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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수출의 자랑' WBC 美 대표팀 이어 NL 다승 1위로 우뚝

메릴 켈리(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백스)가 또 하나의 KBO리그 역수출의 신화를 썼다. 켈리는 29일(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체이스필드에서 열린 2023 미국 메이저리그(MLB) 보스턴 레드삭스와 홈 경기에 선발 등판해 6과 3분의 1이닝 4피안타 2볼넷 1실점 10탈삼진으로 팀의 4-2 승리를 이끌었다. 켈리는 시즌 6승(3패)째를 달성하며 내셔널리그(NL) 다승 공동 1위로 올라섰다.켈리는 4-0으로 앞선 7회 1, 2루 위기에서 마운드를 내려온 뒤 후속 투수가 승계 주자 득점을 허용해 1자책점을 기록했다. 켈리는 KBO리그가 자랑하는 역수출 신화의 주인공이다.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는 2014년 말 켈리를 영입했다. 계약금(10만 달러)과 연봉(20만 달러)를 합해 총 35만 달러(약 4억 6000만원)의 조건이었다. 상대적으로 몸값이 저렴했던 이유는 빅리그를 밟아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켈리는 당시 마이너리그에서 통산 125경기(76경기 선발)에 등판해 39승 26패 평균자책점 3.40을 올렸을 뿐 빅리그 등판이 전무했다. 켈리는 2015년부터 2018년까지 SK 소속으로 119경기에서 48승 32패 평균자책점 3.86을 기록했다. 2018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미국 애리조나 구단과 2+2년 최대 1450만 달러(192억원)에 계약하며 미국 무대로 진출했다. 2019년 13승 14패 평균자책점 4.42를 올린 그는 지난해 13승 8패 평균자책점 3.37로 커리어 하이 시즌을 찍었다. 개인 첫 한 시즌 200이닝 투구도 돌파했다.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미국 대표팀에 선발됐다. WBC 일본과의 결승전 선발 투수로 등판하기도 했다. 2022년 4월 초에는 애리조나 구단과 2년, 총액 1800만 달러(약 239억원)의 연장 계약을 체결했다. 빅리그에서 뛰는 내내 몸값 이상의 활약을 선보이고 있다. 올 시즌엔 내셔널리그 평균책점은 5위(2.83)까지 올라있다. 피안타율(0.192)은 2위, 최다 탈삼진(69개)은 10위다. 포심 패스트볼 평균 시속은 150km에 그치나, 뛰어난 변화구 구사 능력과 제구력을 앞세워 승승장구하고 있다. 적장인 보스턴의 알렉스 코라 감독도 "오늘 켈리의 제구는 완벽했다"며 "마치 매덕스처럼 스트라이크존을 이용하더라"라고 극찬했다.이형석 기자 ops5@edaily.co.kr 2023.05.29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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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보우 리포트] 2022년 나타난 '낭만 에이스' 샌디 알칸타라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샌디 알칸타라(27·마이애미 말린스)는 태생적 '이닝 이터'에 가까운 선수다. 그는 지난 2013년 국제 아마추어 자유계약 자격으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계약, 미국에 발을 디뎠다. 2017시즌 종료 후, 마이애미의 거포 마르셀 오즈나(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트레이드로 영입한 세인트루이스는 마이너리그 유망주였던 알칸타라 등을 대가로 지불했다. 그렇게 알칸타라와 마이애미의 인연이 시작됐다. 마이애미에서 성장한 알칸타라는 메이저리그(MLB) 선발 투수로 꽃을 피웠다. 이적 후 마이너리그에서 꾸준하게 선발 수업을 받았던 알칸타라는 드디어 2019년 풀타임 빅리거가 됐다. 첫 시즌부터 이닝 소화력이 남달랐다. 2019년 32경기에 선발 등판한 그는 평균자책점 3.88을 기록했다. 에이스라 부르기엔 조금 부족했지만, 무려 197과 3분의 1이닝을 던졌고 첫 올스타로도 선정됐다. 2020년 단축 시즌을 거쳐 지난해 두 번째 풀타임 시즌을 맞이한 그는 205와 3분의 2이닝을 소화해냈다. 평균자책점(3.19)도 향상됐다. 올 시즌 그는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경쟁의 선두 주자다. 27일(한국시간) 기준 20경기 동안 알칸타라는 144와 3분의 1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1.81(MLB 2위, 내셔널리그 1위)을 기록 중이다. 주목할 건 역시 이닝이다. 알칸타라가 던진 144와 3분의 1이닝은 MLB 전체 1위 기록이다. 2위 애런 놀라(필라델피아 필리스·126과 3분의 2이닝)와 17과 3분의 2이닝을 더 던졌다. 경기당 투구 이닝이 7과 3분의 2이닝에 달한다. 시즌 230이닝을 향해 질주 중이다. 그의 페이스는 현대 야구의 추세와 정반대에 있다. 알칸타라의 질주는 바로 지난해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수상자 코빈 번스(밀워키 브루어스)의 사례와도 정확히 반대 지점에 있다. 번스는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확진 등으로 인해 규정 이닝(162이닝)을 간신히 넘긴 167이닝만 소화했다. 대신 탈삼진이 많고, 볼넷은 적었다. 뛰어난 세이버 메트릭스 지표 덕분에 그는 투표인단의 지지를 받았다. 번스는 그해 투표에서 200이닝·200탈삼진을 기록했던 잭 휠러(필라델피아)를 제쳤다. 최근 몇 년 간 불펜 야구의 대두로 현대 야구에서는 과거 랜디 존슨, 그렉 매덕스로 대표되던 완투형 에이스가 주는 '낭만'이 사라지고 있었다. 알칸타라의 이닝 이팅이 그래서 반갑다. 알칸타라의 이닝 소화 비결은 뭘까? 바로 땅볼 유도다. 알칸타라의 삼진 비율(24.3%)은 높지 않다. ‘닥터 K’의 상징인 빠른 공을 가졌지만, 삼진보다 땅볼을 더 많이 유도해 효과적으로 아웃 카운트를 잡는 타입이다. 올 시즌 그의 땅볼 타구 비율은 56.5%(팬그래프 기준)에 달했다. 또 발사 각도와 타구 속도 및 볼넷과 삼진을 바탕으로 한 xwOBA(기대 가중 출루율) 등 여러 기대 스탯에서 리그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타자들이 어퍼 스윙으로 장타를 노리는 시대에서 그는 땅볼과 약한 타구를 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땅볼 전문가' 알칸타라를 설명하려면 구종 이야기도 빠질 수 없었다. 알칸타라의 구종은 비율과 임무를 정확하게 나눠 타자들을 잡아낸다. 알칸타라의 직구(포심 패스트볼) 평균 스피드는 시속 97.9마일에 달한다. 빠른 직구를 가지고 있지만, 직구만 던지지는 않는다. MLB 공식 통계 사이트 베이스볼 서번트 기준으로 올 시즌 그의 직구, 슬라이더, 싱커(싱킹 패스트볼), 체인지업의 구사 비율이 각각 25%에 가까웠다. 타자들은 한 가지 구종만 노려서는 알칸타라를 공략하기는 힘들다. 심지어 싱커는 직구 스피드와 거의 같은 평균 97.6마일을 기록, 타자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알칸타라의 싱커와 체인지업은 역할이 달랐다. 우투수인 그는 싱커를 좌타자 상대로 13.8%, 우타자에게 39.7% 비율로 던졌다. 좌타자에게는 체인지업(35.7%)을 더 많이 던졌다. 타자별로 다른 구종을 던지며 유도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올 시즌 알칸타라는 좌·우타자 상대 땅볼 비율은 55%, 58.7%로 고르게 높다. 최근 수년 간 강속구와 삼진, 적은 이닝을 던지는 유형의 에이스가 지배하던 MLB에서 '완투형 땅볼 에이스' 알칸타라는 독특하다.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것은 실점을 억제하며 최고의 시즌을 이어가고 있다. 투수의 역할이 분업화하는 시대에서 알칸타라는 존재만으로도 '살아있는 낭만'에 가깝다. 경기가 아직 많이 남았지만, 지금의 활약만으로도 그에게 찬사를 보내는 이유다. 순재범 야구공작소 칼럼니스트(경상국립대학교 정보통계학과) 2022.07.28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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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영어] 매덕스는 무엇으로 '약물 타자'를 이겼나

메이저리그(MLB)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서 전성기를 보낸 그렉 매덕스(Greg Maddux)는 특별한 선수였다. 4년 연속(1992~95)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에 빛나는 그는 빅리그에서 5008⅓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3.16을 기록했다. 매덕스가 거둔 355승 중에서 완투승이 109번이었다. 그중 완봉승이 무려 35번. 이외에도 17년 연속 15승 이상과 14년 연속 200이닝 이상을 던지는 등 그가 달성한 기록은 눈이 부실 정도다. 매덕스의 이런 기록이 더욱 더 대단한 이유는 MLB에 스테로이드 약물을 복용한 강타자들이 득실거리던 시대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의 성공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은 흔히 스트라이크 존을 6개 구역으로 나눠서 던질 수 있었던 매덕스의 제구력 덕분이라고 말한다. 매덕스는 “I could probably throw harder if I wanted, but why(원하면 더 세게 던질 수 있지만, 왜 그래야 하죠)? When they're in a jam, a lot of pitchers…, try to throw harder(많은 투수가 위기에 몰렸을 때 더 세게 던지려고 합니다). Me, I try to locate better(저는 제구에 더 신경을 쓰죠).” Jam이란 단어는 야구에서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투수는 종종 타자 몸쪽에 바짝 붙는 공을 던진다. 이런 경우 타자는 배트에 공을 정확히 맞히는 스윙을 하기 어려운데, 이를 “The pitcher jammed the batter(hitter)”라고 표현한다. 주자가 스코어링 포지션에 나가 있는 상황에서 강타자가 나올 경우, 한마디로 투수가 위기에 몰렸을 경우에는 "The pitcher is in a jam."라고 말한다. 또는 모든 베이스에 주자가 있을 때도 “The bases are jammed(loaded, full)”라고 표현한다. 매덕스가 던지는 공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I try to do two things: locate my fastball and change speeds. That's it(저는 두 가지를 하려고 노력하죠. 직구를 제구하려 하고, 구속에 변화를 줍니다. 그게 다예요). I try to keep as simple as possible(가능한 한 단순하게 하려고 합니다).” ‘as simple as possible’은 ‘최대한 간단하게’라는 뜻이다. ‘as ~ as possible’은 ‘가능한 한 ~ 하게’로 널리 쓰이는 표현이다. 대표적인 예가 ‘as soon as possible(가능한 한 빨리)’인데, 흔히 이를 asap 혹은 ASAP로 줄여 쓴다. 발음하려면 asap를 단어처럼 읽어서 ‘에이셉’이라고 하거나, 알파벳 스펠링을 하나하나 그대로 읽어서 ‘에이 에스 에이 피’라고도 한다. 제구력 외에도 매덕스는 공의 스피드에 변화를 줘 타자를 상대했다. 즉 오프스피드 피치(off-speed pitch, 직구보다 느린 공을 의미)를 사용했다는 말이다. 오프스피드 피치는 크게 브레이킹 볼(breaking balls, 커브, 슬라이더 등)과 체인지업(changeups)으로 나누어진다. 매덕스는 부상 위험이 높은 브레이킹 볼은 거의 안 던졌다. 그는 대신 엄청난 무브먼트를 가진 변형된 직구인 투심 패스트볼과 체인지업을 원하는 곳에 던져 최고 투수의 자리에 올랐다. 이정우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1.04.17 13:33
야구

[선동열 야구학 에필로그] '야구 소년'과의 1년 여정을 마치며

시작은 2019년 7월 11일이었다. 선동열 전 야구 국가대표 감독이 목동야구장에서 기자회견을 연 날이었다. 2018년 11월 국정감사 이후 8개월 만에 공식 석상에 나타난 그는 "내년 뉴욕 양키스의 스프링캠프에 참가해 메이저리그(MLB)를 배울 생각"이라고 밝혔다. 당시 선동열 전 감독은 소년처럼 들떠 있었다. 선수로 밟지 못했던 MLB를 지도자가 되어 경험할 수 있다는 기대, 자신의 야구인생을 정리한 책 『야구는 선동열』(민음인) 발간을 앞둔 설렘으로 가득했다. 그는 "책을 쓰느라 예전 자료를 찾아봤는데, 남아 있는 게 거의 없더라"며 아쉬워했다. 기자는 "MLB 연수 땐 모든 자료를 보관하시라. 공부하는 과정이 한국 야구의 소중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동열 전 감독이 MLB를 공부하려는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크게 보면 한국·일본 야구를 경험한 그의 식견을 더 높이고 싶어서였다. 미국인은 아시아인과 체격·체질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졌던 거리감을 좁혀보기 위해서였다. 2015년 스탯캐스트의 등장으로 '눈과 직관으로 판단하는 야구'가 '데이터로 읽고 검증하는 야구'로 바뀐 걸 확인하고자 했다. 선동열 전 감독은 "삼성과 KIA에서 감독일 때 외국인 투수들이 내게 기술적인 도움을 자주 요청했다. '감독님은 선수 시절 슬라이더를 잘 던졌다고 들었다. 슬라이더 그립을 알려달라'는 식이다. 그래서 내 그립을 보여주면 외국인 투수들이 허허 웃더라"고 말했다. 그는 투수 중에서도 손가락이 짧은 편이다. 그에게 맞게 변형한 그립을 보여주니 외국인 투수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선동열 전 감독은 "체형이 우리와 다른 외국인 선수를 내가 지도한다는 건 어렵다고 봤다. MLB 경력이 있는 선수들을 내가 손댈 순 없었다"고 했다. 그는 MLB 연수를 통해 외국인 선수, 그리고 MLB에 익숙한 젊은 한국 선수들과 소통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MLB '예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지난 3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MLB 연수가 무산됐다. 학창 시절 깨알 같은 글씨로 야구 일기를 썼던 '야구 소년' 선동열의 학구열이 꺾일 뻔했다. 불현듯 찾아온 언택트 시대. 선동열 전 감독은 '온택트' 연수를 시작했다. 지난 3월부터 지인들과 야구 스터디 그룹을 구성, 매주 다양한 주제를 놓고 공부하고 토론했다. 빅데이터 전문가, 세이버메트리션, 통계학자,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재활의학과 및 스포츠의학 전문의, 트레이너, MLB 스카우트와 마케터 등 각계 전문가로부터 강의를 들었다. 미국의 MLB 온라인 야구 프로그램도 수강했다. 이를 또다시 정리하고, 해석했다. 선동열 전 감독은 연필과 노트, 그리고 야구 서적이 담긴 책가방을 늘 메고 다녔다. 기자도 스터디 그룹 멤버 중 하나였다. 기자는 선동열 전 감독의 공부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국보', '국가대표' 등의 권위를 내려놓고, 낯선 이론·용어와 씨름하는 그에게 "이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자"고 제안했다. '선동열 야구학'은 그가 배우는 과정을 담은 것이다. 일간스포츠에 연재한 내용은 기술적인 측면에 집중했다. 선동열 전 감독이 기존에 가졌던 이론을 재정립하는 게 '선동열 야구학'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인문·의료·스카우트 등은 이번 연재 주제에서 벗어나 다루지 않았다. 연재 과정은 선동열 전 감독이 주도했다. 그의 메모와 구술을 바탕으로 기자가 글을 정리하면, 선동열 전 감독이 다시 확인하고 교정했다. 원고의 90% 이상은 그가 만들었다. '선동열 야구학' 시즌1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역설했다. "시대가 변했고, 야구를 보는 방법이 달라졌다. 그 변화를 선배가, 지도자가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내가 후배들을 잘못 가르쳤다." 그의 말은 '선동열 야구학' 마지막, 10편의 제목이 됐다. 김식 스포츠 팀장 관련기사 ①강속구의 시대, 한국 야구는 왜 소외됐나 ②속도보다 지속 가능한 성장이 중요하다 ③강속구의 대응 무기는 정말 '어퍼컷'일까 ④플라이볼은 목표인가 결과인가 ⑤타격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난 타자를 믿는다 ⑥류현진은 '피치 터널'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⑦류현진·매덕스는 타자의 0.045초를 훔친다 ⑧구창모는 '볼끝'이 좋은 게 아니다 ⑨트레버 바우어는 '공이 긁히는 날'을 만든다 2020.11.1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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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야구학] ⑩난 후배들을 잘못 가르쳤다

메이저리그(MLB) 포스트시즌 덕분에 가을이 풍성했다. 야구는 항상 재미있지만, 올봄 MLB 연수를 가려다가 못 간 탓에 더 그랬던 것 같다. LA 다저스가 승리한 월드시리즈 5차전. 데이브 로버츠 다저스 감독은 6회 초 2사에서 클레이턴 커쇼를 더스틴 메이로 교체했다. 커쇼는 마운드에서 한참 동안 뭔가를 이야기했다. 관중석에서는 로버츠 감독을 향한 야유가 터졌다. 커쇼의 투구 수는 85개에 불과했으니, 적어도 6이닝을 채우게 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로버츠 감독은 커쇼를 설득했다. 마운드를 내려오는 커쇼는 팬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교체 결과는 성공이었다. 메이는 7회까지 탬파베이 타선을 잘 막았다. 로버츠 감독은 “경기 전부터 예정된 교체였다. (팬들의 반응에 따른) 감정 때문에 계획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원칙이 승리했다. 다저스는 지난 몇 년 동안 포스트시즌에서 '전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투수 운용의 실패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저스는 이를 바탕으로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매뉴얼을 만든 것 같다. 선수층이 두껍지 못한 탬파베이는 변칙을 간간이 썼다. 뉴욕 양키스와의 디비전시리즈 5차전 선발 투수는 타일러 글래스노우였다. 앞서 2차전에서 5이닝(4실점)을 던진 에이스에게 휴일을 이틀만 줬다. 글래스노우는 2⅓이닝 2볼넷 2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한 뒤 교체됐다. 1번 타자부터 9번 타자까지 한 번씩만 상대한 것이다. 탬파베이는 2018년 오프너(opener) 전략을 MLB에 선보인 최초의 팀이다. 선발 투수가 마땅치 않은 날 불펜 투수에게 1~2회를 맡긴 뒤 상황에 따라 불펜을 총동원하는 작전이다. 이번에는 에이스를 오프너처럼 쓰는 ‘변칙의 변칙’을 선보였다. 글래스노우의 에너지가 떨어질 때를 예측해 불펜을 가동했다. 디비전시리즈를 성공으로 이끈 전략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과 월드시리즈에서는 잘 통하지 않았다. 탬파베이는 결국 월드시리즈 6차전에서 패했다. 탬파베이가 1-0으로 앞선 6회 말 1사 1루에서 케빈 캐시 감독이 선발 블레이크 스넬을 교체한 걸 두고 현지에서도 말이 많은 모양이다. 5⅓이닝 동안 73개를 던져 2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한 투수를 너무 빨리 바꿨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27년 동안 투수를 했고, 이후 투수 코치와 감독을 한 나에게도 가장, 여전히 어려운 건 투수 교체다. 마운드에서 혼을 다해 던지는 투수를 언제, 누구와 바꾸느냐는 어렵고 외로운 결단이다. 고려해야 할 요소가 너무 많다. 투수의 구위와 멘탈을 살펴야 하고, 타자와의 상대성을 고려해야 한다. 주자 유무와 견제 능력도 참고해야 한다. 직전 경기와 다음 경기까지 계산할 필요가 있다. MLB 중계를 통해 모든 투수와 감독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보니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원칙은 투구 교체는 가급적 빨라야 한다는 점이다. 투수의 체력과 기술, 심리의 한계를 확인한 뒤에 바꾸면 너무 늦다. 투수 교체에는 직관이 어느 정도 필요한 이유다. MLB는 팀마다 매뉴얼이 잘 정립돼 있다. 각종 데이터를 우리보다 잘 활용한다. 그래도 수없이 실패하고 갈등한다. 야구는 결국 사람이 하기 때문이다. 멀게만 느껴졌던 MLB도 우리 야구와의 공통점을 발견하면서 조금씩 친숙해지고 있다. 직관이 아닌 데이터가 말한다 지난 1년 동안 내 공부의 목적은 데이터에 기반을 둔, 최신 야구의 트렌드였다. 1990년대에도 ‘데이터 야구’라는 개념이 있었다. 2000년대에는 야구를 통계학으로 설명하는 세이버메트릭스가 일반화했다. 2015년 MLB에 등장한 스탯캐스트는 몇 년 만에 정말 많은 걸 바꾸었다. 초고속카메라와 레이더 추적 기술을 통해 눈으로 볼 수 없는 걸 보게 해줬다. 초당 882프레임을 찍는 초고속카메라를 통해 투수의 공을 분석할 수 있다. 스피드뿐 아니라 회전수와 회전축, 이에 따른 무브먼트까지 다 나온다. 타구도 마찬가지다. 야구 룰은 100년 넘게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투구의 본질, 타격의 기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야구를 보는 시각과 방법은 몇 년 사이 급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새로운 용어와 데이터를 하나 배우면,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몇 개는 더 나왔다. 야구는 변하지 않았지만, 야구를 보는 방법이 달라졌다. 아니, 세밀해졌다. 정확해졌다. 젊은 선수들은 이미 데이터를 읽고 활용하는 데 익숙하다. 이들과 소통하려면 코치나 감독도 스탯캐스트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물론 모든 선수가 MLB의 새 이론과 데이터 해석에 능한 건 아니다. 선수들이 인터넷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고 활용하도록 돕는 것도 야구 선배의 몫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나도 많이 배웠다. 여러 기록과 인터뷰 자료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크리스티안 옐리치(밀워키)의 말이었다. MLB에서 ‘플라이볼 혁명’이 유행할 때 그는 “난 의식적으로 발사각을 높이려 한 적이 없다. 다른 건 스윙 궤적이 아니라 사고방식이다. 발사각에 매달려 성공한 선수가 있고, 그렇지 않은 선수가 있을 뿐이다. 나는 그 가운데 있으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해 몇 시간이고 말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옐리치 말의 내용도 인상적이었지만,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선수가 자기 생각과 이론을 자신 있게 펼치는 게 놀라웠다. KBO리그 선수들은 인터뷰가 서툰 편이다. 그래도 나를 비롯한 우리 세대보다는 말솜씨가 훨씬 좋아졌다. 우리 선수들도 기회를 만들어주면 더 고민하고, 공부하며, 표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선수들은 이미 그렇게 바뀌고 있다. 이제 선배들이 바뀌어야 같은 눈높이에서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조련과 육성에서 소통으로 바뀐다 1980~90년대 프로야구에서는 조련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심지어 2000년대에도 ‘투수 조련’ 같은 군대식 단어가 사용됐다. 이런 말이 오랫동안 쓰인 건 상명하복의 문화가 실재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육성이라는 말도 유행처럼 쓴다. 프로 선수들을 여전히 학생처럼 보는 시각을 담겨 있다. 물론 육성이 필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학생 야구 시스템이 부실하고, 프로 선수층마저 두껍지 못한 KBO리그 팀에서는 교육의 기능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독과 코치들은 ‘칭찬’이라는 말도 자주 쓴다. “오늘 선발 투수를 칭찬하고 싶다”는 말이 어느 순간 내게는 어색하게 들렸다. 이 말에서도 상하관계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느 점이 좋았다”, “이래서 고맙다”는 표현이 좋을 것 같다. 정말 중요한 건 선수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그들을 당당한 프로 선수로 대하고, 그들의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됐는지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선수들의 인생을 건 도전을 내가 선배로서 충분히 도왔는지 반성하게 된다. 야구를 공부할수록 느낀 건, 난 선수들을 잘못 가르쳤다는 점이다. 선수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줬다는 말이 아니다. 선수들의 눈높이로, 최신 이론과 데이터를 통해 선수들을 충분히 납득시켰느냐고 물으면 사실 할 말이 없다. 내가 투수 코치와 감독을 할 때 선수들은 내 후배들이었다. 그들은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다. 선수 생활을 몇 년 더 했고, 일본 야구까지 경험한 내가 뭐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방법이 수직적인 관계에서 비롯됐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선배들에게 배운 대로 후배들을 가르쳤다. 내가 그라운드를 떠난 지 몇 년이 흘렀다. 그사이 난 ‘각동님’으로 불렸다. 2012년 KBO리그로 온 박찬호에 대해 조언을 해달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팔각도가 조금 벌어져 있더라”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박찬호는 내가 늘 강조하는 하체 이동을 나무랄 데 없이 잘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시적인 부분을 말한 것인데, 아시아인 MLB 최다승(124승) 투수 박찬호를 ‘감히’ 가르치려 한다는 오해를 받았다. 또 2018년 국회 국정감사장에도 섰다. 아시안게임 대표선수들을 선발하는 과정에 부정이 있었다는 정치권의 의혹에 맞섰다. 내 억울함을 풀기는 했지만, 젊은 세대가 현실에서 느끼는 박탈감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지금 KBO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은 내 아들뻘이다. 30대가 된 아들, 지난해 결혼한 딸이 있는 부모 입장에서 선수들을 보게 된다. 집에서 귀한 아들로 자랐을 요즘 선수들은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영리하고 똑똑하다. 정보를 접하고 해석하는 것에 익숙하고, 직관보다 데이터를 신뢰한다. 무엇보다 믿어주고 도와주면 기성세대가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잘해낸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MLB 포스트시즌이 끝났다. 최첨단 장비와 빅데이터로 움직이는 MLB에서도 투수 교체를 놓고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걸 보면 야구는 계산대로만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투수 교체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몇 번의 성패로 야구는 끝나지 않는다. 기본을 잘 지키고, 원칙을 따르면 결국 이길 수 있다. 그건 팀이 가지고 있는 시스템이자 매뉴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 신뢰라고 생각한다. 작전은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구성원 사이에 배려와 믿음이 있다면, 작은 실패를 딛고 결국 성공할 것이다. 그게 승리로 가는 길, 팀과 리그의 가치를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회를 마지막으로 ‘선동열 야구학’ 시즌1을 마친다. 시즌1이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야구를 보는 것이었다면, 시즌2는 야구와 사람에 대해 공부할 생각이다. 나는 야구를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야구 공부도 계속할 것이다. 다시는 선수들을 잘못 가르치지 않기 위해서다. 관련기사 ①강속구의 시대, 한국 야구는 왜 소외됐나 ②속도보다 지속 가능한 성장이 중요하다 ③강속구의 대응 무기는 정말 '어퍼컷'일까 ④플라이볼은 목표인가 결과인가 ⑤타격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난 타자를 믿는다 ⑥류현진은 '피치 터널'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⑦류현진·매덕스는 타자의 0.045초를 훔친다 ⑧구창모는 '볼끝'이 좋은 게 아니다 ⑨트레버 바우어는 '공이 긁히는 날'을 만든다 2020.11.1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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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야구학] ⑨트레버 바우어 ‘공이 긁히는 날’을 만든다

올해 메이저리그(MLB)는 LA 다저스의 월드시리즈(WS) 우승으로 끝났다. 비교적 낯익은 다저스 선수보다 탬파베이 선수들이 눈에 더 들어왔다. 특히 탬파베이 마무리로 활약하는 디에고 카스티요(26)의 피칭이 흥미로웠다. 카스티요는 시속 150㎞가 훌쩍 넘는 빠른 공을 던진다. 포심 패스트볼 비중은 매우 낮다. 그는 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로 ‘투 피치’를 구성한다. 투심의 스피드는 포심과 거의 같다. MLB 통계 사이트 스탯캐스트를 보면 카스티요의 패스트볼 스피드는 상위 12%(평균 시속 154.7㎞)에 해당한다. 그런데 포심 패스트볼 회전은 하위 4%(분당 1876회)에 불과하다. 스피드는 빠른데 회전이 많지 않은 공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올드보이들은 “볼끝이 나쁘다”거나 “종속이 느리다”고 할 것이다. 그 관념이 틀렸다는 걸 이제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카스티요가 올해 정규시즌 22경기에서 3승무패 5홀드 4세이브, 평균자책점 1.66을 기록한 걸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카스티요는 수직(vertical) 무브먼트보다 수평(horizontal) 무브먼트를 잘 활용하는 투수다. 포심 패스트볼 비중이 아주 낮은 그에게는 효과적인 피칭이다. 오른손 투수인 카스티요는 오른손 타자 몸쪽으로 가라앉는 투심, 아래로 떨어지며 바깥쪽으로 달아나는 슬라이더 조합을 이용한다. 강한 근력과 악력(握力, 쥐는 힘)을 갖고 있어서 가능하다. KBO리그에서 뛰는 외국인 투수 중에도 이런 유형이 많다. 이들은 포심 스피드와 거의 같은 변형 패스트볼(투심)을 던진다. 한국 투수들의 신체 조건으로는 이런 피칭 스타일을 만들기 어렵다. 그래도 주목할 점은 카스티요가 공을 ‘때리는’ 동작이 매우 훌륭하다는 것이다. 투구 폼이 예쁘진 않지만, 힘을 모아 폭발하는 메커니즘을 잘 만들었다. 카스티요 외에도 탬파베이에는 인상적인 불펜 투수들이 꽤 있었다. 투구 폼이 참 희한했다. 공의 좌우 움직임, 즉 수평 무브먼트를 활용하는 이들이 많았다. 탬파베이의 불펜 투수들은 공통적으로 폭발적인 릴리스를 보였다. 구단과 투수코치, 선수들이 공유하는 매뉴얼이 있을 것 같다. 카스티요 같은 투심을 던질 게 아니라면, 오버핸드 투수는 기본적으로 수직 무브먼트를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회전 효율(spin efficiency)이다. 수평의 축이 ‘회전 효율’ 높인다 물리학의 관점으로 피칭을 이해하려면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개념을 알아야 피칭에 응용할 수 있다. 투수가 던진 공은 중력의 영향을 받아 아래로 떨어진다. 중력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다. 비행하는 공의 궤적을 바꾸는 또 다른 힘이 있다. 압력이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휘어지는 공이 현상, 즉 마그누스 효과(Magnus effect)다. 야구공에는 솔기가 있어 투수의 의도에 따라 회전을 줄 수 있다. 회전 변화가 변화구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투수들은 회전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버핸드 투수가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면 백스핀(backspin)이 걸린다. 중력의 영향을 받아 떨어지는 공의 낙폭을 강한 백스핀이 줄여준다. 백스핀의 반대가 톱스핀(top spin)이다. 공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회전을 주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 같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커브가 백스핀에 따라 움직인다. 백스핀과 톱스핀은 회전 방향이 다를 뿐, 회전축이 같다. 지면과 수평을 이룬다. 톱스핀이 걸린 공은 가라앉는다. 여기에 중력의 힘까지 작용해 더 많이 떨어진다. 사이드 스핀은 회전축이 지면과 수직을 이룬다. 사이드암 투수가 던지는 공은 이 회전의 비중이 크다. 사이드 스핀에 따라 공은 좌우로 움직인다. 이 밖에 우리에게 생소한 자이로 스핀(gyro spin)이라는 것도 있다. 투구의 진행 방향과 회전축이 평행을 이루는 회전이라고 한다. 이는 총알이 날아가는 원리와 같다고 해서 라이플(rifle, 소총) 스핀이라고도 부른다. 공은 세 가지 회전이 작용해 변화한다. 회전의 종류와 원리를 이해하면 더 효과적인 공을 던질 수 있다. 피칭에 문제가 생겼을 때 회전을 점검해 원인을 파악할 수도 있다. 현대 야구는 레이더 기술을 통해 야구공의 회전을 추적한다. 회전수뿐 아니라 회전축까지 파악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투구의 회전과 무브먼트의 상관관계를 알게 됐다. 앨런 네이선 미국 일리노이대 물리학 교수는 ‘회전이라고 해서 다 같지는 않다(All spin is not alike)’는 글을 지난 2015년 베이스볼 프로스펙터스에 기고했다. 네이선 교수는 포심 패스트볼이나 체인지업에는 자이로 스핀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구종은 백스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예를 들면, 투수 A가 던지는 커브의 회전이 투수 B의 것보다 많다. 그러나 투수 B의 회전 효율이 투수 A의 것보다 크기 때문에 커브의 변화폭이 더 크기도 한다. 투수 A 공의 회전이 더 많아도 투수 B의 커브가 더 크게 떨어질 수 있다. 회전에도 품질이 있다는 뜻이다. 자이로 회전은 무브먼트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백스핀 또는 톱스핀 회전수가 중요한 걸까. 얼마 전만 해도 그게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회전수와 수직 무브먼트의 상관관계가 그리 크지 않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수직 무브먼트 크기와 포심 패스트볼의 위력이 비례한다는 사실을 지난 칼럼에 소개했다. 포심 패스트볼의 회전축이 지면과 수평을 이룬 상태에서 강한 백스핀이 걸리면, 마그누스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것이 곧 회전 효율이다. 수평 무브먼트가 필요한 투심 패스트볼은 또 다르다. 회전축이 살짝 기울어져야 투심에 효과적인 궤적을 만들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회전수가 적은 편이 좋다고 한다. 카스티요의 회전수 적은 패스트볼이 위력적인 것은 이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안 빨라도 강한 공’을 디자인하다 2020년 MLB에서 가장 주목받은 투수는 트레버 바우어(29·신시내티)일 것이다. 단축 시즌으로 치러진 올해 11차례 선발 등판한 그는 5승4패, 평균자책점 1.73을 기록했다.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수상이 유력하다. 바우어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투수’가 된 게릿 콜(뉴욕 양키스)과 대학(UCLA) 동창이다. 아마추어 시절에는 콜보다 뛰어난 투수였다고 한다. 올 겨울 자유계약선수(FA)가 된 그는 SNS에 자기 홍보를 하는 중이다. 심지어 1년 전 콜을 사들인 양키스를 향해서도 자신을 영입하라고 주장했다. 바우어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기 생각을 당당히 밝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독특한 말과 행동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그를 괴짜라고 부른다. 올 시즌 바우어의 포심 패스트볼 평균 속도는 시속 150㎞다. 스피드만 보면 MLB 하위 23%였다. 그러나 그의 패스트볼구종 가치(wFB)는 12.7로 MLB 전체 3위(팬그래프 기준)였다. 이유가 뭘까. 구종 가치는 스트라이크와 아웃을 많이 잡을수록 올라간다. 이를 위해 여러 요소가 필요하지만, MLB 전문가들은 그의 투구 회전에 주목한다. 스탯캐스트에 따르면, 올 시즌 바우어의 패스트볼 회전수는 분당 2776회로 MLB 최고 수준이었다. 회전 효율도 상당히 좋다. 바우어의 포심 패스트볼은 그와 비슷한 구속, 릴리스, 익스텐션을 가진 다른 투수의 공보다 평균 9.9㎝ 덜 떨어지는(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는 올 시즌 MLB 투수 중 1위다. 바우어는 어릴 때부터 각종 투구 이론을 공부했다고 한다. 스스로 투구를 연구하고 개선하는 ‘피치 디자이너’다. 2018년에는 레이더와 슬로모션 데이터를 보고 슬라이더 회전축을 교정했다. 이후 그의 슬라이더 위력은 크게 향상됐다. 올해 바우어의 슬라이더 구종 가치는 7.6으로 MLB 전체 6위였다. 그는 2013년부터 겨울마다 ‘드라이브라인베이스볼’이라는 회사로 가서 전기자극 훈련을 한다. 또한 신체 곳곳에 센서를 붙여 투구 폼을 과학적으로 재해석한다. 그의 이런 연구 과정은 지난해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 기사로 소개된 바 있다. 평범한 체격(185㎝·90㎏)에서 나오는 바우어의 패스트볼 스피드는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다. 키 2m가 넘는 앤드류 밀러(세인트루이스)는 “바우어는 놀란 라이언이 아니지만, 라이언처럼 던진다”고 했다. 유효 회전이 많은 패스트볼을 던지기 때문이다. 이유가 뭘까. 투구의 회전을 늘리려면 손과 공의 마찰력이 커야 할 것이다. 이는 ▶공을 잡는 그립 ▶손아귀와 손가락 힘 ▶팔 각도(arm slot) ▶릴리스 등으로 결정된다. 또 불필요한 회전을 줄이고, 회전축을 수평에 맞추면 회전 효율이 높아진다. 그러면 수직 무브먼트가 커질 것이다. 투수에게는 공이 유난히 잘 들어가는 날이 있다. 이를 “공이 손에서 긁히는 날”이라고 흔히 표현했다. 오래전부터 회전이 많은 공이 위력적이라는 걸 다들 경험으로 알았다. 스탯캐스트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자신의 투구를 인식하고 분석하도록 만들었다. 과학적인 프로세스를 통해 결점을 찾고 보완할 수 있게 됐다. ‘공이 손에 긁히는 날’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바우어처럼 강하고 효과적인 회전을 만드는 게 가능해졌다. 회전수가 많고, 회전 효율이 높으면 패스트볼 구위가 좋아야 한다. 어깨와 팔꿈치가 직선을 만들고, 릴리스 때 손바닥(회전축)이 지면과 수평을 이루면 된다. 이론적으로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 않다. 회전이 덜 걸려서 오히려 위력적인 변화구도 있고, 카스티요처럼 패스트볼 계열의 공에는 수평 무브먼트가 효과적일 수 있다. 투수의 유형과 신체, 특성에 따라 최적의 폼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기본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자신의 특성에 맞게 응용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선수가 공부해야 하고,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무기(폼)를 찾아야 한다. 바우어가 자신의 피칭을 설명하는 ‘MLB 네트워크’ 동영상을 봤다. 그는 “처음에 나도 큰 허리 회전(big turn)을 했다. 하지만 내 골반을 X-레이로 분석한 결과, 그건 내 몸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스트라이드에 가속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또 “롱 토스(90m 이상의 긴 거리에서 공을 던지는 훈련)에서 익힌 대로 마운드에서 내려가며 (걷는 느낌으로) 강한 회전을 만들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여기서 또 느낀 게 있다. 내가 좋은 밸런스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 권하는 스텝앤드스로(step and throw)와 바우어의 롱 토스는 개념이 다르지 않다. 투구 각도와 회전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 다양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그래도 피칭은 안정된 하체 이동에서 얻는 추진력으로부터 시작한다. 〈박스〉 바우어는 ‘파인타르’를 썼을까 트레버 바우어가 투구 회전을 연구하는 건 틀림없다. 게다가 그는 아주 좋은 피칭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2020년 그의 투구 회전이 온전히 연구와 노력 때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MLB 관계자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다. 지난해까지 바우어의 포심 패스트볼 분당 회전수는 평균보다 조금 높은 2300회 수준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바우어의 패스트볼은 뛰어났다. 2018년 그는 SNS를 통해 앙숙인 게리 콜을 저격했다. 콜이 피츠버그에서 휴스턴으로 이적한 뒤 포심 패스트볼 회전수가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2017년 2277rpm에서 FA(자유계약선수) 계약을 앞둔 2019년 2412rpm까지 올랐다. 바우어는 “공의 회전수는 인위적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내 패스트볼은 2250rpm인데 누구처럼 파인타르(pine tar, 송진)를 쓰면 400rpm을 더 올릴 수 있다”고 썼다. 파인타르는 마찰력을 높이기 위해 배트에 묻히는 물질이다. 투수는 로진백(송진가루)을 자주 이용한다. 그러나 ‘이물질’ 사용은 금지돼 있다. 파인타르는 ‘이물질’로 인식된다. MLB 투수들은 알게 모르게 파인타르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콜의 패스트볼 회전이 증가한 이유는 이 때문이라고 바우어는 확신하는 것 같다. 바우어는 올해 초 “MLB 투수들의 70%가 파인타르를 사용한다. 이건 투수가 스테로이드를 복용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묘하게도 올 시즌 바우어의 포심 패스트볼 회전은 지난 시즌(2412rpm)보다 364rpm 증가했다. 2년 전 그가 파인타르를 사용해 늘릴 수 있다는 회전수(400rpm)와 비슷하다. 올 시즌 그의 포심패스트볼 구속이 떨어졌지만, 구위는 향상된 이유다. 바우어는 지난 2~3년 동안 투구 회전에 대해 많이 연구했다. 그가 정말 회전수 증가과 회전 효율 향상의 비밀을 밝혀낸 걸까. 아니면 그도 파인타르를 쓴 걸까. 남들도 다 쓴다는 파인타르를 바우어도 사용했다면, 비슷한 조건에서 그가 최고의 회전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걸까. 하여간 재미있는 선수다. 관련기사 ①강속구의 시대, 한국 야구는 왜 소외됐나 ②속도보다 지속 가능한 성장이 중요하다 ③강속구의 대응 무기는 정말 '어퍼컷'일까 ④플라이볼은 목표인가 결과인가 ⑤타격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난 타자를 믿는다 ⑥류현진은 '피치 터널'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⑦류현진·매덕스는 타자의 0.045초를 훔친다 ⑧구창모는 '볼끝'이 좋은 게 아니다 2020.11.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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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야구학] ⑧구창모는 ‘볼끝’이 좋은 게 아니다

2020년 KBO리그에서 가장 뜨거운 투수는 NC 구창모(23)다. 전완근 염증으로 세 달을 쉰 그는 지난 24일 멋진 복귀전을 치렀다. 올 시즌 구창모는 88⅓이닝을 던지며 9승무패 1홀드, 평균자책점 1.53을 기록 중이다. 20대 에이스의 등장을 기대했던 KBO리그와 국가대표 대표팀에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다. 구창모의 피칭은 정말 시원시원하다. 마치 내야수가 송구하는 것처럼 빠르고 짧은 백스윙으로 힘을 모은다. 뛰어난 디셉션(deception, 투구 전 허리 뒤로 공을 감추는 동작)으로 타자가 투구를 볼 시간을 최소화한다. 그리고 채찍으로 때리듯 공을 던진다. 구창모의 공은 홈 플레이트를 통과할 때까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타자들은 타이밍을 잡지 못한다. 그리고 대부분 투구 궤적보다 밑으로 스윙한다. 우리 세대는 이걸 “볼끝이 좋다”고 표현했다. 또는 “공의 종속이 좋다”, “공의 회전이 뛰어나다”라고도 말했다.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틀렸다는 걸 알게 됐다. ‘볼끝’이 좋다는 건 추상적인 표현이다. 또한 과학적으로 초속과 종속이 차이가 크게 날 수 없다고 한다. 무엇보다 내가 특히 놀란 건 공의 회전과 구위의 연관성이 크지 않다는 사실이다. 앨런 네이선 일리노이 주립대 물리학 교수는 ‘하드볼 타임즈’에 공의 무브먼트와 회전 효율(pitch movement, spin efficiency, and all that)이라는 글을 2018년 기고했다. 네이선 교수는 투구의 회전과 무브먼트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분이다. 메이저리그(MLB)는 2008년 광학 카메라 기반의 PITCHf/x(투구분석 시스템)를 도입했다. 2015년 이후에는 레이더 추적 기술인 트랙맨이 사용되고 있다. MLB만큼은 아니지만, KBO리그도 이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투구와 타구에 대해 세밀한 정보를 얻고 있다. 이 데이터를 이용해 선수와 코치가 추구해야 할 지향점도 좀 더 명확해졌다. 투수는 수직 무브먼트(vertical movement)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게 중요하다. 구창모의 공은 덜 떨어진다 내가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2017년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APBC)에 구창모를 선발했다. 당시 대표팀은 24세 이하, 프로 3년 차 이하 선수들로만 구성했다. 나이와 상관없이 와일드카드를 쓸 수 있었지만, 젊은 투수들에게 국제대회 출전 경험을 더 주고 싶었다. 스포츠투아이에 따르면 올해 구창모의 포심 패스트볼 스피드는 평균 143.1㎞였다. 최고 구속은 150.4㎞. 3년 동안 그의 패스트볼 스피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성적은 완전히 달라졌다. 2018년 133이닝을 던지며 5승11패 평균자책점 5.35를 기록했던 구창모는 지난해 107이닝 동안 10승3패 평균자책점 3.20을 올렸다. 그 탄력을 받아 올해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 성장했다. 데이터는 구창모의 피칭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이 데이터를 해석하는 게 나로서는 꽤 어렵다. 기록 업체마다 계산 식도 다르다고 한다. 어렵고 복잡하다. 그래서 여전히 공부 중이다. 먼저 수직 무브먼트의 개념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물리학 논문이 많다. 특히 일본 와세다대와 사이타마대 교수 5명이 공저한 『야구공의 회전과 투수의 퍼포먼스』를 많이 참조했다. 이 논문은 시속 144㎞의 패스트볼을 기준으로 여러 계산을 했다. 오버핸드 투수가 180㎝ 높이에서 회전 없이 던진 공은 17m쯤 비행해 홈플레이트, 즉 바닥에 처박힌다(빨간선). 현실에는 회전 없는 공이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조건에서 던진 공이 지표면과 수평 회전축으로 분당 4200회전(rpm)을 한다면, 홈플레이트에 도착했을 때 1m 높이라고 한다. 투수가 던지는 패스트볼의 경우 보통 2000~2400rpm의 회전을 하기 때문에 4200rpm의 공 역시 상상 속 마구다. 현실적인 패스트볼 궤적은 녹색선이다. 홈플레이트에서 빨간선과 녹색선의 높이 차이를 수직 무브먼트라고 한다. 이 수직 무브먼트는 투수에게 매우 중요하다. 모든 투구는 중력의 영향을 받아 아래로 가라앉기 마련이다. 타자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투구 궤적을 기억하고 있다. 예상보다 ‘덜 떨어지면’ 공이 떠오른다고 느낀다. 라이징 패스트볼(rising fastball)은 실제 떠오르는 게 아니라, 타자의 착각이다. 트랙맨 데이터에 의하면, 구창모 패스트볼의 평균 수직 무브먼트는 지난해 42.95㎝였다. 이 정도면 KBO리그 최상위 레벨이라고 알고 있다. 올해는 45.56㎝로 더 커졌다. 수직 무브먼트가 원래 컸던 공이 1년 전보다 2.61㎝ 덜 떨어지는 것이다. 야구공의 지름은 7.2㎝다. 투구의 수직 변화가 2.61㎝ 더 커졌다면 정타가 될 타구는 파울이 된다. 공의 아랫부분을 맞힐 수 있는 타격은 헛스윙이 될 것이다. 작은 변화가 절대 아니다. 수직 무브먼트가 크다는 건 “볼끝이 좋다”, “종속이 빠르다”는 옛말을 대체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구창모의 패스트볼 위력은 수직 무브먼트로 상당 부분 설명할 수 있다. 무브먼트 값을 산정하는 방식은 리그는 물론 업체끼리도 다르다고 한다. 회전 측정법부터 같지 않다. 구장 환경, 기후, 타자의 체격 등도 계산 식에 넣는다. 산정 방식이 다르니 KBO리그와 MLB 기록을 비교하는 건 무의미하다. 그러나 같은 업체가 한 선수의 수직 무브먼트의 변화를 비교하는 건 의미가 있다. 2.61㎝의 차이는 구창모의 피칭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상승이다. 수직 무브먼트의 활용법 내가 선수로 뛸 때는 무브먼트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었다. 공은 최대한 낮게 던지라고, 스트라이크존 좌우를 잘 공략하라고 배웠을 뿐이다. 1980~90년대 투수들은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를 주로 던졌다. 타자들은 다운컷 스윙을 많이 했다. 그래서 높은 공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맞는 이론이었다. 난 선수 시절 하체를 길게 뻗어 공을 던졌다. 요즘 표현을 쓰자면 익스텐션(extension, 투수판과 릴리스 포인트까지의 거리)이 길었다. KBO리그 투수들 익스텐션이 180~185㎝라고 한다. MLB 평균은 192㎝ 정도다. 정확히 잰 건 아니지만, 젊은 시절 내 익스텐션은 2m 안팎이었다. 타자가 느끼는 구속은 실제보다 더 빨랐다고 한다. 지난 칼럼에서 소개한 ‘피치 터널’도 다른 투수보다 길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폼과 전략을 끝까지 유지한 건 아니었다. 난 33세였던 1996년부터 4년 동안 일본 주니치에 입단했다. 당시에는 ‘노장’에 속했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야구를 경험할 수 있었다. 가장 큰 변화가 하이 패스트볼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일본 투수들은 우리와 달리 스트라이크 높은 코스를 잘 활용했다. 내가 아는 야구와 다른 점이었다. 머뭇거리던 나에게 야마모토 마사(山本昌広)가 이런 말로 날 자극했다. “선상(宣さん)은 공이 빠르고, 나보다 제구력도 좋잖아요? 그런데 왜 스트라이크를 던집니까? 스트라이크와 비슷한 볼을 던져보세요.” 내 제구가 야마모토보다 좋다는 건 그의 지나친 겸손이었다. 그는 시속 130㎞대의 패스트볼로 50세까지 주니치(통산 219승)에서 활약했을 만큼 뛰어난 컨트롤을 갖고 있었다. 어쨌든 난 야마모토의 말에 용기를 얻어 피칭을 바꿨다. 초구부터 하이 패스트볼을 적극적으로 던졌다. 나이가 들어 유연성이 떨어지고, 익스텐션도 짧아진 터였다. 하이 패스트볼에 타자들은 대부분 방망이를 돌렸다. 내 공에 아직 힘이 있을 때였기에 파울이나 헛스윙이 나왔다. 게다가 하이 패스트볼은 제구가 상대적으로 쉬었다. 그래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는 경우가 많았다. 하이 패스트볼을 본 타자들의 뇌리에는 그 공의 궤적과 스피드가 남는다. 다음에 낮은 공을 던지면 타자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덕분에 난 투구 수를 줄일 수 있었다. 그게 당시의 나에게 맞는 릴리스 포인트였고, 공 배합이었다. 내가 삼성 감독이었던 2006년 차우찬(현 LG)이 입단했다. 왼손 투수인 그는 빠른 공을 던졌다. 그러나 스트라이드가 너무 컸다. 학창 시절 익스텐션을 늘리는 게 무조건 좋다고 배운 것이다. 당시 차우찬의 상·하체 밸런스는 깨져 있었다. 신체 특성에 맞지 않게 스트라이드를 너무 넓힌 나머지, 팔 스윙이 매끄럽지 못했다. 그래서 오치아이 에이지 당시 투수코치와 상의해 그의 익스텐션을 20㎝ 정도 줄이기로 결정했다. 상당히 큰 변화를 차우찬은 잘 받아들였다. 스피드가 조금 감소했지만, 폼이 안정되면서 제구력이 향상됐다. 차우찬과 다른 경우가 조상우(키움)다. 몸이 크면서도 유연한 그는 긴 익스텐션을 활용해 체감 속도를 높이는 길을 선택했다. 조상우에게는 그게 적합하다. 지난해 172㎝ 정도였던 구창모의 릴리스 포인트는 올해 180㎝ 수준으로 높아졌다고 한다. 인위적으로 타점을 높인 게 아닐 것이다. 익스텐션을 5㎝ 정도 줄인 결과다. 모든 자세의 변화는 하체로부터 시작한다. 구창모는 익스텐션 단축→릴리스 포인트 상향→수직 무브먼트 증가로 이어지는 변화를 택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이런 피칭은 하이 패스트볼의 위력을 강화한다. 게다가 요즘 타자들의 어퍼컷 스윙을 이겨내는 데 효과적이다. 또 하이 패스트볼이라는 무기가 생기면 크게 떨어지는 변화구(커브, 포크볼)의 효용도 함께 커진다. 지난해부터 구창모의 포크볼 위력이 배가된 이유도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난 프로에서 10년 이상의 경력을 쌓은 뒤 동료의 조언을 듣고 피칭 전략을 바꿨다. 구창모는 나보다 열 살 젊은 나이에 새로운 피칭을 만들었다. 기술 발달로 인해 자신의 투구를 더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보게 된 덕분일 것이다. MLB에서는 이를 피치 디자인(pitch design)이라고 한다. 트레이닝만 강조했던 시대는 지났다. 관련기사 ①강속구의 시대, 한국 야구는 왜 소외됐나 ②속도보다 지속 가능한 성장이 중요하다 ③강속구의 대응 무기는 정말 '어퍼컷'일까 ④플라이볼은 목표인가 결과인가 ⑤타격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난 타자를 믿는다 ⑥류현진은 '피치 터널'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⑦류현진·매덕스는 타자의 0.045초를 훔친다 2020.10.2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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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야구학] ⑦류현진·매덕스는 타자의 0.045초를 훔친다

“나는 투수들의 피칭을 지켜봤다. 그 가운데 한 명인 왼손 투수 스티브 에이버리는 시속 153㎞가 넘는 빠른 공을 던졌다. 그의 커브는 크게 휘었다. 아주 위력적이었다. 다른 한 명은 오른손 투수였다. 포심 패스트볼, 투심 패스트볼, 슬라이더, 체인지업을 던졌다. 그는 대학생 투수 수준보다는 나아 보였다. 그러나 특별하지 않았다. 위력적이지 않았다.” 세이버메트릭스(야구 통계학) 전문 사이트 ‘베이스볼 프로스펙터스’가 2017년 게재한 기사의 리드 부분이다. 포수보다 3~4m 뒤에 앉은 기자는 두 투수의 살아 있는 공을 봤다. 왼손 투수는 무서울 만큼 강해 보였고, 오른손 투수는 그저 그랬다고 한다. 그 기자가 ‘대학생 수준보다 조금 낫다’고 평가한 투수는 그레그 매덕스(54)이다. 매덕스는 메이저리그(MLB) 역사상 최초로 4년 연속(1992~95년) 사이영상을 받았다. 17년 연속(1988~2004년) 15승 이상, 20년 연속 10승(1988~2007년) 이상을 기록하는 등 MLB 통산 355승(227패 평균자책점 3.16)을 거둔 전설적인 투수다. 기자는 참 이상했을 것이다. 매덕스의 피칭이 겨우 이거라고? 뭔가 특별한 무기를 숨긴 것 아닐까? 이렇게 의심했을 것이다. 매덕스는 기자에게 “이것이 내가 가진 전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설명을 이어갔다. “변화구는 크고 빠르게 꺾이는 게 중요하지 않다. 내 변화구는 늦게, 빨리 꺾이는(late quick break) 것이 목표다. 공이 많이 꺾이기 위해서는 방향을 일찍 바꿔야 한다. 그만큼 타자에게 생각하고 반응할 시간을 준다. 투구의 변화가 늦게 일어나면 타자가 대응할 시간이 적어진다. 투구에 대한 정보를 타자에게 최대한 늦게 줘야 한다.” 이어 매덕스는 “모든 투구는 서로 가까워 보여야 한다. 투수가 던지는 모든 공이 홈플레이트를 향하는 ‘우유 기둥(column of milk)’처럼 보이게 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모든 투구가 가까워 보인다는 건 패스트볼과 변화구의 궤적 차이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뜻이다. 구종에 따라 공의 궤적은 당연히 달라진다. 그러나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어느 지점까지는 비슷하게 비행해야 한다는 게 매덕스의 주장이었다. 그가 비유한 ‘우유 기둥’을 떠올려 보자. 우유를 컵에 따르면, 기둥처럼 한 줄로 내려오다가 점점 갈라질 것이다. 야구공도 흰색이니까 여러 투구를 겹쳐 놓는다면 우유 기둥과 비슷한 모양이 될 것이다. 매덕스는 크게 꺾이는 변화구보다 패스트볼과 비슷한 궤적의 변화구를 던지려고 노력했다. ‘타자에게 보이는 것’보다 ‘타자를 속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매덕스의 피칭을 스피드와 변화 각만으로 감상한다면, 기자가 그랬던 것처럼 ‘대학생 투수보다 조금 나은 정도’라고 오판할 수 있다. 그러나 타석에 선 MLB 선수들은 매덕스의 공을 20년 가까이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매덕스는 모든 공을 ‘비슷한’ 궤적으로 던지려 노력했다. 그러나 ‘똑같은’ 공은 하나도 던지지 않았다. 타자들은 매덕스의 공을 칠 수 있다고 배트를 휘둘렀겠지만, 대부분 빗맞거나 헛스윙을 했다. 매덕스는 타자의 성향과 심리·볼카운트 등을 고려하면서 공을 다양하고, 현란하게 던졌다. ‘우유 기둥’ 안으로 모든 공을 밀어 넣었다. 기둥이 넓게 퍼진 뒤에는 타자가 이미 속은 뒤였을 것이다. 매덕스가 ‘우유 기둥’이라고 이름 붙인 이 투구 이론은 오늘날 피치 터널과 다르지 않다. 그는 이미 20~30년 전에 모든 투구 궤적은 최대한 가까워야 한다는 걸 알았고, 이를 자신의 피칭에 적용했다. 매덕스 별명 중 가장 유명한 건 ‘컨트롤의 마법사’다. 그의 포심 패스트볼 대부분은 시속 140㎞대였다. 그러나 무브먼트가 뛰어난 투심 패스트볼로 타자를 압도했다. 30대 나이가 되어 구위가 떨어진 뒤 매덕스는 컷 패스트볼, 체인지업 등을 추가했다. 구종이 다양해진 덕분에 매덕스의 전성기는 더 오래 이어졌다. 만 41세에도 샌디에이고 유니폼을 입고 14승을 올렸다. 매덕스의 피칭을 다양성과 정확성으로만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그는 타자를 속일 줄 알았다. 그 핵심 기술이 20세기의 ‘우유 기둥’, 21세기의 ‘피치 터널’이다. 매덕스가 ‘우유 기둥’을 말한 이유 매덕스의 스토리는 류현진(33·토론토)과 닮았다. 지난해 LA 다저스에서 뛰었던 류현진은 5월 8일 애틀랜타를 상대로 9이닝 93개의 공을 던지며 4피안타 무사사구 6탈삼진 무실점 완봉승을 거뒀다. 외신들은 “류현진이 ‘매덕스 게임’을 완성했다”고 썼다. ‘매덕스 게임’이란 투구 수 100개를 넘기지 않고 9이닝을 완봉으로 막아낸 경기를 뜻한다. 매덕스가 투구 수 100개 미만으로 완봉승을 기록한 경기는 통산 13차례(완봉승 35번)나 된다. 류현진이 지난 시즌 중반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할 때, 여러 외신과 MLB 관계자들은 그를 매덕스와 비교했다. ESPN “새로운 그렉 매덕스? 건강한 류현진이라면 거의 그렇다”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류현진과 ‘매덕스 게임’을 함께 이룬 포수가 러셀 마틴이었다. 그는 2006년과 2008년 매덕스와 배터리를 이룬 적이 있다. 마틴은 “류현진이 던진 공 93개 중 58개를 받을 때 미트를 움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만큼 제구가 완벽했다는 뜻이었다. 러셀은 류현진의 투구는 매덕스를 떠올린다고 말했다. 난 이런 말들이 류현진에 대한 많은 평가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특급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매덕스의 투구에는 힘과 기술뿐 아니라 전략과 통찰력까지 담겨있기 때문이다. 우리 선수들이 시속 100마일(161㎞) 이상의 공을 뿌리는 아롤디스 채프먼(뉴욕 양키스)이 될 확률보다 류현진처럼 성장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지난 칼럼에서 피치 터널의 원리에 대해 설명했다. 터널이라는 공간적인 개념뿐 아니라 시간적인 측면에서 이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버트 어데어 미국 예일대 명예교수의 저서 『야구의 물리학』은 투수와 타자의 ‘시간 싸움’을 잘 설명하고 있다. 투수판과 홈플레이트의 거리는 18.44m다. 투수가 스트라이드를 해서 공을 던지기 때문에 릴리스 포인트와 타자의 히팅 포인트의 거리는 약 17m다. 어데어 교수는 투수가 시속 145㎞의 패스트볼을 던진다고 가정했다. 이에 따라 타자가 해야 할 일을 시간별로 계산했다. 패스트볼이 17m를 날아가는 시간은 0.4초에 불과하다.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타자 시야에 들어오기까지 0.1초가 걸린다고 한다. 이후 타자가 공의 속도와 궤적을 파악하는데 0.075초가 더 필요하다. 이제 타자의 시간으로 가보자. 사람의 눈이 강한 빛에 반응해 깜빡하는 데 0.15초가 걸린다. 타자가 공을 보고 타격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면, 두뇌가 근육에 신호를 보내는 시간(0.03초)이 필요하다. 따라서 타자마다 차이는 있지만, 스윙에는 0.18초가 소요된다. 타자가 어프로치를 한 이후에도 투구를 보면서 스윙을 조금 수정하거나 멈출 순 있다. 그러나 타자가 스윙을 일단 시작했다면, 타이밍과 궤적은 거의 정해졌다고 봐야 한다. 다시 정리해 보자. 타자가 투구를 파악하는 최소 시간(0.175초)과 타자가 스윙하는 최소 시간(0.18초)이 필요하다. 두 시간을 더하면 0.355초다. 이론상 투구의 비행시간인 0.4초 중에서 0.045초의 시간이 타자에게 더 있는 셈이다. 이건 판단하는 시간이다. 이 찰나의 시간에 타자는 스윙 여부를 결정한다. 타자가 투구의 궤적을 예측했다면 0.045초가 필요 없을 수 있다. 타자들이 시속 145㎞의 패스트볼은 물론 160㎞의 강속구도 공략하는 이유다. 투수 입장에서는 타자에게 주어진 0.045초를 최소화하거나 없애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투수가 더 빠른 공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160㎞ 이상의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심지어 그것조차 완벽한 방법이 아니다. 타자의 물리적인 시간을 빼앗을 수 없다면? 타자의 시야를 흔들어서 타자의 시간을 훔쳐야 한다. 그 방법이 바로 스트라이크와 볼을 구분하기 어렵게 공을 던지는 것이고, 피치 터널을 최대한 길게 만드는 것이다. 류현진은 시간과 공간을 지배한다 긴 터널을 만드는 데 마법이 필요한 건 아니다. 이전 칼럼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터널에 들어가기 전에 투구의 방향과 속도는 이미 정해져 있다. 안정적인 폼으로 일정한 릴리스 포인트를 만드는 게 피치 터널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 재능은 강속구를 던지는 것보다 더 귀중하다. 속도만이 무기가 아니다. 류현진처럼 시간과 공간을 잘 활용하면 세계 최고의 투수가 될 수 있다. 시간을 이용한다는 말은 일정한 템포로 던진다는 걸 뜻한다. 어떤 공을 어디에 던져도 폼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 같지만, 수준급 투수에게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는 동작이 빨라지는 경향이 있다. 커브 같은 느린 변화구를 던질 때는 템포가 느려진다. 투수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피칭 템포가 완벽하게 똑같은 투수는 없다. 타자는 투수의 템포에 타이밍을 맞춘다. 눈썰미가 좋다면 구종도 예측할 수 있다. 투구 템포는 데이터로 나오지 않지만, 타자가 미묘하게 느낄 순 있다. 매덕스나 류현진도 동작의 템포가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타자의 시간을 빼앗는 이들의 능력은 완벽에 가깝다. 피치 터널은 '공간 싸움'이다. MLB 통계 전문 사이트 ‘브룩스베이스볼’을 보면 류현진의 릴리스 포인트는 일정하게 형성된 것을 볼 수 있다. 9월 25일 뉴욕 양키스전 데이터를 보면, 그의 릴리스 포인트 높이는 구종과 관계없이 180㎝ 선에서 거의 일정하다. 수평 릴리스 포인트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몸에서 가장 가까운 포인트에서 던지는 커브(62.8㎝)와 가장 먼 체인지업(75.3㎝)의 차이는 최대 12.5㎝다. 이 정도 차이는 타자의 눈으로 식별하기 어렵다. 또 하나. 류현진의 릴리스 포인트 편차를 보고 폼이 흔들렸다고 보기 어렵다. 똑같은 폼으로 던져도 하이 패스트볼이나 커브를 던질 때는 공을 조금 일찍 놓기 때문이다. 타자의 몸쪽과 바깥쪽을 번갈아 공략할 때도 팔 각도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투구 폼은 같고, 내딛는 발의 방향이 몇㎝ 달라지는 것이다. 류현진은 그런 수준에서 피칭하고 있다. 2020년 류현진은 리그와 홈구장이 바뀐 상황에서도 일정한 릴리스 포인트를 형성했다. 또 투구 템포의 차이가 거의 없고, 백스윙 때 디셉션(공을 숨기는 동작)이 뛰어나다. 타자 입장에서는 미리 준비할 게 별로 없다. 스윙하기도 전에 타자의 승률이 낮아지는 것이다. 여기에 류현진처럼 좋은 폼으로 정확하게 던졌다면 공은 깜깜한 터널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타자의 0.045초를 훔칠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투수는 강속구 없이도 타자를 압도할 수 있다. 매덕스의 나이가 30대 후반이었던 2000년대 초, MLB는 배리 본즈(56)의 시대였다. 그는 2000년 이후 4년 동안 무려 213홈런을 때렸다. 금지 약물 복용 사실로 인해 얼룩지긴 했지만 본즈는 MLB 통산 최다 홈런(762개)을 기록한 강타자다. 본즈의 최전성기(2000~2003년)를 매덕스는 피안타율 0.222(18타수 4안타)로 막았다. 홈런은 하나도 내주지 않았다. 본즈는 훗날 방송 인터뷰에서 “매덕스는 0볼-2스트라이크에서 (3구 삼진을 잡겠다고) 들어온다. 그가 파워피처가 아니면 누가 파워피처인가”라고 되물었다. 매덕스와 본즈의 대결을 보면, 류현진과 마이크 트라우트(29·LA 에인절스)가 떠오른다. 지난해 류현진 피칭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6월 10일 에인절스전에서 트라우트를 세 번이나 잡은 장면이었다. 1회 직선타에 이어, 3회에는 삼진 처리했다. 류현진은 5회 2사 1·3루 위기에서 트라우트를 다시 삼진(컷 패스트볼)으로 잡아냈다. 현역 최고 타자인 트라우트를 통산 10번 상대해 무안타(4탈삼진)로 막아낸 류현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배트를 헛돌린 트라우트의 실망한 표정이 기억난다. 20대 나이에 통산 302홈런을 때렸고, MLB 최고 몸값(12년 총액 4억 2650만 달러·5000억원)을 받는 트라우트가 류현진의 ‘파워 피칭’에 압도당했다. 투수의 파워는 속도만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힘이 투수의 중요한 역량이다. 관련기사 ①강속구의 시대, 한국 야구는 왜 소외됐나 ②속도보다 지속 가능한 성장이 중요하다 ③강속구의 대응 무기는 정말 '어퍼컷'일까 ④플라이볼은 목표인가 결과인가 ⑤타격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난 타자를 믿는다 ⑥류현진은 '피치 터널'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2020.10.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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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에이전트’보라스, 코리안 빅리거에겐 ‘천사’

류현진의 계약을 성사시킨 스캇 보라스(67)는 '악마의 에이전트'로 통한다. 반면 그의 고객인 선수들에게는 '슈퍼 에이전트' 혹은 '천사'로 통한다.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최고 에이전트로 군림하고 있는 보라스도 한때 빅리그 진출을 꿈꾼 선수 출신이다. 세인트루이스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네 시즌을 뛰었다. 1974년 데뷔해 33경기에서 타율 0.274를 기록했다. 보라스는 플로리다 스테이트 리그에서 타율 8위에 오른 적도 있으나, 부상으로 일찍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로펌에서 근무하다 선수 경험을 살려 본격적으로 스포츠 에이전트 업무에 뛰어들었다. 야구 선수로는 실패한 마이너리거였지만, 에이전트로는 최고의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이내 메이저리그 슈퍼 에이전트로 입지를 넓힌 그는 수십 년째 업계 최고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가 설립한 보라스 코퍼레이션에는 약 80여 명이 직원이 일한다. 스카우트와 피지컬 트레이너, 스포츠 심리학자는 물론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한 컴퓨터 엔지니어, MIT 출신 경제학자 등도 그의 사무실에 근무한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토론해 고객(선수)에게 유리한 정보를 모아 보고서를 만들고, 이를 협상의 토대로 이용한다. 보라스는 협상력이 뛰어나다. 대형 선수를 고객으로 많이 보유하고 있어, 이를 협상의 전략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구단을 압박하고, 심리전을 이용해 일부러 계약을 늦추면서 구단의 애를 태우는 벼랑 끝 전술을 사용한다. 또한 구단 간 경쟁을 부추겨 선수들의 몸값을 올리는데 능통하다. 그가 '악마의 에이전트'로 불리는 이유다. 어쨌든 고객이 원하는 계약을 잘 성사시키는 만큼 거물급 선수들이 그에게 몰린다. 과거 그레그 매덕스, 알렉스 로드리게스, 케빈 브라운부터 현재 스트라스버그, 콜 등 당대 최고 스타플레이어의 계약을 성사시킨 그다. 보라스가 입지를 넓히면서 MLB 연봉도 크게 늘어난 점도 났다. 구단에는 악명 높은 에이전트지만, 선수들에게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거액을 안겨주는 보라스는 친절하게(?) 훈련 환경까지 제공한다. 나성범(NC)은 올 시즌 부상으로 수술을 한 뒤, 보라스 스포츠 트에이닝 인스티튜트(BSTI)에서 재활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나성범은 메이저리그 진출을 타진하기 위해 일찌감치 보라스와 에이전트 계약을 맺고 손을 맞잡았다. 이번 겨울 보라스의 진가가 다시 한번 드러났다. 23일 현재 올 시즌 메이저리그 FA 최다 총액 TOP 5 중 네 건을 그가 성사시켰다. 역대 FA 투수 중 계약 총액과 연평균 금액 신기록을 쓴 게릿 콜(뉴욕 양키스, 9년 총 3억2400만 달러) 월드시리즈 MVP 스티븐 스트라스버그(워싱턴, 7년 2억4500만 달러) 앤서니 렌던(LA 에인절스, 7년 2억4500만 달러) 등이 해당한다. 총액 기준으로 이번 FA 시장에서 5위에 오른 류현진의 에이전트 역시 보라스다. 류현진이 보라스의 고객 중 네 번째로 많은 돈을 챙기게 됐다. 최근 새롭게 행선지를 찾은 마이크 무스타커스(4년 6400만 달러)와 댈러스 카이클(3년 5500만 달러) 또한 보라스의 주요 고객이다. 미국 'USA 투데이'는 보라스가 따낸 계약에 주목했다. '보라스가 이번 겨울 성사시킨 계약 총액이 10억2200만 달러'라고 전했다. 우리 돈 1조1900억 원이다. 보통 에이전트가 챙기는 중계 수수료를 총 계약 규모의 5%라고 했을 때, 이번 겨울 수수료만 595억원을 챙긴 것이다. 류현진의 1년 연봉을 두 배 이상 훌쩍 뛰어넘는 큰 액수다. 특히 코리안 메이저리거의 대형 FA 계약은 모두 보라스가 안겼다. 그래서 국내 팬들에게도 더욱 친숙한 편이다. 박찬호는 2001년 LA 다저스에서 텍사스로 옮기며 5년 6500만 달러에, 추신수는 2013년 텍사스와 7년 1억3000만달러에 계약했다. 류현진은 2012년 말 미국 진출 당시부터 보라스를 에이전트로 선임했고, 당시 포스팅 금액을 제외하고 다저스와 6년 3600만 달러의 좋은 조건에 사인했다. 보라스는 이번에도 류현진에게 4년 8000만 달러의 대형 계약을 안겼다. 공교롭게도 보라스는 박찬호(12월 21일)와 추신수(12월 22일) 류현진(12월 23일)에게 모두 대형 '크리스마스 선물'을 선사했다. 이형석 기자 2019.12.24 06:00
야구

[허재혁의 B트레이닝] 운동선수가 마시는 술…'독'에 가까운 이유

1998년 5월 18일(한국시간) 미네소타를 상대로 메이저리그 역대 15번째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데이비드 웰스(당시 뉴욕 양키스)는 전날 마신 술기운으로 공을 던졌다고 한다. 웰스는 '알코올 커브를 주 무기로 사용하는 기교파 투수'라는 재밌는 말이 떠돌 정도로 메이저리그의 유명한 주당 중 한 명이었다.웰스처럼 술을 좋아하는 운동선수는 꽤 많다. 강도 높은 훈련과 경기 출전을 병행하는 상황에서도 술을 마신다. 그래서 최고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시간과 땀을 쏟아붓고도 술로 인해 그동안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기도 한다. 술은 운동선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결론부터 말하면 술은 담배와 더불어 운동선수의 최대 적이다. 켄터키 대학의 경기력 향상 전문가인 그렉 와이트 교수는 "레드와인 등의 술 한 잔은 심장병 예방에 좋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지만, 운동선수에게는 약간의 술도 훈련 효과에 영향을 줄 정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우선 술은 근육 성장을 방해한다. 주기적인 음주는 체내 단백질 합성 능력을 떨어트려 근육 성장을 감소시킨다. 근력과 근육을 늘리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장에서 무거운 덤벨을 들고 땀을 흘리는데 음주는 이와 정반대되는 행동이다. 두 번째로 술에든 알코올 성분은 강력한 이뇨제로 우리 몸에서 탈수와 전해질의 불균형을 일으킨다. 이는 근육 경련과 햄스트링·종아리·복사근 등의 근육 부상 위험을 높인다.세 번째로 운동선수에게 수면을 통한 회복은 매우 중요하다. 바로 근육 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잠을 자는 동안 근육 성장에 필요한 성장 호르몬을 분비하는 데 술은 숙면을 방해해 체내 성장 호르몬 분비를 저하한다. 술은 성장 호르몬 분비를 최대 70%까지 떨어트릴 수 있다고 한다.술의 문제점은 또 있다. 웨이트 트레이닝은 체내 내분비 시스템을 통해 근육 성장에 필요한 테스토스테론이라는 남성 호르몬을 분비시킨다. 하지만 술은 웨이트 트레이닝과 반대로 테스토스테론 분비 촉진을 방해한다. 웨이트 트레이닝 후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은 그야말로 '독'에 가깝다.마지막으로 술은 그 자체로도 영양가가 전혀 없다. 단백질과 탄수화물에는 1g당 4㎈, 지방에는 9㎈가 들어가 있지만, 알코올은 1g당 7㎈다. 칼로리는 지방보다 오히려 낮다. 하지만 음식 섭취를 통한 지방은 우리 몸이 에너지원으로 쓸 수 있지만, 알코올은 우리 몸과 근육이 에너지원으로 쓸 수 없는 '빈 칼로리(empty calorie)'다. 그래서 술에서 오는 칼로리는 그대로 몸에서 지방으로 축적된다. 애주가 중에 배 나온 사람이 많은 이유다. 이 외에도 술은 우리가 음식을 통해 받는 영양분의 체내 흡수 능력을 떨어트린다. 특히 비타민 B1·B2, 비타민B 복합체의 하나인 엽산, 아연 등은 에너지 대사에 필수적인 영양소들로 신체 활동이 많은 운동선수에게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술은 이 영양소들의 흡수를 방해한다. 당연히 빨리 지쳐 경기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 구단의 영양사인 줄리안에 의하면 술은 순간 반응력·협응력·근력·파워·스피드·지구력 등의 운동 능력을 최대 72시간까지 떨어트린다고 한다. 술 마신 다음 날 퍼펙트게임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 웰스를 보고 술은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국보급 투수' 선동열과 '농구 대통령' 허재는 소문난 주당이면서 각 종목에서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줬다. 이는 소수의 사례일 뿐 실제로 많은 선수가 술로 인해 경기력이 떨어져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메이저리그 통산 325승을 기록한 그렉 매덕스는 시즌 중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2016시즌 내셔널리그 MVP 수상자인 크리스 브라이언트(시카고 컵스)는 자기 관리를 위해 술을 입에 대지도 않는다고 한다.직업 특성상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운동선수에게 술 한 잔은 '스트레스 해소법'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와 음악 감상, 책 읽기 등 다른 스트레스 해소법을 찾는 것이 커리어에 더 큰 도움이 된다. 운동선수라는 직업은 평생토록 할 수가 없다. 지금 잠깐의 즐거움을 참고 은퇴 후에 실컷 즐겨도 충분하다. 술로 얻는 즐거움은 일시적이지만 훌륭한 커리어를 쌓아 얻는 즐거움은 영원하다. 허재혁 시카고 컵스 마이너리그 트레이너정리=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ongang.co.kr 2019.08.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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