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투수들의 피칭을 지켜봤다. 그 가운데 한 명인 왼손 투수 스티브 에이버리는 시속 153㎞가 넘는 빠른 공을 던졌다. 그의 커브는 크게 휘었다. 아주 위력적이었다. 다른 한 명은 오른손 투수였다. 포심 패스트볼, 투심 패스트볼, 슬라이더, 체인지업을 던졌다. 그는 대학생 투수 수준보다는 나아 보였다. 그러나 특별하지 않았다. 위력적이지 않았다.”
세이버메트릭스(야구 통계학) 전문 사이트 ‘베이스볼 프로스펙터스’가 2017년 게재한 기사의 리드 부분이다. 포수보다 3~4m 뒤에 앉은 기자는 두 투수의 살아 있는 공을 봤다. 왼손 투수는 무서울 만큼 강해 보였고, 오른손 투수는 그저 그랬다고 한다. 그 기자가 ‘대학생 수준보다 조금 낫다’고 평가한 투수는 그레그 매덕스(54)이다.
매덕스는 메이저리그(MLB) 역사상 최초로 4년 연속(1992~95년) 사이영상을 받았다. 17년 연속(1988~2004년) 15승 이상, 20년 연속 10승(1988~2007년) 이상을 기록하는 등 MLB 통산 355승(227패 평균자책점 3.16)을 거둔 전설적인 투수다.
기자는 참 이상했을 것이다. 매덕스의 피칭이 겨우 이거라고? 뭔가 특별한 무기를 숨긴 것 아닐까? 이렇게 의심했을 것이다. 매덕스는 기자에게 “이것이 내가 가진 전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설명을 이어갔다.
“변화구는 크고 빠르게 꺾이는 게 중요하지 않다. 내 변화구는 늦게, 빨리 꺾이는(late quick break) 것이 목표다. 공이 많이 꺾이기 위해서는 방향을 일찍 바꿔야 한다. 그만큼 타자에게 생각하고 반응할 시간을 준다. 투구의 변화가 늦게 일어나면 타자가 대응할 시간이 적어진다. 투구에 대한 정보를 타자에게 최대한 늦게 줘야 한다.”
이어 매덕스는 “모든 투구는 서로 가까워 보여야 한다. 투수가 던지는 모든 공이 홈플레이트를 향하는 ‘우유 기둥(column of milk)’처럼 보이게 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모든 투구가 가까워 보인다는 건 패스트볼과 변화구의 궤적 차이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뜻이다. 구종에 따라 공의 궤적은 당연히 달라진다. 그러나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어느 지점까지는 비슷하게 비행해야 한다는 게 매덕스의 주장이었다.
그가 비유한 ‘우유 기둥’을 떠올려 보자. 우유를 컵에 따르면, 기둥처럼 한 줄로 내려오다가 점점 갈라질 것이다. 야구공도 흰색이니까 여러 투구를 겹쳐 놓는다면 우유 기둥과 비슷한 모양이 될 것이다.
매덕스는 크게 꺾이는 변화구보다 패스트볼과 비슷한 궤적의 변화구를 던지려고 노력했다. ‘타자에게 보이는 것’보다 ‘타자를 속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매덕스의 피칭을 스피드와 변화 각만으로 감상한다면, 기자가 그랬던 것처럼 ‘대학생 투수보다 조금 나은 정도’라고 오판할 수 있다. 그러나 타석에 선 MLB 선수들은 매덕스의 공을 20년 가까이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매덕스는 모든 공을 ‘비슷한’ 궤적으로 던지려 노력했다. 그러나 ‘똑같은’ 공은 하나도 던지지 않았다. 타자들은 매덕스의 공을 칠 수 있다고 배트를 휘둘렀겠지만, 대부분 빗맞거나 헛스윙을 했다.
매덕스는 타자의 성향과 심리·볼카운트 등을 고려하면서 공을 다양하고, 현란하게 던졌다. ‘우유 기둥’ 안으로 모든 공을 밀어 넣었다. 기둥이 넓게 퍼진 뒤에는 타자가 이미 속은 뒤였을 것이다.
매덕스가 ‘우유 기둥’이라고 이름 붙인 이 투구 이론은 오늘날 피치 터널과 다르지 않다. 그는 이미 20~30년 전에 모든 투구 궤적은 최대한 가까워야 한다는 걸 알았고, 이를 자신의 피칭에 적용했다.
매덕스 별명 중 가장 유명한 건 ‘컨트롤의 마법사’다. 그의 포심 패스트볼 대부분은 시속 140㎞대였다. 그러나 무브먼트가 뛰어난 투심 패스트볼로 타자를 압도했다. 30대 나이가 되어 구위가 떨어진 뒤 매덕스는 컷 패스트볼, 체인지업 등을 추가했다.
구종이 다양해진 덕분에 매덕스의 전성기는 더 오래 이어졌다. 만 41세에도 샌디에이고 유니폼을 입고 14승을 올렸다. 매덕스의 피칭을 다양성과 정확성으로만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그는 타자를 속일 줄 알았다. 그 핵심 기술이 20세기의 ‘우유 기둥’, 21세기의 ‘피치 터널’이다.
매덕스가 ‘우유 기둥’을 말한 이유
매덕스의 스토리는 류현진(33·토론토)과 닮았다. 지난해 LA 다저스에서 뛰었던 류현진은 5월 8일 애틀랜타를 상대로 9이닝 93개의 공을 던지며 4피안타 무사사구 6탈삼진 무실점 완봉승을 거뒀다. 외신들은 “류현진이 ‘매덕스 게임’을 완성했다”고 썼다. ‘매덕스 게임’이란 투구 수 100개를 넘기지 않고 9이닝을 완봉으로 막아낸 경기를 뜻한다. 매덕스가 투구 수 100개 미만으로 완봉승을 기록한 경기는 통산 13차례(완봉승 35번)나 된다.
류현진이 지난 시즌 중반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할 때, 여러 외신과 MLB 관계자들은 그를 매덕스와 비교했다. ESPN “새로운 그렉 매덕스? 건강한 류현진이라면 거의 그렇다”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류현진과 ‘매덕스 게임’을 함께 이룬 포수가 러셀 마틴이었다. 그는 2006년과 2008년 매덕스와 배터리를 이룬 적이 있다. 마틴은 “류현진이 던진 공 93개 중 58개를 받을 때 미트를 움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만큼 제구가 완벽했다는 뜻이었다. 러셀은 류현진의 투구는 매덕스를 떠올린다고 말했다.
난 이런 말들이 류현진에 대한 많은 평가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특급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매덕스의 투구에는 힘과 기술뿐 아니라 전략과 통찰력까지 담겨있기 때문이다. 우리 선수들이 시속 100마일(161㎞) 이상의 공을 뿌리는 아롤디스 채프먼(뉴욕 양키스)이 될 확률보다 류현진처럼 성장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지난 칼럼에서 피치 터널의 원리에 대해 설명했다. 터널이라는 공간적인 개념뿐 아니라 시간적인 측면에서 이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버트 어데어 미국 예일대 명예교수의 저서 『야구의 물리학』은 투수와 타자의 ‘시간 싸움’을 잘 설명하고 있다.
투수판과 홈플레이트의 거리는 18.44m다. 투수가 스트라이드를 해서 공을 던지기 때문에 릴리스 포인트와 타자의 히팅 포인트의 거리는 약 17m다. 어데어 교수는 투수가 시속 145㎞의 패스트볼을 던진다고 가정했다. 이에 따라 타자가 해야 할 일을 시간별로 계산했다.
패스트볼이 17m를 날아가는 시간은 0.4초에 불과하다.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타자 시야에 들어오기까지 0.1초가 걸린다고 한다. 이후 타자가 공의 속도와 궤적을 파악하는데 0.075초가 더 필요하다.
이제 타자의 시간으로 가보자. 사람의 눈이 강한 빛에 반응해 깜빡하는 데 0.15초가 걸린다. 타자가 공을 보고 타격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면, 두뇌가 근육에 신호를 보내는 시간(0.03초)이 필요하다. 따라서 타자마다 차이는 있지만, 스윙에는 0.18초가 소요된다. 타자가 어프로치를 한 이후에도 투구를 보면서 스윙을 조금 수정하거나 멈출 순 있다. 그러나 타자가 스윙을 일단 시작했다면, 타이밍과 궤적은 거의 정해졌다고 봐야 한다.
다시 정리해 보자. 타자가 투구를 파악하는 최소 시간(0.175초)과 타자가 스윙하는 최소 시간(0.18초)이 필요하다. 두 시간을 더하면 0.355초다. 이론상 투구의 비행시간인 0.4초 중에서 0.045초의 시간이 타자에게 더 있는 셈이다. 이건 판단하는 시간이다. 이 찰나의 시간에 타자는 스윙 여부를 결정한다.
타자가 투구의 궤적을 예측했다면 0.045초가 필요 없을 수 있다. 타자들이 시속 145㎞의 패스트볼은 물론 160㎞의 강속구도 공략하는 이유다.
투수 입장에서는 타자에게 주어진 0.045초를 최소화하거나 없애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투수가 더 빠른 공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160㎞ 이상의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심지어 그것조차 완벽한 방법이 아니다.
타자의 물리적인 시간을 빼앗을 수 없다면? 타자의 시야를 흔들어서 타자의 시간을 훔쳐야 한다. 그 방법이 바로 스트라이크와 볼을 구분하기 어렵게 공을 던지는 것이고, 피치 터널을 최대한 길게 만드는 것이다.
류현진은 시간과 공간을 지배한다
긴 터널을 만드는 데 마법이 필요한 건 아니다. 이전 칼럼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터널에 들어가기 전에 투구의 방향과 속도는 이미 정해져 있다. 안정적인 폼으로 일정한 릴리스 포인트를 만드는 게 피치 터널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 재능은 강속구를 던지는 것보다 더 귀중하다. 속도만이 무기가 아니다. 류현진처럼 시간과 공간을 잘 활용하면 세계 최고의 투수가 될 수 있다.
시간을 이용한다는 말은 일정한 템포로 던진다는 걸 뜻한다. 어떤 공을 어디에 던져도 폼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 같지만, 수준급 투수에게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는 동작이 빨라지는 경향이 있다. 커브 같은 느린 변화구를 던질 때는 템포가 느려진다. 투수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피칭 템포가 완벽하게 똑같은 투수는 없다. 타자는 투수의 템포에 타이밍을 맞춘다. 눈썰미가 좋다면 구종도 예측할 수 있다. 투구 템포는 데이터로 나오지 않지만, 타자가 미묘하게 느낄 순 있다.
매덕스나 류현진도 동작의 템포가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타자의 시간을 빼앗는 이들의 능력은 완벽에 가깝다.
피치 터널은 '공간 싸움'이다. MLB 통계 전문 사이트 ‘브룩스베이스볼’을 보면 류현진의 릴리스 포인트는 일정하게 형성된 것을 볼 수 있다. 9월 25일 뉴욕 양키스전 데이터를 보면, 그의 릴리스 포인트 높이는 구종과 관계없이 180㎝ 선에서 거의 일정하다. 수평 릴리스 포인트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몸에서 가장 가까운 포인트에서 던지는 커브(62.8㎝)와 가장 먼 체인지업(75.3㎝)의 차이는 최대 12.5㎝다. 이 정도 차이는 타자의 눈으로 식별하기 어렵다.
또 하나. 류현진의 릴리스 포인트 편차를 보고 폼이 흔들렸다고 보기 어렵다. 똑같은 폼으로 던져도 하이 패스트볼이나 커브를 던질 때는 공을 조금 일찍 놓기 때문이다.
타자의 몸쪽과 바깥쪽을 번갈아 공략할 때도 팔 각도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투구 폼은 같고, 내딛는 발의 방향이 몇㎝ 달라지는 것이다. 류현진은 그런 수준에서 피칭하고 있다.
2020년 류현진은 리그와 홈구장이 바뀐 상황에서도 일정한 릴리스 포인트를 형성했다. 또 투구 템포의 차이가 거의 없고, 백스윙 때 디셉션(공을 숨기는 동작)이 뛰어나다. 타자 입장에서는 미리 준비할 게 별로 없다. 스윙하기도 전에 타자의 승률이 낮아지는 것이다.
여기에 류현진처럼 좋은 폼으로 정확하게 던졌다면 공은 깜깜한 터널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타자의 0.045초를 훔칠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투수는 강속구 없이도 타자를 압도할 수 있다.
매덕스의 나이가 30대 후반이었던 2000년대 초, MLB는 배리 본즈(56)의 시대였다. 그는 2000년 이후 4년 동안 무려 213홈런을 때렸다. 금지 약물 복용 사실로 인해 얼룩지긴 했지만 본즈는 MLB 통산 최다 홈런(762개)을 기록한 강타자다. 본즈의 최전성기(2000~2003년)를 매덕스는 피안타율 0.222(18타수 4안타)로 막았다. 홈런은 하나도 내주지 않았다.
본즈는 훗날 방송 인터뷰에서 “매덕스는 0볼-2스트라이크에서 (3구 삼진을 잡겠다고) 들어온다. 그가 파워피처가 아니면 누가 파워피처인가”라고 되물었다.
매덕스와 본즈의 대결을 보면, 류현진과 마이크 트라우트(29·LA 에인절스)가 떠오른다. 지난해 류현진 피칭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6월 10일 에인절스전에서 트라우트를 세 번이나 잡은 장면이었다. 1회 직선타에 이어, 3회에는 삼진 처리했다.
류현진은 5회 2사 1·3루 위기에서 트라우트를 다시 삼진(컷 패스트볼)으로 잡아냈다. 현역 최고 타자인 트라우트를 통산 10번 상대해 무안타(4탈삼진)로 막아낸 류현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배트를 헛돌린 트라우트의 실망한 표정이 기억난다. 20대 나이에 통산 302홈런을 때렸고, MLB 최고 몸값(12년 총액 4억 2650만 달러·5000억원)을 받는 트라우트가 류현진의 ‘파워 피칭’에 압도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