당선됐다. 현장 지도자에서 야구 행정가로 변신한 그는 "많이 배우고 공부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한국리틀야구연맹은 지난 6일 "신임 회장 선거에 유승안 전 경찰야구단 감독이 단독 입후보했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임원 결격 사유를 최종 검토 후 당선인 공고를 했다"고 밝혔다. 유승안 신임 회장은 2006년부터 14년 동안 연맹을 이끈 한영관 전 회장에 이어 리틀야구 수장을 맡는다. 그의 임기는 2024년까지다. 유승안 회장 당선인(이하 회장)은 실업야구팀 한일은행에서 선수로 뛰다 프로야구 출범(1982년)을 앞두고 MBC 청룡에 입단했다. 삼성과의 원년 개막전에서 4번 타자·포수로 선발 출장했고, 홈런까지 때려내며 한국 야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후 해태와 빙그레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선수 은퇴 뒤에는 지도자 길을 걸었다. 한화에서 코치와 1군 감독을 역임했다. 2009년부터 2019년 7월까지는 경찰야구단 사령탑을 맡았다. 양의지(NC)·허경민·박건우(이상 두산)·장성우(KT) 등 현재 리그 정상급 선수들의 잠재력을 끌어냈다. 유승안 회장은 야구 현장을 잠시 떠났던 지난해 9월 "선수 육성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바란 대로 어린 선수가 올바른 인성과 야구관, 그리고 기본기를 갖추도록 지원하는 한국리틀야구연맹을 이끌게 됐다. 유승안 회장은 "두 아들(KT 유원상, KIA 유민상)을 선수로 키웠기 때문에 어린이 야구에도 항상 관심이 있었다. 나는 40년 가까이 (경기하며) 싸우기만 했다. 이제는 조금 더 즐겁고 행복한 야구를 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한국 야구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도 크다"고 말했다. 유승안 회장은 한영관 전 회장과도 자주 만나 한국 야구의 미래를 위한 얘기를 나눠왔다. 한국리틀야구연맹의 비전을 잘 이해하고 있다. 유승안 회장은 "한영관 전 회장님께서 항상 '사랑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라'고 조언하셨다. 야구팀이 워낙 많기 때문에 감독들의 생각을 헤아리도록 노력하라는 말씀도 들었다"며 "전임 회장께서 워낙 탄탄한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셨다. 나는 선수들이 즐겁게 야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야구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진입 장벽이 높은 스포츠로 여겨진다. '즐기는 야구', '행복한 야구'를 추구하는 신임 회장의 포부를 실현하기에 현실적인 장벽이 높다. 유승안 회장은 무턱대고 변화를 추진할 생각은 없다. 자신이 '초보 행정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리틀야구 현장의 문제점을 몸소 확인한 뒤 개선·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승안 회장은 "이 자리(회장)는 행정과 사업을 두루 해야 한다. 현재 기조를 갑자기 흔들 수 있겠는가. 솔직히 (현안을) 더 파악해야 한다. 여러 전문가의 의견을 구하고, 나부터 공부를 많이 하겠다. (야구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선수들을 위한 노력은 반드시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희수 기자 2021.01.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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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단기전 최강자 '미스터 롯데' 김용희…"KS 우승 때 믿을 건 최동원·응원뿐"

롯데 자이언츠의 홈 연고지 부산은 '구도(球都)'로 통한다. 그만큼 야구 열기가 뜨겁다. 프로 출범 전에는 지역 고교 경남고와 부산고의 인기가 어마어마했다. 1975년 6월 실업팀으로 창단한 롯데는 1982년 프로팀으로 전환해 원년 구단의 자부심을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를 배출했다. '사직 노래방'은 해외 언론에 소개될 정도로 뜨거운 분위기를 자랑한다. 1984년과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정규시즌 우승은 아직 한 번도 없지만 팬들의 열성적인 응원만큼은 '최고'로 손꼽힌다. 1982년 출범 첫 시즌 김용희(65)는 롯데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경남고 출신인 그는 실업팀 포항제철을 거쳐 롯데의 개막전 4번 타자를 맡아, 팀의 첫 승리를 확정 짓는 결승타의 주인공이다. 1981년 허리 부상 탓에 고질적인 통증에 시달렸지만, 단기전에 강했다. 올스타전 MVP에 두 차례 선정되는 등 '미스터 롯데'로 불리기도 했다. 김용희 경기 운영위원장이 '1982 롯데' 선수단을 대표해 당시 이야기를 꺼냈다. 故 최동원의 활약, 부산의 뜨거웠던 야구 열기부터 친구 박철순(OB 베어스)에 관한 추억까지 끄집어냈다. -부산 출신으로 롯데에 입단, 그것도 개막전에 4번 타자로 출전했다."당시 해태 타이거즈와 개막전이 구덕야구장에서 열렸다.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악한 시설이었지만, 열기는 정말 대단했다. 관중석이 꽉 들어찼다. 특별히 4번 타자에 의미를 두진 않았고, 팀 승리에만 열중했다." -14대2로 크게 이긴 해태와 개막전에서 1회 결승타를 쳤다."1회 무사 만루에서 중견수 앞 적시타를 쳤던 거로 기억한다. 당시 상대 투수가 누구였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현역 당시 별명이 '미스터 롯데'였다."팬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아마추어 당시 국가대표를 경험해 부산 팬들에게 익숙했고, 첫해 올스타전에서 미스터 올스타(1982년과 1984년 두 차례 수상)에 뽑혀 롯데의 상징이 되지 않았나 싶다." -두 차례 미스터 올스타 수상 때 상품은 어떻게 했나."1982년 대우 맵시 자동차를 받았다. 당시 자가용이 없어 내가 직접 탔다. 2년 후엔 맵시나였다. 2년 전에 받은 맵시를 지인에게 주고, 새로 얻은 승용차를 한동안 이용했다."(다만 KBO 자료에 의하면 1984년 MVP 부상은 대우 로열 XQ다.) -1984년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당시 삼성 전력과 한 마디로 비교하면 굉장히 열세였다. 삼성은 호화군단으로 타격과 마운드, 수비 모두 우리보다 우세했다. 우리가 믿을 건 최동원의 존재, 또 분위기였다. 그거로 싸웠다. 최동원이 전인미답의 한국시리즈 4승을 올렸다. 그 과정에서 다이나믹하고 드라마틱한 모습을 연출했다. 선수단 분위기를 한데 모으는 힘이었다. (삼성의 져주기 논란도 선수단 분위기에 영향을 끼쳤나?) 그렇다. 삼성이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롯데를 택한 것도 우리를 자극했다. 구덕에서 맞대결하는데 페어플레이에서 상당히 어긋나는 느낌을 받았었다." -당시 롯데의 인기는 어땠나."팀 성적이 좋을 때 엄청난 열기였다. 반면 1982~83년 각각 0.388(6개 팀 중 5위), 0.434(6위)의 승률에 그쳤을 땐 팬들의 비난도 많았다. 부산이 야구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프로야구 출범 전부터 라디오 주파수를 잘 조절하면 다른 지역에선 불가능했지만, 부산에선 일본 야구 중계 청취가 가능했다. 그 당시 연세가 높은 어르신들은 일본어에 능통했다. 일찍부터 야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어떻게 하면 승리하는지 알았다. 라디오를 틀면 항상 야구 중계가 이뤄졌다. 1984년에 우승 땐 난리 났다." -반면 팬들의 뜨거운 열기 탓에 고충도 있었을 텐데."경기에 지면 팬들이 버스를 막고 '왜 졌냐'고 따졌다. 야구장을 빠져나오는데 한 시간 넘게 걸리곤 했다. 소위 제6공화국 때 정치권에서 청문회가 한창이었는데, 야구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청문회' 풍경이 연출됐다. 버스를 흔들어 버스가 넘어질 듯한 상황도 있었다. 팀 성적이 안 좋을 때 경기 중에 욕을 하거나, 물건이 날아올 때도 있었다. 입장권을 사지 못한 일부 팬들이 외줄 타기 하듯이 40~50m 높이를 올라와 관중석에 들어오곤 했다. 연습 장비를 두는 좌측 외야를 무단으로 뚫고 경기장에 들어오신 분들도 계셨다. -당시에도 키가 아주 컸다. 야구 열기가 높은 부산에선 어딜 가든 눈에 띄었을 것 같다."실제로 그랬다. 고등학교 때부터 키가 컸다. 경남고 3학년 때 청룡기 대회에서 우승해 부산에서 카퍼레이드를 했다. 당시 부산 시내에 나가면 대부분 알아봤을 정도였다. (여성 팬도 많았나?) 야구장에 와서 관전하는 정도였다. 팬레터가 많을 때 100통씩 받곤 했다."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 일본전에서 역전 적시타를 기록하는 등 아마추어에서 화려함에 비해 프로에선 일찍 은퇴했다. (당시 대회 종료 후 포지션 별 최고 선수를 선정했다. 김용희 위원장은 일본 요미우리의 하라 다쓰노리 감독을 제치고 베스트 3루수로 뽑혔다.)"맞다. 아마추어 시절 활약에 비하면 다소 일찍 은퇴했다. 프로 출범을 앞둔 1981년, 실업야구 포항제철에 몸담았다. 당시 경기 도중에 베이스 러닝을 하다가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포항제철 감독님께서 '야구를 그만두고 사무직으로 옮기자'라고 권하셨다. 그 당시에는 의료진의 수술이나 구단의 재활 실력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열악했다. 수술대에 오르면 유니폼을 벗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수술을 기다렸다. 그런데 수술을 하기로 한 당일에 못 본 의사가 오더니 '너 김용희 맞네'라고 하시더라. 수술 전 회의 때는 '김용희'라는 이름만 봤을 뿐, 내가 야구 선수인지 몰랐던 거다. 그 의사 분이 '수술하면 야구 선수 생활이 끝난다. 그러니 수술하면 안 된다'라고 하더라. 그래서 수술이 취소됐다. 약 3개월 후에 퇴원했다." -그래서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됐나. "그렇다. 다만 늘 허리에 통증을 안고 뛰었다. 허리를 제대로 숙이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전 경기 출전이 어려웠고, 정규시즌 성적(8시즌 통산 535경기, 타율 0.270 61홈런 260타점)도 안 좋은 편이다. 반면 포스트시즌과 같은 단기전이나 올스타전에선 좋았다. 조금 아파도 일주일은 눈을 딱 감고 참으며 뛸 수 있어서다. 당시 3루수로 나섰는데 옛날 수비 사진을 보면 다소 이상할 것이다. 허리가 아파서 (무빙하지 않고) 무릎에 손을 대고 있었다. 투수가 공을 던질 때 손을 조금 뗐다. 그만큼 통증에 시달렸다. 요즘에는 구단별로 트레이너가 3~5명 있지만, 당시에는 그냥 다친 부위에 파스 뿌리면 끝이었다." -프로야구가 개막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어땠는지."선망의 대상이었다. TV를 통해 일본 무대에서 활약한 장훈, 백인천 등 당대 최고의 선수 플레이를 보며 자랐다. 일본은 잔디 그라운드에, 관중석도 꽉 들어찬 모습이 부러웠다. 우리도 일본처럼 프로야구가 출범한다고 듣고선 굉장히 반겼다." -프로 무대를 경험한 뿌듯함과 아쉬움이 교차할 것 같다."정말 뛰어난 능력을 지닌 선배들도 밟지 못한 프로야구를 경험해 정말 행복했다. 프로야구 초창기여서 몸 관리를 비롯해 다양한 노하우를 전수받았다면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도 든다. 선수 때 너무 많이 아팠다." -프로야구 원년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를 꼽자면."단연 박철순(OB베어스)이다. 투구가 워낙 뛰어났다. 당시 22연승 대기록을 작성하지 않았나. 요즘은 투수 대부분이 체인지업을 던지지만, 그때는 박철순이 던진 체인지업의 구종 자체를 모를 시기였다. 박철순은 내 초등학교 친구다. 동광초에서 같이 야구를 했다. 경남중에 함께 진학했는데 키가 작았던 철순이가 1년을 쉬었다. 이후 서울(배명고)로 전학 갔다. 프로에서 만난 박철순은 정말 상대하기 어려운 투수였다. 기록을 자세히 모르지만, 상대 전적이 별로 안 좋았던 것 같다. (박)철순이의 체인지업을 보고선 다음 타자에게 상대한 느낌과 구종을 일러줄 때 '공이 오다가, 안 온다'라고 표현했다. 공이 직구처럼 날아오다가 홈 플레이트 근처에서 갑자기 아래로 휘어지며 속도가 뚝 떨어졌다. 1983년 롯데 자이언츠로 야구 선교사가 와 기술을 전수한 적 있다. 당시 투수들에게 써클 체인지업을 알려줬는데 우리 선수들이 '어떻게 공을 저렇게 던지노'라고 그냥 넘겼을 정도로 무지했다. 그때 투수 구종은 직구, 슬라이더, 커브 정도였으니 (박)철순이의 공을 치기 아주 까다로웠다." -프로야구 원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첫 시즌 80경기 체제로 운영했다. 대개 팀당 일주일에 4경기 했다. 연고 구단이 없는 춘천을 비롯해 지방에서도 경기했다. 선수들 의식이 아마추어리즘이었다. 왜냐면 프로야구가 처음이었으니까." -현역 은퇴 후 1992년 롯데 우승 당시 코치를 역임했다. 이듬해 바로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다."시즌 전에 구단에 이런 의사를 미리 전했다. 미국에서 야구에 관한 기초를 배우고 싶었다. 구단은 우승 후에 만류했지만, '이때 아니면 갈 수 없겠다"라고 생각해 무조건 갔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씩 총 4번 정도 미국 연수를 다녀왔다." -롯데, 삼성, SK에서 감독을 지냈다. 그라운드의 신사로 통하며 인자한 모습이었다."안 좋은 거다. 감독은 어떻게든 성적을 올려야 하는 위치다. 감독으로서 코치들을 이끌며 선수들이 최선의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 (정규시즌 기준 통산 성적은 452승 501패 23무, 승률 0.474다.) - 최근 프로야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선수가 있다면."이정후(키움) 강백호(KT)다. 이정후는 故 장효조와는 또 다르게 정말 정교한 타격을 한다. 강백호는 지금껏 KBO리그 타자 가운데 스윙이 가장 빠른 듯하다. 아직 완전체는 아니지만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지녔다. 하드웨어와 근성이 뛰어나 아주 좋은 선수가 될 것이다." -경기 운영위원으로 매일 프로야구 현장을 누빈다."정말 바쁘다. 경기 진행 여부와 경기장 상태, 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관련해 선수단 입장 등을 체크한다. 바쁜 것보다 관중이 입장하지 못해 마음이 더 아프다. 얼른 코로나19가 사라져 팬들이 경기장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선수단도 관중의 소중함을 많이 느낄 것이다. 모든 것이 정상화되면 선수단이 성숙하게 바뀌어 있을 것으로 여긴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가 이토록 발전한 건 선수와 구단의 노력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가 팬들의 성원 덕분이다. 앞으로 더 많은 응원과 관심을 보내주시면, 선수들은 좋은 경기와 팬서비스로 보답할 것이라 믿는다." 이형석 기자 lee.hyeongaeok@joongang.co.kr 관련기사 [창간특집] OB 베어스 윤동균 서른넷 '노장' 원년 KS 진출…'막강 삼성' 박살냈지 [창간특집] 원년 첫 안타, 첫 홈런 '개막전 사나이' 삼성 이만수…"최동원 때문에 타율 많이 까먹어" [창간특집] 원년 개막전 '신 스틸러' MBC 청룡 유승안…"이종도 끝내기 만루포는 내가 실수한 덕" [창간특집] 최다 우승팀의 '투타 겸업' 에이스 해태 김성한…"백인천은 제압하기 힘든 상대" 2020.09.25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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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원년 개막전 '신 스틸러' MBC 청룡 유승안…"이종도 끝내기 만루포는 내가 실수한 덕"

"제가 없었다면 스토리 진행이 안 되잖아요." 39년 전 봄을 돌아본 유승안(63) 전 경찰야구단 감독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혈기 왕성한 20대 중반. 전 국민의 시선을 모은 프로야구 출범 무대에서 대통령의 시구를 받은 그는 삼엄함 뚫고 공을 건네는 '관례'를 지켰다. 경기에서도 거침없었다. 4번 타자로 나섰고, 소속팀 MBC 청룡이 3점 뒤진 경기 후반 동점 홈런을 때려냈다. 프로 야구 출범 3호 홈런이자 1호 동점포였다. 그러나 그는 경기 뒤 그는 내쉬었다고 한다. 유 감독은 "충신이었다가 역적이 됐다"고 했다. 연장 10회 말 1사 2·3루 유리한 볼카운트(3볼)에서 투수 앞 땅볼로 물러났다. 3루 주자는 홈에서 아웃된 것. 그 유명한 원년 개막전 끝내기 만루포는 이 땅볼 아웃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당사자가 웃으며 그 시절을 돌아봤다. 극적인 드라마의 복선이나 다름없었다. 유 감독은 '욕심' 많은 선수 역할로 개막전을 빛낸 조연이었다. MBC 청룡 선발 포수로 나선 유 감독에게 역사적인 첫 경기와 1982년 그와 MBC 청룡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프로 무대가 정립되지 않은 그 시절을 '혼란기'로 규정했다. - 프로야구 출범 소식을 들었을 때 심경을 기억하나. "당시 나는 실업 야구팀 한일은행 소속이었다. 26살로 기억한다. 20대 후반이면 은퇴 수순을 밟던 때다. 프로 무대 출범에 설렘이 컸고 '딱 5년만 뛰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는 평생 야구판에서 있게 될 줄 몰랐다." - 프로 무대 도전을 포기한 않은 실업 선수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은퇴하면 은행 업무를 해야 했다. 적성에 맞았겠는가. 장효조, 김용달, 유두열 등 내 또래들은 그저 프로가 생겨서 좋아했다. 그러나 망설임이 있던 선배들도 많았던 것으로 안다. - 장효조, 유두열은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 멤버다. (당시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대회 전념 차원에서 프로 입단이 유예됐다) "김재박 선배, 김시진, 임호균 그리고 최동원 등 당시 대표팀 선수들은 1983년부터 프로 무대에 합류했다. 그래서 윤동균, 김우열 선배처럼 실업 야구 스타 플레이어의 원년 합류는 희소식이었다. 일본 프로 리그에서 활약하던 백인천 감독이 우리 팀(MBC 청룡)에 와서 감독 겸 선수로 뛴 것도 많은 관심을 유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원년 무대 MBC 청룡의 전력은. "OB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다. 롯데도 괜찮았다. 삼성이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에도 스타 플레이어던 배대웅, 천보성, 김한근 선배가 있었다. 삼성이 원년 개막전을 장식하는 게 당연해 보였다." - 역사적인 개막전에서 4번 타자 겸 포수로 선발 출장했다. "개막 전 캠프, 훈련에서 컨디션이 좋았다. 장타력도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오래 지키지는 못했다. 부상도 있었고, 백인천 감독과 갈등도 있었다. 그래도 시즌 초반 4번 출전은 주효한 게 아닐까. - 개막전이자 출범식이었다. 당시 대통령의 시구를 받았는데. "경호가 철저했던 기억이 난다. 관중 입장 전에 관중석에 미리 자리한 사람들이 있었다. 경호원이었을 것이다. 심판 복장,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배치된 경호원도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출범 기념구를 전달하기 위해 마운드에 올라가다가 제지당하기도 했다." - 어떻게 됐나. "결국 건넸다. 막는 사람들에게 '이건 야구에서 관례다'고 설명했다. 젊은 시절이었다." - 당시 정순명, 하기룡 투수가 더 좋은 투수로 평가됐다. 이길환 투수가 MBC 청룡 선발 투수로 나선 배경이 있나. "백인천 감독이 일본 리그 출신 아닌가. 언더 핸드 투수가 성적을 내는 데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수준급 잠수함 투수의 공은 당시 생소했고, 공략이 어려웠다. 이길환의 공도 좋았다." - 유종겸 투수와 배터리 호흡을 맞춘 5회 초, 선두 타자 이만수에게 출범 최초 홈런을 허용했다. "이만수가 펄쩍거리며 뛰어서 그라운드를 돌던 기억이 있다. 야구도 잘했지만, 그때부터 흥이 많던 친구다. 최초 홈런을 맞았던 상황에 볼 배합까지는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이만수의 성향은 또렷이 기억난다." - 어땠는가. "당시에는 포수와 타자, 심판이 대화도 많이 하던 시절이다. 일종의 견제였다. 그런데 이만수는 타석은 매우 과묵한 편이었다. 자신도 포수였고, 다른 팀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면 시끄럽게 굴었으면서 말이다. 내가 계속 말을 걸면 '조용히 하세요'라며 쏘아붙이고 타석에 집중했다. 그 친구가 타격 쪽에서 일가견이 있고 성적도 좋았던 이유는 타석에서의 진지함이 아닐까." - 유 감독도 응수했다. MBC 청룡이 4-7로 뒤진 7회 말 동점 3점 홈런을 쳤다. "삼성 투수는 좌완 황규봉 선배였다. 나는 우투수보다 좌투수 공을 더 잘 쳤다. 묵직한 공이 들어왔지만 조금 높았다. 운이 좋았다. 그래도 오른쪽 담장을 넘긴 것은 자부심이 있다. 당시에는 밀어서 담장을 넘기는 장면이 많지 않았다. 손목 힘은 인정받았다. 4번 타자니까 일발 장타를 기대받았고, 욕심을 내봤다." - 이 홈런은 이만수, 백인천에 이어 역대 3호였다. 최초 홈런 욕심은 없었나. "그때는 기록의 중요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프로 야구가 출범했지만, 실업 야구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다. 실업 야구 때도 많은 관중 앞에서 항상 축제처럼 경기를 치렀다. 평균 기록, 누적 기록이 갖는 의미는 나중에야 알았다." - 이 경기는 역사에 남았다. 유 감독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드라마다. "이종도 선배가 영웅이 된 건 내 도움이다. 나는 역적이 전락했고. (웃음)" - 유 감독은 10회 말 1사 2·3루 볼카운트 3볼에서 투수 앞 땅볼을 쳤더라. "이선희 선배가 나를 (볼넷으로) 거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4구째 공이 포수 머리 높이로 오더라. 내 몸은 자동으로 움직였다. 투수 키를 넘길 수 있었는데 글러브에 잡혔다. 3루 주자가 홈에서 아웃됐다. 백인천 감독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더라." - 덕분에 이종도에게 타석이 이어졌다. "삼성은 그 경기에서 홈런까지 친 백인천 감독을 당연히 고의4구로 걸렀다. 만약 내가 볼넷으로 출루했다면 이종도 선배까지 타석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백 감독이 해결했겠지. 이런 상황에서 기가 막힌 홈런이 나왔다. 내가 없었으면 스토리 연결이 안 되는 경기였다. 나는 경기 뒤에 한숨만 나왔다." - 원년 기억을 조금 더 떠올려보자.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를 꼽는다면. "OB 투수 박철순의 공이 정말 좋았다. 원년에 22연승을 거둔 투수 아닌가. 미국 유학파였고 그가 던지던 너클볼은 정말 치기 어려웠다. 빠른 공 체감 구속은 시속 145㎞ 정도. 이후 최동원, 선동열이 프로 무대에 진입했다. 원년 최고 투수는 박철순이었다." - 배터리 호흡을 맞춘 투수(MBC 청룡 소속) 중에 꼽는다면. "원년 개막전 승리 투수가 된 좌완 유종겸이다. 동기고 호흡이 잘 맞았다. 원년 얘기는 아니지만, 유종겸이 장효조에게 매우 강했던 기억이 난다. 장효조가 누구인가. 한국 야구 통산 타율 1위(0.331) 아닌가. 좌투수와 좌타자 대결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유독 강했다." - 원년 일상도 궁금하다. 이동과 숙박은 어땠나. "굳이 비교한다면 지금은 KTX, 당시는 시외버스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길도 안 좋은 시대였다. 이동은 피로했다. 버스는 기억에 남는다. 이동하면서 회의나 담화를 나누라고 맨 뒷자리에 원형 테이블을 설치해줬다. 항상 좋은 숙소를 쓴 것은 아니다. 품위 유지에 신경을 쓴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여관에서 잘 때도 있었다. - 룸메이트는 누구였나. "정확히는 기억은 안 난다. 지금은 선배와 후배가 한방을 쓰지 않나. 원년에는 그냥 마음에 맞는 동료끼리 합의한 뒤 매니저한테 얘기했다." - MBC의 1982년을 돌아본다면. "솔직히 팀 워크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모래알 같았다. 좋은 선수는 있었지만, 개성이 강해서 따로 노는 편이었다. 융화되지 못하기도 했다. 6팀 중 3위였는데, 좋은 성적이라고 볼 순 없었다." - 유승안의 1982년은. "팀과 비슷했다. 정신없었다. 프로라는 환경 변화에 완벽한 적응 못 했다. 혼란기였다. 갑자기 좋은 대우를 받고, 관심을 받는 것을 잘 흡수하지 못했다." - 39년이 지난 현재, 포수 유승안은 경찰야구단 감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경찰야구단은 지난해 7월, 창단 14년 만에 해단했다) "아들들(KT 유원상, KIA 유민상)까지 야구를 시킨 사람이다. 한국 야구에 애정이 깊고, 걸어온 길에 자부심이 있다. 그가 중에서도 경찰야구단을 맡은 건 내 인생에 가장 잘한 일이다. 한국 야구 토양을 다지는 데 조금은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 향후 계획도 궁금하다. "여전히 야구 저변은 넓어져야 한다. 프로팀, KBO의 육성 정책 활성화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싶다. 프로 선수를 현역으로 경험했고, 지도자도 했다. 한국 야구 전반에 대해 진단을 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목소리를 내고 싶다." - 현재 KBO리그에서 유 감독의 눈길을 끄는 선수는 있나. "아들들은 요즘 빌빌댄다. 아무래도 경찰야구단 출신 선수들의 행보에 관심이 많이 간다. 실력이 늘어서 소속팀으로 돌아간 양의지, 허경민 등이 지금도 활약하고 있다. KT 이대은과 롯데 안치홍이 갑자기 슬럼프가 와서 안타깝다. 두산 박건우는 지금도 잘하지만,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우타자로 성장할 수 있는 선수라고 생각한다." 안희수 기자 An.heesoo@joongang.co.kr 관련기사 OB 베어스 윤동균 서른넷 '노장' 원년 KS 진출…'막강 삼성' 박살냈지 원년 첫 안타, 첫 홈런 '개막전 사나이' 삼성 이만수…"최동원 때문에 타율 많이 까먹어" 2020.09.23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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