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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이토 쓰토무의 혹평 “한일 격차 30년 벌어졌다. 선후배 야구 끝내라” [창간 54]

일간스포츠가 창간 54주년을 맞아 '레전드의 일침'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202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등에서 드러난 한국 야구에 대한 부진 이유를 되짚어 보고, 개선 방향을 논의하자는 취지입니다. 본지는 하리모토 이사오(한국명 장훈), 이토 쓰토무, 다카쓰 신고, 김성근 등 한국과 일본 야구에 정통한 레전드부터 일침(一針)을 들었습니다. 한국 야구가 다시 도약하길 바라는 이들의 ‘비수 같은 훈수’를 독자 여러분과 야구 관계자들에게 전합니다. 한국 야구대표팀이 제2회 WBC 결승에서 일본과 맞붙은 2009년 3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 이토 쓰토무는 당시 일본 대표팀의 수석코치였다. 최근 본지와 도쿄에서 만난 그는 "정말 힘든 승부였다. 앞서 1‧2라운드 네 차례 대결에서 2승 2패로 맞서면서 일본 스태프는 '어떻게 하면 한국을 이길까'라는 생각만 했다"며 "연장전 끝에 일본이 이기기는 했지만, 당시 한국 야구의 기술력, 정신력은 정말 대단했다. 류현진‧봉중근‧임창용 등이 주축이었던 마운드는 역대 최고였다"고 떠올렸다.일본 프로야구(NPB) 전설적인 포수 출신 이토는 이후 한국 야구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2011년 LG 트윈스 인스트럭터, 2012년 두산 베어스 수석 코치를 맡았다. 2004년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을 맡아 일본시리즈 우승까지 경험한 그로서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이토는 "10년 전 한국 야구는 일본을 거의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그런 그에게 지난 3월 2023년 WBC는 오히려 상당한 충격이었다. 호주에 7-8로 진 한국은 일본에 2-13으로 대패,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이토는 "한‧일 야구의 격차가 30년 정도로 벌어진 것 같다. 일부 선수는 뛰어나지만, 대체적으로는 일본과 큰 차이가 난다. 선수 기량도 그렇지만, 구단 운영이나 구장 환경, 리그 행정 등 모든 면에서 일본에 뒤처졌다"고 혹평했다. 기본기 위에 파워를 더한 일본이토는 "일본 야구는 지난 몇 년 동안 상당히 발전했다. 다르빗슈 유, 오타니 쇼헤이 같은 선수가 메이저리그(MLB)에서 크게 성공하면서 젊은 선수들에게 동기부여가 됐다. 미국을 넘어 세계 최고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2023 WBC는 일본 선수들의 힘과 체격에 눌린 대회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한국은 파워로 일본 야구의 정밀한 기술을 상대했다. 그러나 이제 오타니(1m93㎝), 다르빗슈(1m96㎝) 등 빅리거는 물론 일본 리그(NPB)의 사사키 로키(1m90㎝) 무라카미 무네타카(1m88㎝) 등이 한국을 힘으로 압도했다. 이토는 "바로 그게 일본이 달라진 점이다. MLB를 통해 새로운 훈련법을 받아 들였고, 단백질보충제 등 식이요법도 발달했다. 그 결과 벌크업에 성공한 것"이라며 "요즘 일본 선수들은 시즌이 끝나면 마냥 쉬지 않는다. 소속팀이 달라도 합동훈련을 한다. '세계제일'이 되고 싶은 것"이라고 강조했다.일본 야구의 발전 동력은 '융복합'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크게는 MLB 선수들과 교류하고, 작게는 일본의 센트럴리그(요미우리, 한신, 주니치, 야쿠르트, 히로시마, 요코하마)와 퍼시픽리그(오릭스, 롯데, 소프트뱅크, 라쿠텐, 세이부, 닛폰햄)가 경쟁하는 것이다. 이토는 "몇 년 전 퍼시픽리그에 홈런 타자와 강속구 투수들이 대거 등장했다. 그런 흐름이 기교 위주의 승부를 하는 센트럴리그로 옮겨졌다. 단단한 기본기 위에서 힘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이토는 경쟁 의지와 도전 정신의 결여가 한국 야구의 퇴보를 불러 왔다고 진단했다. 그는 "2023년 한국 대표팀에 (30대 중반인) 김광현과 양현종이 포함된 걸 보고 놀랐다. 그만큼 젊은 선수가 없다는 거다. 구원 등판한 몇몇 투수는 솔직히 말해서 '저 선수가 프로인가?’'는 생각이 들었다. 기술도 부족해 보였지만,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WBC 결승전을 앞두고 오타니가 일본 동료들에게 했던 연설이 화제였다. MLB 스타들이 즐비한 미국 대표팀과의 경기를 앞두고 그는 "저들을 동경한다면, 저들을 넘어설 수 없다. 오늘은 존경을 접어두고 승리만을 생각하자"고 팀메이트를 독려했다. 이토는 "그 연설이 울림을 줬다. 달리 생각하면, 일본을 위협했던 한국이 2023 WBC에서는 일본을 동경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선 이길 수 없다"고 부연했다.지난 10년 일본 야구가 '빅스텝'을 밟으며 MLB를 따라잡는 동안 한국은 오히려 뒷걸음질했다. 이토는 "일본은 탄탄한 기본기 위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다. 10년 전까지 일본 야구를 배우고, 일본과 경쟁했던 한국이 언제부터인가 미국만 좇기 시작했다. 치열한 노력과 충분한 기본기 없이 미국을 따라만 하니까 잘 될 수 있겠는가. 아시아인의 체격과 스타일은 미국과 다르지 않나. 한국 야구는 거기서 길을 잃은 것 같다"고 일침을 가했다. 한국은 왜 교류도, 도전도 않나이토는 "한국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09년 WBC 준우승을 했던 시기 KBO리그도 정말 강했다. 김성근 (당시 SK 와이번스) 감독이 일본 야구의 세밀함과 한국 야구의 역동성을 더해 좋은 플레이를 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 야구가 그때보다 나은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1990년대 한일 슈퍼게임을 떠올려 보자. 선동열 같은 특출한 선수를 제외하면 한국 대표팀 내에서도 다른 선수들의 기량은 떨어졌다. 2010년 전후로 한국 야구가 전체적으로 강해졌다고 느꼈으나, 지금은 3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KBO리그 마운드가 강해지면 그들을 상대하는 타자들의 기량도 함께 향상될 것이다. 현재 한국 야구의 문제는 투수력”이라며 아쉬워했다.이토는 "한국에서 코치를 했을 때 경험했던 선수들의 열정을 기억한다. 구단과 코칭스태프가 그들을 제대로 지원해줬는지는 돌아봐야 한다. 한국은 '선후배 야구'를 타파해야 한다. 특정한 인맥이 팀을 장악하고, 그 위계가 대단하더라. 선수가 코치에게, 코치가 감독에게 다른 의견을 내지 못하는 문화가 있었다. 감독이 답을 정해놓으면, 다들 따라야 하는 거다"라면서 "일본 센트럴리그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면 발전하지 못한다. 센트럴리그도 그걸 극복했기에 발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KBO리그 선수가 NPB에서 뛴 건 김태균(롯데) 오승환(한신) 이대호(소프트뱅크) 등이 마지막이다. 2015년 이후 일본 리그에 도전하는 선수가 없었다. 한국 선수들의 기량이 떨어진 이유도 있고, KBO리그에서 받는 몸값이 일본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사이 KBO리그는 고립됐고, 약화했다. 이토가 KBO리그의 변화를 바라는 이유다.이토는 "변화하려면 교류해야 하고 경쟁해야 한다. 융복합에는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한국은 선수층이 얇아 고민이라는 기자의 말에) 그렇다면 아시아 쿼터(외국인 선수 제한과 별도로 아시아의 다른 국적 선수를 보유할 수 있는 제도. 축구‧농구‧배구 등에서 도입했거나 시행 예정이다) 같은 제도도 고려해 볼만 하지 않나. 과거 재일동포 선수들이 KBO리그에 자극제가 됐듯, 경쟁이 치열해지면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묻고, 답하고, 도전하고, 경쟁해야 한다. 한국 야구가 다시 강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도쿄(일본)=김식 기자◆이토 쓰토무(伊東勤, 1962년 8월 29일~)NPB에서 22년 동안 뛰며 퍼시픽리그 14차례 우승, 일본시리즈 8차례 우승을 이끈 포수. 1982년 세이부 라이온스에 입단, 뛰어난 포구 능력과 공 배합을 앞세워 3년 차에 주전 포수로 성장했다. 2003년 마흔한 살 나이에 은퇴할 때까지 세이부 안방을 지키며 골든글러브를 7차례나 받았다. 타자로서는 통산 타율 0.247, 156홈런을 남겼다. 선수 은퇴 직후인 2004년 세이부 감독을 맡아 그해 퍼시릭리그와 일본시리즈를 제패했다. 2011년 LG 트윈스 인스트럭터, 2012년 두산 베어스의 수석 코치를 맡아 KBO리그를 경험했다. 2013년부터 5년간 NPB 롯데 마린스 지휘봉을 잡았고, 현재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2023.09.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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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장훈이 두 번 놀랐다. “한국 저변 취약, 연봉은 너무 높다” [창간 54]

일간스포츠가 창간 54주년을 맞아 '레전드의 일침'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202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등에서 드러난 한국 야구에 대한 부진 이유를 되짚어 보고, 개선 방향을 논의하자는 취지입니다. 본지는 하리모토 이사오(한국명 장훈), 이토 쓰토무, 다카쓰 신고, 김성근 등 한국과 일본 야구에 정통한 레전드부터 일침(一針)을 들었습니다. 한국 야구가 다시 도약하길 바라는 이들의 ‘비수 같은 훈수’를 독자 여러분과 야구 관계자들에게 전합니다.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이 깜짝 놀라 다시 물었다.“응? 뭐라고요? 한국에 고교 야구팀이 몇 개라고?”8월 어느날. 일본 도쿄 시내의 한 호텔에서 만난 그는 어떤 주제로 대화해도 차분했다. 불과 2년 전까지 야구 평론가로서 날카로운 독설을 날린 그였지만, 지금은 한결 온화해졌다. 배트와 마이크를 내려놓은 지금은 가끔 공원에 나가 어린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그런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조를 높인 순간이 있었다. 한국 야구의 저변을 얘기할 때였다."한국에 고교 야구팀은 몇 개인가? 뭐? 60개를 넘은지 오래되지 않았다고? (2023년 8월 기준 96개) 말도 안 된다. 프로야구가 있는 나라에서 말이지. 일본에는 3000개(2022년 일본고교야구연맹 기준 3857개)가 넘는 고교팀이 있다. 그래야 프로(일본 프로팀 12개)에서 경쟁이 된다."위기에 빠진 한국야구에 대해 본지가 고언(苦言)을 구하자 장훈은 어렵게 설명하지 않았다. 한국 야구의 저변을 걱정했다. 10/96 vs 12/3857의 차이지난 3월 열린 제5회 WBC에서 일본은 7전 전승을 거두며 우승했다. 일본은 2006년과 2009년 1,2회 대회에서 챔피언에 오른 바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도미니카공화국 등을 대표한 메이저리그(MLB) 선수들은 지금처럼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예선전부터 한국과 팽팽한 라이벌전을 벌였다. 1,2회 WBC는 사실상 한국과 일본이 주도했다. 2023년 대회에서 일본은 한국과의 격차를 크게 벌리는 동시에, 미국을 힘으로 제압했다. 야구로 ‘세계제일’을 노래하던 일본의 꿈이 이뤄졌다. 장훈은 "일본 선수들을 보라. 충분히 우승할 수 있는 멤버였다. 오타니 쇼헤이, 다르빗슈 유 등 미국에서 최고인 선수들이 그대로 일본 대표팀에 왔다. 우승한 이유는 바로 그거"라고 말했다.2023년 일본 대표팀에는 오타니(LA 에인절스)와 다르빗슈(샌디에이고 파드리스)뿐 아니라 요시다 마사타카(보스턴 레드삭스) 라스 눗바(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등 쟁쟁한 빅리거가 참가했다. 게다가 야마모토 요시노부(오릭스 버팔로즈) 사사키 로키(롯데 마린스) 무라카미 무네타카(야쿠르트 스왈로즈) 등 일본 프로야구(NPB) 소속이지만, 미래의 메이저리거도 여럿 있었다. 일본 대표팀의 평균 나이는 27.3세로 WBC 대표팀 사상 최연소였다.한국에도 김하성(샌디에이고) 토미 에드먼(세인트루이스) 등 빅리거 2명이 있었다. 김현수‧김광현‧양현종 등 MLB를 경험한 선수도 적잖았다. 그러나 대표팀 구성 밀도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투수들의 기량이 크게 떨어졌다. 한국 대표팀 평균 나이는 29.2세였다.한국‧일본 저변의 차이가 두 대표팀의 차이를 만들었고, 그게 곧 실력 차이였다. 2006년과 2009년 WBC에서 한국이 일본을 꽤 따라잡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게 장훈의 생각이었다.장훈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나라다. 과거 일본에 뒤처졌으나 이제 일본을 많이 따라잡았다. 한류 등 문화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세계 일류 국가가 됐다"고 극찬했다. 이 말을 하는 과정에서 그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월드클래스'라는 표현을 썼다.기자는 "한국 스포츠도 월드클래스가 됐나"라고 물었다. 장훈은 잠시 고민하더니 "일단 인구(한국 약 5100만명, 일본 1억2000만명)에서 큰 차이가 난다. 한국의 스포츠 저변도 (일본에 비해) 그만큼 허약하다. 아직 (스포츠에서 월드클래스는) 아닌 거 같다"고 답했다. 장훈은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한국에서 야구를 잘하면 선수들이 미국(MLB)에 가는 거다. 하긴, 연봉을 열 배쯤 더 주니까 나도 미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 거 같기는 하다. 그래도 자국 리그 보호를 위해 한국야구위원회(KBO)가 고민해야 한다.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선수는 2년 정도 자국 리그에서 뛰지 못하게 하던지…"라며 씁쓸해 했다. 장훈이 제안한 것과 비슷한 규정이 실재한다. KBO 규약 제107조 조항에 따르면, 한국에서 고등학교 이상을 재학하고 한국 프로구단 소속 선수로 등록한 사실 없이 외국 프로구단과 선수계약을 체결한 선수는 외국 프로구단과 선수 계약이 종료한 날부터 2년간 KBO 소속 구단과 선수 계약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아마추어 선수에 해당하고, 프로 선수는 해외리그에서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프로 선수의 이적을 막는 건 현재의 제도로는 어렵다. 그러나 KBO리그 보호 및 발전에 대해 한국 야구의 고민이 부족하다는 장훈의 충고는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한국 고연봉, 유지 가능한가?"장훈은 "일본 야구도 미국의 하위 리그로 전락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자국 리그를 보호하고 육성할 방법이 꼭 필요하다. 이러다가 100년 후에는 일본 야구가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한국에 비하면 인적‧물적 인프라가 훨씬 뛰어난 일본 야구도 우려할 만큼 우수 인재의 유출이 심각하다고 장훈은 보고 있다.인터뷰가 끝날 때쯤 장훈이 기자에게 "KBO리그 최고 연봉자는 돈을 얼마나 받나"라고 질문했다. KBO에 따르면 2023년 최고 연봉 선수는 구자욱(삼성 라이온즈‧20억원)이다. 그러나 FA 계약금을 포함한 실질적인 연봉킹은 지난겨울 두산 베어스로 돌아온 양의지(4년 총액 152억원)다.장훈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그는 "그렇게 높나? KBO리그 팀은 대부분 대기업이 운영하기 때문에 (일부) 선수들 연봉이 너무 높다. (시장이 더 큰) 일본에서는 각 팀 최고 연봉자가 5~6억엔(46억~55억원) 정도를 받는다. 일본 선수 연봉도 높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지금 같은 연봉 시스템에서 KBO리그가 안정적으로 운영될지 의문"이라고 전했다.2023년 NPB 최고 연봉자는 야마모토다. 그는 FA와 비(非)FA를 통틀어 가장 많은 6억5000만엔(58억원)을 받는다. 게다가 KBO리그와 달리 NPB의 연봉 상승 곡선은 가파르지 않다. 20년 전 최고 연봉이 이미 7억2000만엔(2003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로베르토 페타지니)이었다. 2021년에는 스가노 도모유키(요미우리)가 8억엔을 돌파한 바 있다. 이승엽(현 두산 베어스 감독)이 2007년 요미우리와 계약한 연봉도 6억5000만엔(4년 총액은 30억엔)이었다. 2023년 KBO리그 선수들의 평균 연봉은 1억4648만원(신인, 외국인 선수 제외)이다. 일본 선수들 평균 연봉 4468만엔(4억원, 외국인 선수)의 36% 수준이다. 리그의 연봉 격차는 큰 편이지만, 최상위 선수들 간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장훈은 KBO리그가 출범한 1982년부터 2005년까지 KBO 총재 특보를 맡았다. 각 구단을 돌며 타격 인스트럭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 프로야구 구조와 선수들 기술에 대해 잘 파악해온 인물이다.한국 야구의 개선점을 묻는 말에 장훈은 구체적인 답을 하길 꺼려했다. 최근에는 KBO리그 팀과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워 한 것이다. 대신 그는 한국 야구의 기형적인 구조, 즉 96개 고교팀이 10개 프로팀의 근간이라는 문제점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뿌리가 약하면 자생력이 강할 리 없고, 고른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비단 대표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년째 KBO리그에서 지적되고 있는 선수 간 기량‧연봉 격차가 심화하는 이유도 결국 약한 기반에서 비롯됐다는 걸 장훈과의 인터뷰를 통해 환기했다. 도쿄(일본)=김식 기자 ◆장훈(張本勳, 1940년 6월 19일~)NPB 통산 최다 안타(3085개) 기록자.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최고의 스타가 됐지만, 아직까지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1959년 NPB 도에이 플라이어스 입단해 신인왕을 차지했고, 197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 홈런왕 오 사다하루와 ‘O-H 타선’을 구축했다. 1981년 은퇴할 때까지 NPB 통산 출전 3위(2752경기, 통산 타율 3위(0.319) 통산 타점 4위(1676개), 통산 홈런 7위(504개)를 기록한 뒤 1990년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회했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에 앞서 KBO 총재 특보를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체육훈장 맹호장(1980년)을 수훈했고, 국민훈장 무궁화장(2007년)을 받았다. 2023.09.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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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타이틀도 없는 오타니, 만장일치 MVP는 이상해"

일본프로야구(NPB) 전설 장훈이 만장일치로 올 시즌 아메리칸리그 최우수선수(MVP)를 수상한 오타니 쇼헤이(27·LA 에인절스)에게 다시 한번 까칠한 쓴소리를 남겼다. 일본 ‘스포츠 호치’에 따르면 장훈은 21일 TBS 프로그램 선데이 모닝에 출연해 “오타니의 수상이 정말 기쁘다”며 “이런 어두운 시절에 없던 밝은 소식이다. 정말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칭찬만 있지는 않았다. 장훈은 이전에도 다르빗슈 유, 오타니 등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후배 선수들에게 칭찬보다는 지적을 더 많이 던져왔던 인물이다. 장훈은 “2위인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나 3위 선수(마커스 시미언)의 득표가 불만이다”라며 “오타니가 MVP를 수상할 줄은 알았지만 7대3, 8대2 정도의 비율일 것이라 생각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오타니는 홈런, 타율, 타점 같은 타이틀이 하나도 없다”며 “타율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게레로나 살바도르 페레스(4위)가 불만이 있겠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오타니의 타격 성적은 경쟁자들보다 독보적이지 않았다. 오타니가 지명타자로 타율 0.257 OPS(출루율+장타율) 0.965, 46홈런 100타점 103득점 26도루를 기록했지만, 게레로는 1루수로 타율 0.311 OPS 1.002, 48홈런 111타점 123득점으로 활약했다. 타격 전 부문에서 오타니보다 뛰어났다. 4위 페레스 역시 수비 부담이 높은 포수를 소화하면서도 타율 0.273 OPS 0.859, 48홈런 121타점 88득점으로 타율, 홈런, 타점에서 오타니를 앞섰다. 하지만 이는 투타 겸업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 얘기다. 오타니는 포수인 페레스보다 부담이 심한 선발 투수로 한 시즌을 마쳤다. 그는 올 시즌 투수로도 23경기에 선발 등판해 130과 3분의 1이닝을 던지며 9승 2패 평균자책점 3.18로 호투했다.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로 봐도 ‘이도류’ 오타니의 활약은 독보적이다. 오타니는 올 시즌 투수와 타자를 합쳐 WAR 9.1(베이스볼 레퍼런스 기준)을 쌓았다. 2위 게레로(6.8)를 압도한다. 문자 그대로 가장 가치 있는 선수였다. 만장일치를 받을 만했다. 한편 장훈은 오타니의 내년 성적에 대해 다소 비현실적인 전망도 꺼냈다. 그는 “오타니가 내년에는 내야도 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팀 자체가 약해서 별로 좋은 선수가 없다. 사도류, 오도류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NPB에서도 주로 외야 포지션으로 출장한 오타니는 내야 경험이 많지 않다. 훈련에 따라 코너 내야를 맡을 수도 있지만, 에인절스는 올 시즌 1루수 주전으로 자리 잡은 재러드 월시와 잔여 계약 5년이 남은 올스타 3루수 렌던을 보유하고 있다. 차승윤 기자 2021.11.21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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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오타니, 진짜 만화가 되다

LA 에인절스 오타니 쇼헤이(27)가 메이저리그를 뒤흔들고 있다. 단순히 이도류이기 때문이 아니다. 160㎞ 강속구와 리그 최고의 스플리터 때문만도 아니다. 리그 정상급의 장타력으로 메이저리그 역사에 한 획을 긋고 있다. 28일(한국시간) 탬파베이전에서 시즌 스물다섯번째 홈런을 쏘아올리며 홈런 선두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26홈런)를 바짝 뒤쫓았다. 아시아 선수로는 전례없는 홈런 페이스다. 추신수의 24홈런(2019년) 기록을 넘어섰고 한 시즌 최다 기록인 마쓰이 히데키의 31홈런(2004년)을 넘어서는 것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주변의 시선을 깨부수고 지켜온 투타겸업으로 만든 성과이기에 더 값지다. 장훈, 스즈키 이치로, 다르빗슈 유 등 일본 야구계 선배들로부터 투수와 타자 중 하나를 포기하라는 충고에 흔들리지 않고 투수와 타자 모두 정상급의 성적을 거두는 중이다. 특히 타격 성적이 눈부시다. 오타니를 아직 리그 최고의 투수라 말하기엔 부족하지만, 리그 최고의 타자로는 꼽힐만 하다. '야구인의 몸이 아니다'라는 비판을 들으면서까지 보강한 탈(脫)아시아적 신체를 바탕으로 오타니가 베이브 루스 이후 100여년간 나오지 않았던 야구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 부활한 오타니, 핵심은 하반신 보강 28일 기준 타자 오타니는 25홈런과 59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타율은 0.277로 낮지만, 출루율 0.363, 장타율 0.668, 출루율과 장타율을 합친 OPS는 1.031에 달한다. 타격 7관왕을 노리는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와 홈런왕, MVP 경쟁을 당당히 벌이고 있다. 지난해 부진을 생각하면 괄목상대할 성적이다. 지난해 오타니의 성적은 44경기 7홈런 24타점, 타율 0.190, 장타율 0.366에 불과했다. wRC+(조정 득점 생산력)는 82로 리그 평균(100)에도 미치지 못했다. 투타 겸업이라는 말이 무색했다. 2019년부터 그를 괴롭혔던 왼쪽 무릎이 문제였다. 미국 ‘디 애슬레틱’에 따르면 오타니가 이번 시즌을 앞두고 세웠던 핵심 목표는 하체 재건이었다. 오타니는 2019년 왼쪽 무릎의 이분 슬개골 수술을 받고 2020년 복귀했다. 부상은 완전히 회복했지만, 회복 기간 약해진 하체가 문제였다. 하체가 받쳐주지 못하니 스윙 메커니즘도 무너졌다. 디 애슬레틱은 “지난 시즌 오타니는 약해진 하체 탓에 발이 자꾸 타석을 벗어났다”라며 “조 매든 감독이 다리를 묶어야 하겠다고 농담할 정도였다”라고 2020시즌 오타니가 겪었던 문제를 소개했다. 지난겨울 오타니는 시애틀에 있는 야구 연구소 '드라이브 라인'에서 몸을 만들었다. 트레버 바우어, 마이크 클레빈저, 클레이턴 커쇼, 켄리 젠슨 등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들이 데이터 분석 트레이닝을 위해 찾았던 시설이다. 투수로 돌아오기 위해 투구폼을 교정하고 구속을 끌어올렸다면, 타자로 돌아오기 위해선 부상 전 몸 상태로 되돌리는 데 집중했다. 디 애슬레틱은 “오타니는 비시즌 동안 신체적 출력을 최대화하고 한 시즌 동안 투타 겸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살펴봤다”면서 “드라이브 라인을 통해 몸을 재정비했고 식이요법 계획을 세웠다”고 소개했다. ━ 타고난 장타자, 드디어 재능 만개 이도류, 160㎞ 강속구에 묻히기 쉽지만, 부상 전 오타니가 증명한 타격 재능은 메이저리그 최정상 수준이다. 2019년까지 오타니가 기록한 성적은 40홈런 123타점, 타율 0.286, 장타율 0.532, OPS 0.883으로 리그 평균과 비교한 OPS+(조정 OPS)는 133에 달한다. 결과지표가 아닌 과정지표로 보면 더욱 빛난다. 메이저리그 타구 데이터를 제공하는 베이스볼 서번트에 따르면 2018시즌 오타니는 배럴 타구 비율 16.4%(리그 상위 2%), 평균 타구 속도는 92.9마일(약 149.5㎞, 리그 상위 4%), 최고 타구 속도는 113.9마일(약 183.3㎞, 리그 상위 7%), 강한 타구 비율(HardHit%) 50.4%(리그 상위 4%)를 기록했다. 전성기 알버트 푸홀스, 마이크 트라웃처럼 높은 타율과 장타력, 선구안이 모두 완벽하다고 보긴 어렵지만, 최고의 타구를 만들어내며 트라웃과 함께 에인절스 타선의 선봉에 섰다. 하체 보강에 성공한 올해는 신인왕 시절 타격 기량을 완벽히 되찾은 것은 물론 한층 더 발전했다. 타구는 한층 더 빨라졌다. 평균 타구속도는 93.5마일(약 150.5㎞, 리그 상위 3%)로 1마일 가까이 빨라졌고 최고 타구속도는 무려 119마일(약 191.5㎞, 리그 상위 1%)에 달한다. 배럴 타구 비율도 50% 가까이 증가한 24.3%(리그 상위 1%)에 달한다. HardHit%도 56.2%(리그 상위 1%)로 약 12% 증가했다. 발사 각도도 올라갔다. 올 시즌 평균 발사각도는 16.4도로 2018년보다 4도 이상 올랐다. 강한 타구가 더 높이 뜨니 장타가 양산되는 것은 자명했다. 타구만으로 판단하는 기대 장타율은 라이벌 게레로를 능가한다. 오타니의 기대 장타율 0.657로 실제 성적보다 다소 낮지만, 선두 게레로(0.630)보다 높다. 강한 타구 생산력만 따진다면 메이저리그 최고 타자라 봐도 무방하다. ━ 원석이었던 타자 재능이 꽃펴... MVP 도전 커리어 내내 부족했던 프로 타격 경험이 쌓인 것도 진화한 요인으로 추정된다. 하나마키히가시 고교 시절부터 타격 재능은 투수 못지않았다. 이미 2학년 때 대회 타율 4할 이상을 기록했다. 2경기에 출전했던 고시엔 본선에서도 타율 0.333, 출루율 0.556, 장타율 0.833 1홈런으로 초고교급 파괴력을 선보였다. 정작 프로 진출 이후에는 많은 타석을 경험하지 못했다. 일본 프로야구(NPB) 니혼햄에서 뛴 5년 동안 통산 비율 성적은 타율 0.286, 출루율 0.358, 장타율 0.500으로 뛰어났지만, 타석수는 1170타석에 불과하다. 단 한 번도 규정 타석을 소화하지 못했다. 2016년(382타석)을 제외하면 300타석을 소화한 시즌조차 없다. 완성도가 떨어졌던 투수 훈련에 집중했고 타자 출전도 적었다. 적었던 경험은 메이저리그에서도 마찬가지 변수였다. 데뷔 첫해엔 좌완 투수 상대 약점(좌완 투수 상대 OPS 0.654)을 보이면서 일부 플래툰 적용을 받아야 했다. 2019년에는 5월 극심한 부진(OPS 0.692)을 겪다 적응하며 뜨거운 6월 타격감(OPS 1.091)으로 극복했다. 부상 이력도 더해졌다. 2018년 토미 존 수술, 2019년 왼쪽 무릎 슬개골 수술로 커리어 내내 부상과 수술을 겪으며 자연히 적응 기간이 더 길어졌다. 반면 올해는 부상 없이 시즌 절반가량을 소화한 가운데 어느덧 292타석에 들어섰다. 이상만 없다면 400타석 이상 소화가 확실하다. 메이저리그 누적 타석도 어느덧 1259타석에 이르렀다. 타석도, 메이저리그의 투수들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최근 5년간 리그를 대표했던 주요 강타자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50홈런 이상을 기록했던 지안카를로 스탠튼과 애런 저지의 커리어하이에 버금가는 타구 속도를 기록 중이다. 배럴 타구 비율 24.3%는 최근 5년 통틀어 2017년 애런 저지 다음가는 독보적인 2위 기록이다. HardHit%도 최근 5년 중에 2020년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62.2%), 미구엘 사노(57.3%)를 제외하면 올해 오타니를 넘어서는 타자를 찾아볼 수 없다. 이도류기 때문이 아니라 최고의 타자 오타니가 MVP 후보로 거론되어야 하는 이유다. 차승윤 인턴기자 2021.06.29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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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타석 만에 안타' 쓰쓰고, 5월 9푼...최지만 복귀 절실한 TB

일본인 메이저리거 쓰쓰고 요시토모(30·탬파베이)가 극심한 부진에 빠졌다. 반등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다. 탬파베이는 최지만(30)의 복귀가 절실하다. 쓰쓰고는 6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 에인절스타디움에서 열린 2021 메이저리그(MLB) LA 에인절스전에 7번 타자·1루수로 선발 출전했다. 에인절스 선발 투수는 같은 일본인이자 투·타 겸업으로 돌풍을 이어가고 있는 오타시 쇼헤이. 쓰쓰고는 오타니를 상대로 나선 2회 초 첫 타석에서 좌익수 뜬공으로 물러났고, 4회 두 번째 타석에서는 볼넷을 골라냈다. 6회 초 1사 만루에서는 에인절스 2번째 투수 크리스 로드리게스를 상대했다. 초구 싱커를 공략했지만, 타구는 유격수 앞으로 향했다. 더블플레이로 이어졌다. 탬파베이가 0-1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타점이 필요했지만,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쓰쓰고는 탬파베이가 3-1로 역전에 성공한 8회 초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는 우전 2루타를 치며 추가 득점 기회를 만들었다. 후속타 불발로 탬파베이의 득점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득점 기회를 만들며 팀 공격에 기여했다. 탬파베이는 3-1로 에인절스에 이겼고, 쓰쓰고는 3타수 1안타 1볼넷을 기록했다. 멀티 출루. 이 경기 결과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은 결과다. 그러나 6일 에인절스전이 쓰쓰고가 5월 들어 가장 활약한 경기다. 이전 4경기는 침묵했다. 2일 휴스턴전 4타수 무안타, 3일 휴스턴전 3타수 무안타, 5일 에인절스전 1타수 무안타. 6일 에인절스전 4번째 타석에서 나온 안타가 4월 28일 오클랜드전 2회 말 첫 타석 이후 23타석 만에 나온 안타였다. 6경기 만에 나온 안타였다는 얘기다. 5월 앞선 3경기는 9타석 무안타였다. 6일 에인절스전 포함 5월 4경기 타율은 0.091(11타수 1안타)다. 올 시즌 타율은 0.162다. 멀티 안타는 4월 10일 뉴욕 양키스전이 유일하다. 쓰쓰고는 일본 리그 통산 10시즌 동안 205홈런을 때려낸 타자다. 2016시즌 홈런왕(44개)이다. 영입 시점에는 '소총 부대'인 탬파베이에 장타력을 더해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올 시즌은 24경기 홈런이 1개도 없다. 장타율은 0.216에 불과하다. 타점은 5개. 쓰쓰고는 2020시즌을 앞두고 탬파베이와 계약했다. 개막전에서 류현진(토론토) 상대로 홈런을 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단축 시즌으로 치러진 지난해 51경기에서 타율 0.197·8홈런에 그쳤다. 지난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개막이 연기됐고, 정상적인 시즌을 치르지 못했다. 그래서 올 시즌 퍼포먼스가 그의 진짜 실력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으로 여겨졌다. 개막 첫 달(4월) 기록한 타율은 0.175. 5월에도 부진이 이어지고 있다. 기간 2년, 총액 1200만 달러를 안긴 탬파베이의 결단도 조롱 받고 있다. 쓰쓰고는 지난해 주로 좌익수(105⅔)로 나섰다. 올 시즌은 1루수(89이닝) 또는 지명타자로 나서고 있다. 좌익수는 랜디 아로자레나, 오스틴 미도우즈 등 탬파베이 주축 타자가 나서고 있다. 그나마 쓰쓰고에게 선발 출전 기회가 주어진 건 주전 1루수 최지만이 무릎 부상으로 이탈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최지만은 개막 직전 무릎 관절 내 연골 조각과 반월판 괴사 조직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최근 마이너리그(트리플A) 경기에 출전해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고 있다. 5월 내 빅리그 복귀가 유력하다. 탬파베이는 최근 4연승을 거두며 상승세지만 보스턴과 뉴욕 양키스, 지구(아메리칸리그 동부) 경쟁팀의 기세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최지만의 복귀가 절실하다. 외야진은 포화 상태고, 최지만까지 돌아온다. 쓰쓰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1루수와 지명타자 출전을 양분하고 있는 얀디 디아즈는 타율 0.260을 기록하며 쓰쓰고보다는 나은 성적을 내고 있다. 최근 미국 매체는 쓰쓰고의 방출설을 언급했고, '독설'로 유명한 일본 야구 평론가 장훈은 쓰쓰고의 일본 무대 복귀를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 최고 타자가 계륵으로 전락한 상황이다. 안희수 기자 An.heesoo@joongang.co.kr 2021.05.0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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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단기전 최강자 '미스터 롯데' 김용희…"KS 우승 때 믿을 건 최동원·응원뿐"

롯데 자이언츠의 홈 연고지 부산은 '구도(球都)'로 통한다. 그만큼 야구 열기가 뜨겁다. 프로 출범 전에는 지역 고교 경남고와 부산고의 인기가 어마어마했다. 1975년 6월 실업팀으로 창단한 롯데는 1982년 프로팀으로 전환해 원년 구단의 자부심을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를 배출했다. '사직 노래방'은 해외 언론에 소개될 정도로 뜨거운 분위기를 자랑한다. 1984년과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정규시즌 우승은 아직 한 번도 없지만 팬들의 열성적인 응원만큼은 '최고'로 손꼽힌다. 1982년 출범 첫 시즌 김용희(65)는 롯데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경남고 출신인 그는 실업팀 포항제철을 거쳐 롯데의 개막전 4번 타자를 맡아, 팀의 첫 승리를 확정 짓는 결승타의 주인공이다. 1981년 허리 부상 탓에 고질적인 통증에 시달렸지만, 단기전에 강했다. 올스타전 MVP에 두 차례 선정되는 등 '미스터 롯데'로 불리기도 했다. 김용희 경기 운영위원장이 '1982 롯데' 선수단을 대표해 당시 이야기를 꺼냈다. 故 최동원의 활약, 부산의 뜨거웠던 야구 열기부터 친구 박철순(OB 베어스)에 관한 추억까지 끄집어냈다. -부산 출신으로 롯데에 입단, 그것도 개막전에 4번 타자로 출전했다."당시 해태 타이거즈와 개막전이 구덕야구장에서 열렸다.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악한 시설이었지만, 열기는 정말 대단했다. 관중석이 꽉 들어찼다. 특별히 4번 타자에 의미를 두진 않았고, 팀 승리에만 열중했다." -14대2로 크게 이긴 해태와 개막전에서 1회 결승타를 쳤다."1회 무사 만루에서 중견수 앞 적시타를 쳤던 거로 기억한다. 당시 상대 투수가 누구였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현역 당시 별명이 '미스터 롯데'였다."팬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아마추어 당시 국가대표를 경험해 부산 팬들에게 익숙했고, 첫해 올스타전에서 미스터 올스타(1982년과 1984년 두 차례 수상)에 뽑혀 롯데의 상징이 되지 않았나 싶다." -두 차례 미스터 올스타 수상 때 상품은 어떻게 했나."1982년 대우 맵시 자동차를 받았다. 당시 자가용이 없어 내가 직접 탔다. 2년 후엔 맵시나였다. 2년 전에 받은 맵시를 지인에게 주고, 새로 얻은 승용차를 한동안 이용했다."(다만 KBO 자료에 의하면 1984년 MVP 부상은 대우 로열 XQ다.) -1984년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당시 삼성 전력과 한 마디로 비교하면 굉장히 열세였다. 삼성은 호화군단으로 타격과 마운드, 수비 모두 우리보다 우세했다. 우리가 믿을 건 최동원의 존재, 또 분위기였다. 그거로 싸웠다. 최동원이 전인미답의 한국시리즈 4승을 올렸다. 그 과정에서 다이나믹하고 드라마틱한 모습을 연출했다. 선수단 분위기를 한데 모으는 힘이었다. (삼성의 져주기 논란도 선수단 분위기에 영향을 끼쳤나?) 그렇다. 삼성이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롯데를 택한 것도 우리를 자극했다. 구덕에서 맞대결하는데 페어플레이에서 상당히 어긋나는 느낌을 받았었다." -당시 롯데의 인기는 어땠나."팀 성적이 좋을 때 엄청난 열기였다. 반면 1982~83년 각각 0.388(6개 팀 중 5위), 0.434(6위)의 승률에 그쳤을 땐 팬들의 비난도 많았다. 부산이 야구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프로야구 출범 전부터 라디오 주파수를 잘 조절하면 다른 지역에선 불가능했지만, 부산에선 일본 야구 중계 청취가 가능했다. 그 당시 연세가 높은 어르신들은 일본어에 능통했다. 일찍부터 야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어떻게 하면 승리하는지 알았다. 라디오를 틀면 항상 야구 중계가 이뤄졌다. 1984년에 우승 땐 난리 났다." -반면 팬들의 뜨거운 열기 탓에 고충도 있었을 텐데."경기에 지면 팬들이 버스를 막고 '왜 졌냐'고 따졌다. 야구장을 빠져나오는데 한 시간 넘게 걸리곤 했다. 소위 제6공화국 때 정치권에서 청문회가 한창이었는데, 야구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청문회' 풍경이 연출됐다. 버스를 흔들어 버스가 넘어질 듯한 상황도 있었다. 팀 성적이 안 좋을 때 경기 중에 욕을 하거나, 물건이 날아올 때도 있었다. 입장권을 사지 못한 일부 팬들이 외줄 타기 하듯이 40~50m 높이를 올라와 관중석에 들어오곤 했다. 연습 장비를 두는 좌측 외야를 무단으로 뚫고 경기장에 들어오신 분들도 계셨다. -당시에도 키가 아주 컸다. 야구 열기가 높은 부산에선 어딜 가든 눈에 띄었을 것 같다."실제로 그랬다. 고등학교 때부터 키가 컸다. 경남고 3학년 때 청룡기 대회에서 우승해 부산에서 카퍼레이드를 했다. 당시 부산 시내에 나가면 대부분 알아봤을 정도였다. (여성 팬도 많았나?) 야구장에 와서 관전하는 정도였다. 팬레터가 많을 때 100통씩 받곤 했다."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 일본전에서 역전 적시타를 기록하는 등 아마추어에서 화려함에 비해 프로에선 일찍 은퇴했다. (당시 대회 종료 후 포지션 별 최고 선수를 선정했다. 김용희 위원장은 일본 요미우리의 하라 다쓰노리 감독을 제치고 베스트 3루수로 뽑혔다.)"맞다. 아마추어 시절 활약에 비하면 다소 일찍 은퇴했다. 프로 출범을 앞둔 1981년, 실업야구 포항제철에 몸담았다. 당시 경기 도중에 베이스 러닝을 하다가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포항제철 감독님께서 '야구를 그만두고 사무직으로 옮기자'라고 권하셨다. 그 당시에는 의료진의 수술이나 구단의 재활 실력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열악했다. 수술대에 오르면 유니폼을 벗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수술을 기다렸다. 그런데 수술을 하기로 한 당일에 못 본 의사가 오더니 '너 김용희 맞네'라고 하시더라. 수술 전 회의 때는 '김용희'라는 이름만 봤을 뿐, 내가 야구 선수인지 몰랐던 거다. 그 의사 분이 '수술하면 야구 선수 생활이 끝난다. 그러니 수술하면 안 된다'라고 하더라. 그래서 수술이 취소됐다. 약 3개월 후에 퇴원했다." -그래서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됐나. "그렇다. 다만 늘 허리에 통증을 안고 뛰었다. 허리를 제대로 숙이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전 경기 출전이 어려웠고, 정규시즌 성적(8시즌 통산 535경기, 타율 0.270 61홈런 260타점)도 안 좋은 편이다. 반면 포스트시즌과 같은 단기전이나 올스타전에선 좋았다. 조금 아파도 일주일은 눈을 딱 감고 참으며 뛸 수 있어서다. 당시 3루수로 나섰는데 옛날 수비 사진을 보면 다소 이상할 것이다. 허리가 아파서 (무빙하지 않고) 무릎에 손을 대고 있었다. 투수가 공을 던질 때 손을 조금 뗐다. 그만큼 통증에 시달렸다. 요즘에는 구단별로 트레이너가 3~5명 있지만, 당시에는 그냥 다친 부위에 파스 뿌리면 끝이었다." -프로야구가 개막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어땠는지."선망의 대상이었다. TV를 통해 일본 무대에서 활약한 장훈, 백인천 등 당대 최고의 선수 플레이를 보며 자랐다. 일본은 잔디 그라운드에, 관중석도 꽉 들어찬 모습이 부러웠다. 우리도 일본처럼 프로야구가 출범한다고 듣고선 굉장히 반겼다." -프로 무대를 경험한 뿌듯함과 아쉬움이 교차할 것 같다."정말 뛰어난 능력을 지닌 선배들도 밟지 못한 프로야구를 경험해 정말 행복했다. 프로야구 초창기여서 몸 관리를 비롯해 다양한 노하우를 전수받았다면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도 든다. 선수 때 너무 많이 아팠다." -프로야구 원년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를 꼽자면."단연 박철순(OB베어스)이다. 투구가 워낙 뛰어났다. 당시 22연승 대기록을 작성하지 않았나. 요즘은 투수 대부분이 체인지업을 던지지만, 그때는 박철순이 던진 체인지업의 구종 자체를 모를 시기였다. 박철순은 내 초등학교 친구다. 동광초에서 같이 야구를 했다. 경남중에 함께 진학했는데 키가 작았던 철순이가 1년을 쉬었다. 이후 서울(배명고)로 전학 갔다. 프로에서 만난 박철순은 정말 상대하기 어려운 투수였다. 기록을 자세히 모르지만, 상대 전적이 별로 안 좋았던 것 같다. (박)철순이의 체인지업을 보고선 다음 타자에게 상대한 느낌과 구종을 일러줄 때 '공이 오다가, 안 온다'라고 표현했다. 공이 직구처럼 날아오다가 홈 플레이트 근처에서 갑자기 아래로 휘어지며 속도가 뚝 떨어졌다. 1983년 롯데 자이언츠로 야구 선교사가 와 기술을 전수한 적 있다. 당시 투수들에게 써클 체인지업을 알려줬는데 우리 선수들이 '어떻게 공을 저렇게 던지노'라고 그냥 넘겼을 정도로 무지했다. 그때 투수 구종은 직구, 슬라이더, 커브 정도였으니 (박)철순이의 공을 치기 아주 까다로웠다." -프로야구 원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첫 시즌 80경기 체제로 운영했다. 대개 팀당 일주일에 4경기 했다. 연고 구단이 없는 춘천을 비롯해 지방에서도 경기했다. 선수들 의식이 아마추어리즘이었다. 왜냐면 프로야구가 처음이었으니까." -현역 은퇴 후 1992년 롯데 우승 당시 코치를 역임했다. 이듬해 바로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다."시즌 전에 구단에 이런 의사를 미리 전했다. 미국에서 야구에 관한 기초를 배우고 싶었다. 구단은 우승 후에 만류했지만, '이때 아니면 갈 수 없겠다"라고 생각해 무조건 갔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씩 총 4번 정도 미국 연수를 다녀왔다." -롯데, 삼성, SK에서 감독을 지냈다. 그라운드의 신사로 통하며 인자한 모습이었다."안 좋은 거다. 감독은 어떻게든 성적을 올려야 하는 위치다. 감독으로서 코치들을 이끌며 선수들이 최선의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 (정규시즌 기준 통산 성적은 452승 501패 23무, 승률 0.474다.) - 최근 프로야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선수가 있다면."이정후(키움) 강백호(KT)다. 이정후는 故 장효조와는 또 다르게 정말 정교한 타격을 한다. 강백호는 지금껏 KBO리그 타자 가운데 스윙이 가장 빠른 듯하다. 아직 완전체는 아니지만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지녔다. 하드웨어와 근성이 뛰어나 아주 좋은 선수가 될 것이다." -경기 운영위원으로 매일 프로야구 현장을 누빈다."정말 바쁘다. 경기 진행 여부와 경기장 상태, 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관련해 선수단 입장 등을 체크한다. 바쁜 것보다 관중이 입장하지 못해 마음이 더 아프다. 얼른 코로나19가 사라져 팬들이 경기장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선수단도 관중의 소중함을 많이 느낄 것이다. 모든 것이 정상화되면 선수단이 성숙하게 바뀌어 있을 것으로 여긴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가 이토록 발전한 건 선수와 구단의 노력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가 팬들의 성원 덕분이다. 앞으로 더 많은 응원과 관심을 보내주시면, 선수들은 좋은 경기와 팬서비스로 보답할 것이라 믿는다." 이형석 기자 lee.hyeongaeok@joongang.co.kr 관련기사 [창간특집] OB 베어스 윤동균 서른넷 '노장' 원년 KS 진출…'막강 삼성' 박살냈지 [창간특집] 원년 첫 안타, 첫 홈런 '개막전 사나이' 삼성 이만수…"최동원 때문에 타율 많이 까먹어" [창간특집] 원년 개막전 '신 스틸러' MBC 청룡 유승안…"이종도 끝내기 만루포는 내가 실수한 덕" [창간특집] 최다 우승팀의 '투타 겸업' 에이스 해태 김성한…"백인천은 제압하기 힘든 상대" 2020.09.25 05:40
야구

[창간특집] 원년 첫 안타, 첫 홈런 '개막전 사나이' 삼성 이만수…"최동원 때문에 타율 많이 까먹어"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삼성 라이온즈에는 스타플레이어가 즐비했다. 1970년대 대구·경북 지역이 경북고-대구상고(현 상원고) 중심으로 아마야구 전성기를 누리면서 유능한 선수들이 꽤 많이 발굴됐다. 그 흐름이 구단으로 연결돼 창단 당시 삼성은 투타 밸런스가 가장 안정적인 팀이었다. 투수 이선희와 권영호, 야수 배대웅, 천보성, 서정환, 정현발 등 선수층이 유독 두꺼웠다. 많은 전문가가 프로야구 원년 우승 후보로 삼성을 점찍었던 이유다. 이만수 전 SK 감독은 '스타 군단' 삼성의 핵심이었다. 실업야구팀에서 온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1982년 3월 27일 열린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도 주전 마스크를 썼다. 당시 삼성은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MBC를 상대했는데 이 전 감독은 1회 초 2루타로 KBO리그 통산 첫 안타의 주인공이 됐다. 이어 5회 초에는 사상 첫 홈런까지 때려내며 프로야구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개막전 사나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활약이었다. 마지막에 웃진 못했다. 삼성은 개막전 초반 5-0으로 크게 앞서 손쉽게 승리를 따내는 듯했다. 그러나 7-4로 앞선 7회 말 유승안에게 동점 스리런 홈런을 맞고 승부가 연장으로 흘렀다. 결국 10회 말 이종도에게 끝내기 만루 홈런을 허용해 무릎을 꿇었다. 만루 홈런을 내준 투수 이선희와 개막전 배터리 호흡을 맞춘 이 전 감독은 "그런 드라마는 글로 쓰려고 해도 쓰기 힘들다"고 회상했다. 원년 첫 경기를 역전패로 마무리한 삼성은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도 웃지 못했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던 OB 베어스에 무릎 꿇었다. 이만수 전 감독은 삼성의 '시작'을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 있는 레전드다. 그는 "겉은 프로지만 돌아가는 내용은 사실 아마추어에 가까웠다"며 1982년을 돌아봤다. -프로야구가 개막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어땠나."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 메이저리그(MLB)에 진출하는 게 꿈이었다. 그 꿈을 갖고 야구를 계속했는데 우리나라에 프로야구가 생긴다고 해 그 꿈을 접었다. 한양대를 졸업하기 전에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얘길 들었다. 미국에서 야구 경기를 하나 한국에서 하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미국에 가지 않고 남기로 결정했다. 현역 시절에는 일본에 진출할 기회도 있었다. 프로에서 활약하는 걸 보고 제의가 오더라.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도 물론 있지만 그럴 때마다 어디서 야구를 하든 똑같다고 생각했다." -삼성의 지명을 받았을 때는 어땠나."너무 좋았다. 왜냐면 내가 대구 출신 아닌가. 그때는 고등학교 연고(대구상고 졸업)를 기준으로 프로에 갔으니까 대구가 연고인 삼성에 갈 수밖에 없었다. 프로야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는데 고향 팀에 가니까 더 좋았다." -프로야구 원년 전지훈련은 어떻게 진행했나."1982년은 거제도에서 했다. 삼성이 운영하는 조선소 안에 야구장이 아닌 축구장이 있었다. 거기서 훈련하다가 마산으로 넘어가고 그랬다. 당시만 하더라도 전지훈련을 하러 해외에 간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후 삼성이 국내 구단 중 처음으로 미국 LA에서 전지훈련을 했지만, 원년은 아니었다. 정말 추워서 죽는 줄 알았다. 정신력으로 버텼는데, 지금이라면 아마 다 도망갔을 거다. (웃음) 환경이 열악했지만 그래도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개막전 떨리지 않았나."전두환 대통령이 시구하지 않았나. 당시 삼성의 초 공격이어서 MBC 청룡 포수였던 유승안이 시구를 받았던 거 같다. 역사적인 순간이었고 야구인 중 한 명으로서 감사했다. 너무 기뻤다." -개막전에서 역사적인 KBO리그 첫 안타를 때려냈는데."상황이 생생하다. 1회 초 2사 2루에 투수가 이길환이었고 주자는 함학수 선배였다. 풀카운트에서 2루타를 때려내 첫 안타와 첫 타점을 동시에 올렸다. 유종겸 선배를 상대로 친 첫 홈런(5회 초)도 다 기억난다. 당시만 하더라도 첫 안타와 타점, 홈런에 대한 중요성이 크지 않았다. 프로라는 인식이 별로 없었다. 아마추어를 오래 하다 보니까 오랫동안 프로야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기념이 될 만한 걸 모아놓거나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첫 안타와 첫 홈런, 더 기억에 남는 건."솔직히 홈런이다. 안타도 좋았지만, 홈런을 친 뒤 베이스를 돌 때의 그 기분을 잊을 수 없다. 내가 펄쩍펄쩍 뛰면서 지금은 돌아가신 서영무 감독님을 안고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개막전 상대 MBC에는 백인천 감독이 있었는데."고등학교 3학년 때 최연소로 국가대표에 발탁돼 일본 가고시마에 갔었다. 거기에서 백인천 감독과 장훈 선배가 경기하는 걸 직접 봤다. 우상 같았던 선배 중 한 명이 백인천 감독이었다. 프로야구를 하면서 함께 경기한다니까 어땠겠나. 쉽게 말해 백인천 감독은 대학생이고 우리는 초등학생이나 다름없었다. 상상을 해보면 된다. 4할 타율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실력 차이가 났다. -그 실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활약이 대단했는데."대학교 때 백호기라는 대회가 있었다. 백호기는 대학팀과 실업야구팀이 모두 출전해 함께 경기하는 대회였다. 그때 실업야구는 김우열, 윤동균 선배 등 멤버가 쟁쟁했다. 초창기 대학팀은 실업야구팀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후 대학팀이 우승했는데 내가 대학생(한양대) 때는 결승에 올라가고 그랬다." -원년 개막전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7-7로 맞선 연장 10회 말 이선희 선배가 이종도 선배한테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을 맞고 울었던 기억이 가장 많이 난다. 그때 내가 포수였다. (웃음)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프로야구 붐업을 시킨 주역이 이선희 선배와 이종도 선배라고 생각한다. 만약 삼성이 경기 전 예상대로 이겼다면 보는 사람마다 '아, 야구 별거 아니네'라는 생각을 했을 거다. 그런데 끝내기 만루 홈런이 나왔으니 그 짜릿함은 말로 다 표현을 못 하지. 당시에는 개막전이 TV로 중계됐었는데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있었을까. 한 사람은 눈물을 흘렸고 한 사람은 영광의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 두 선수가 프로야구 흥행을 이끌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드라마는 글로 쓰려고 해도 쓰기 힘들다." -프로야구 원년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그 당시만 해도 김우열 선배, 윤동균 선배, 김봉연 선배 같이 야구 잘하는 선수가 정말 많았다. 그런데 내가 포수니까 그분들이 타석에 들어서면 일본말로 이런저런 얘길 많이 했다. (웃음) 지금은 프로야구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그때는 가능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겉은 프로지만 돌아가는 내용은 사실 아마추어에 가까웠다. 포수 마스크를 쓰고 얼마나 말을 많이 했냐면…그것 때문에 선배들과 많이 다투기도 했다. 백인천 감독은 직접 그라운드에 나와서 '이만수 입 좀 닫게 해달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상대하기 어려웠던 '천적'이 있었나."선동열(해태·1985년 데뷔)은 뒤늦게 들어왔는데, 초창기 최동원(롯데·1983년 데뷔) 때문에 타율을 정말 많이 까먹었다. 최동원만 아니었어도 통산 타율(0.296)이 3할이 됐을 거다. 그다음에는 롯데에 박동희(1990년 데뷔)라고 있었다. 선수 생활하면서 공이 그렇게 빠른 투수는 처음 봤다. 당시 구속이 최고로 빨랐던 투수였다. 그리고 이강철(해태·1989년 데뷔), 조계현(해태·1989년 데뷔) 같은 투수 때문에 타율이 또 많이 떨어졌다. 그 시절 해태에는 정말 좋은 투수가 많았다." -당시 룸메이트는 누구였나."선수 생활하면서 가장 길게 룸메이트를 했던 건 4년 뒤에 입단한 성준(1986년 데뷔)이다. 한 6~7년 정도 했던 거 같다. 원년에도 선배랑 후배가 2명씩 잠을 잤는데 투수랑 포수가 짝을 이뤄 투수였던 이선희 선배랑 했었던 거 같다. 1년 뒤에 김시진이 입단해 그때는 김시진이랑 했다." -프로야구 원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원년 사령탑이셨던 서영무 감독님이 정말 무서웠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화가 나셨는지 고속도로를 가다가 선수들에게 내리라고 하고 그냥 가버리셨다. (웃음) 버스를 저 멀리에 주차하고 선수들을 기다리고 계셨는데 그러면 거기까지 막 뛰어가고 그랬다. 당시에는 그런 일이 정말 많았다." -아쉽게 프로야구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놓쳤는데."그때 우승을 하지 못하면서 그 이후 계속 어렵게 됐던 거 같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니 우승하는 데 오랜 시간(삼성·2002년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 걸렸다." -최근 프로야구에서 눈에 띄는 선수가 있다면."사실 요즘에는 야구를 잘 보지 못했다. 이정후(키움)를 비롯한 젊은 선수들이 잘하더라. 한동민(SK)이 잘했으면 좋겠는데…(웃음)" 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ongang.co.kr 관련기사 [창간특집] OB 베어스 윤동균 서른넷 '노장' 원년 KS 진출…'막강 삼성' 박살냈지 2020.09.22 06:00
스포츠일반

[창간 50 특별기획]한국스포츠 50년, 슈퍼스타 50인, 환희의 50신

일간스포츠는 한국스포츠 반세기를 함께 했다.1969년 창간해부터 2019년까지 50년 동안 한국 스포츠에는 수많은 스타가 등장했다. 그중 시대를 풍미한 독보적인 슈퍼스타들이 존재했다. 일간스포츠와 스타들을 돌아보면 한국 스포츠의 역사가 보인다. 스타들이 만들어낸 환희의 장면들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일간스포츠는 중앙일보-일간스포츠의 스포츠 담당 기자들을 통해 50년의 기간을 10년 단위로 나눠 각 세대별 최고스타 10인을 선정했다. 이어 한국 스포츠전문가들의 자문 등을 두루 구해 총 50인을 확정했다. 지도자와 행정가는 제외했다. 오직 당시 현역으로 뛴 선수로만 구성했으며 또 각 시대별 같은 종목 선수들은 최대한 배제했다.50년을 수놓은 영광의 슈퍼스타 50인을 소개한다. <1969~1979 : 배고팠던 시절 국민들을 위로한 영웅>1960년, 70년대 한국은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국민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했던 쉼터가 스포츠였다. -김일(프로레슬링)김일은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박치기왕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스타였다.박치기를 특기로 극동 헤비급 챔피언·올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 활약을 펼쳤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프로레슬링 전설로 위용을 떨쳤다. 국민들은 김일의 경기가 열리는 날에 흑백 TV 앞에 모여 열렬히 응원했다. 김일의 움직임으로 인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김일은 배고팠던 시절 조국의 영웅이었다. -홍수환(복싱)4전5기의 신화. 두 체급에 걸쳐 세계 타이틀을 거머쥐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한 복싱 선수다.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WBA(세계복싱협회)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세계 정상에 섰다. 당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한 마디는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또 1977년 파나마에서 열린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결정전에서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상대로 2회 4번 다운당한 뒤 3회에 KO승을 거뒀다. 4전5기 신화. 국민들은 홍수환의 투혼을 보며 힘겨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양정모(레슬링)1976년 8월 1일.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 나왔다. 주인공은 양정모였다.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kg급에서 양정모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광복 후 참가한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이 등장하는 순간. 한국은 첫 금메달 소식에 열광했다. 당시 한국은 일요일.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 휴일이어서 전국에 호외가 깔렸다. 양정모는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과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까지 2회 연속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며 최고의 레슬링 영웅으로 군림했다. -조오련(수영)'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한국 수영의 아버지다.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자유영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아시안게임 2관왕이 탄생했다. 무명의 18세 고교생이었던 그는 자연스럽게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어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도 400m, 1500m 2관왕에 올랐다. 조오련은 한국신기록 33개, 대회신기록 17개를 갈아치웠다. 한국 수영은 그렇게 조오련으로부터 출발했다. -김진호(양궁)양궁 최강국 한국. 그 시작은 고교생 신궁 김진호였다. 1970년대 세계양궁은 김진호의 시대였다.그는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에서 5관왕을 차지하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18세 고교생이었던 김진호를 위해 카퍼레이드 행사까지 열며 국민들은 뜨겁게 환영했다. 이어 김진호는 1983년 LA세계선수권에서 또 다시 5관왕에 올랐다. 여자 신궁 계보의 시조. 한국 양국의 위대함을 세계무대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전설이다. -이에리사(탁구)한국 탁구의 어머니라 불리는 이에리사다.그는 1973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에서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일궈낸 것이다. 정현숙과 박미라 그리고 이에리사가 팀을 이뤘고, 19세 막내 이에리사가 에이스였다.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스매싱도 이에리사의 손에서 나왔다. 이 쾌거는 '사라예보의 기적'이라 불렸고, 한국에는 탁구 열풍이 불었다. 전국의 탁구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백옥자(육상)1970년대 '아시아의 마녀'라 불리며 아시아 육상을 지배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백옥자다.그는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포환던지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회 신기록을 작성하며 한국 여자 선수 최초의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그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16m28cm,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 육상 최초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했다. 육상 불모지 한국에서 등장한 영웅이었다. -김응용(야구)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는 김응용이었다.1966년부터 1972년까지 한일은행 소속으로 한국 야구를 주도한 주인공이다. 김응용이 있기에 한일은행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그는 홈런황 3회를 차지하는 등 실업야구 최고의 거포였다. 통산 타율 3할7리를 기록했다. 또 김응용은 국가대표 4번 타자였다. 1971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서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이끌었다. 아시아선수권 2번째 우승. 김응용 이름 앞에 '영원한 국가대표 4번 타자'라는 이름표가 붙은 이유다. -신동파(농구)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농구를 이끌었던 슈퍼스타 신동파다.그는 1967년 중소기업은행에 입단해 1974년 은퇴할 때까지 3만 득점 이상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라이벌이 없었다. 그의 위상은 해외까지 퍼졌다.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결승 필리핀과 경기에서 50점을 넣으며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신동파의 활약에 반한 필리핀에 신동파 신도롬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0년 유고슬라비아 세계선수권에서 평균 30득점을 넘기며 득점왕에 올랐고,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조혜정(배구)'작은 새'라 불린 한국 여자배구의 전설 조혜정이다.그는 165cm의 단신이었지만 엄청난 점프와 파워로 한국 배구의 간판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조혜정이 이끄는 배구대표팀은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를 3-1로 꺾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 탄생하는 명장면. 올림픽과 함께 조혜정은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과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연속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여자배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79~1989 : 구기종목에서 등장한 불세출의 스타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이 시대에는 유독 구기종목에서 불세출의 스타들이 등장했다. 축구와 야구 그리고 농구와 배구까지 역사상 최고의 선수들이 이름을 날렸다. 또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감동이 찾아왔다. -차범근(축구)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축구에는 불멸의 슈퍼스타가 등장한다. 바로 차범근이다.차범근은 한국 선수 최초로 유럽 무대를 밟았다. 세계 최고의 프로축구리그로 꼽혔던 독일 분데스리가. 그는 다름슈타트를 시작으로 프랑크푸르트, 레버쿠젠 등에서 활약했다. 차붐은 UEFA(유럽축구연맹) 컵 우승을 2회를 이끌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또 당시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골 신기록(98골)도 세웠다. 한국 대표팀에서도 136경기 출장, 58골로 최다출전, 최다골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영웅이자,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고 있다. -선동렬(야구)야구에는 국보급 투수가 탄생했다. 한국야구는 선동렬 시대에 돌입했다.프로야구가 출범한 뒤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선동렬. 이후 프로야구는 해태 왕조가 지배했다. 그 중심에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이 있었다. 3년 연속 투수 3관왕(다승·승률·평균자책점) 정규리그 MVP 3회·골든글러브 6회·7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 등을 기록하는 등 해태를 6번 우승으로 이끌었다. 통산 146승, 132세이브, 방어율 1.20이다.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에 이견이 없다. -최동원(야구)선동렬이 등장하기 전 프로야구의 유일한 전설, 최동원이다.그는 1984년 다승왕·탈삼진왕·골든글러브에 이어 MVP까지 수상하며 프로야구를 평정했다. 그해 7전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만나 홀로 4승을 따내며 롯데 자이언츠를 사상 첫 정상에 올려놨다. 강속구와 폭포수 커브를 장착한 무쇠팔 최동원이었다. 이후 1985년 20승·1986년 19승·1987년 14승까지 해마다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최고 투수로 명성을 이어갔다. 선동렬과 라이벌 구도는 프로야구 최대 빅이슈였다. -이충희(농구)신동파의 뒤를 이은 최고의 슈터, 이충희의 등장은 한국 농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농구대잔치 출범 후 3시즌 동안 두 차례 팀 우승과 MVP를 동시에 석권했다. 현대전자의 상징. 한 경기 69점을 기록하며 팬들을 열광시켰고, 최초로 4000득점 돌파 그리고 5시즌 연속 득점왕 등 슛도사를 막을 자 없었다. 그의 영향력은 대표팀까지 번졌고,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1986년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홀로 45점을 성공시키며 세계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강만수(배구)타고난 힘과 기술 그리고 센스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최고의 공격수. 강만수를 정의하는 말이다.1970년대와 80년대를 풍미한, 배구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 공격수다. 1972년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한국은 강만수로 뜨거웠다.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였기 때문이다. 이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우승과 1979년 멕시코유니버시아드 우승을 이끌며 '아시아의 거포'로 불렸다. 컴퓨터 세터 김호철과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기도 했다.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현정화(탁구)한국에서 처음 개최된 올림픽. 1988년 서울올림픽 최고 스타는 현정화였다.한국 여자탁구의 상징.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을 시작으로 1987년 뉴델리세계선수권 복식 금메달을 차지했다. 조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메달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기대는 현실이 됐다. 서울올림픽 복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선수로 최초로 2010년 국제탁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현정화라는 이름으로 한국 여자탁구의 황금기가 시작됐다. 그가 은퇴한 뒤 한국 여자탁구는 단 한 번도 세계 정상에 서지 못했다. -김수녕(양궁)한국 양궁 역사상 최고의 신궁, 단연 김수녕이다.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실력, 카리스마 그리고 냉정함까지, 김수녕 그 자체가 한국 양궁의 얼굴이었다. 1987년 16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관왕 탄생. 이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을 품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회 연속 금메달의 주인공도 김수녕이다. 세계신기록을 무려 35회나 달성했고, 한국 역대 올림픽 메달 횟수(6개) 공동 1위다. -손미나(핸드볼)우생순의 시작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1984년 LA올림픽에서 여자 핸드볼대표팀은 은메달을 차지했고, 4년 뒤 조국에서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소련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21-19로 승리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첫 번째 금메달은 그렇게 나왔다. 금메달 멤버는 총 15명. 그중 골키퍼로 한국 골문을 든든히 지켰고,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대표로 선서를 한 손미나가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다. -이만기(씨름)예능에 나오는 친근한 옆집 아저씨가 아니다. 이만기는 한국 씨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였다.이만기는 1980년대 씨름 황금기를 이끈 스타였다. 1983년 첫 천하장사를 차지한 뒤 총 10회 정상에 올랐다. 역대 1위. 또 백두장사 19회, 한라장사 7회를 차지했다. 기술씨름을 도입한 최초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압도적 실력과 준수한 외모로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만기의 경기를 보기 위해 대통령이 경기 시간을 늦췄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만기가 수놓은 씨름은 한국 최고 인기스포츠였다. -장재근(육상)한국 육상의 전설이 등장했다. 한국 육상 역대 최고의 스프린터, 장재근의 등장이다.그는 20세의 나이로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에 출전해 200m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시안게임 최초 육상 트랙 금메달이었다. 육상 천재 장재근에 한국은 열광했다. 그는 이어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도 200m 금메달을 따내며 아시안게임 2연패에 성공한다. 1985년 자카르타아시아선수권에서 장재근은 20초41이라는 한국신기록을 작성했다. 이 기록은 이후 33년 동안 한국신기록으로 남아있었다. <1989~1999 : IMF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 희망을 안긴 영웅>1997년 한국에 불어닥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실의와 고통에 빠진 국민들에게 용기를 안긴 스포츠 스타들이 있었다. 이들의 존재가 곧 희망이자 위로였다. -박찬호(야구)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 그는 IMF 위기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긴 영웅이었다.1994년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1997년 14승을 거두며 주목을 받았고, 1998년 15승을 수확하며 정상급 선수로 성장했다. 2000년 18승을 달성하며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 아시아 최다승이다. 또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2006년 월드베이스볼 클래식 동메달 등을 이끌며 야구대표팀에서도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했다. -박세리(골프)IMF 위기의 시절 국민들을 위로했던 또 한 명의 슈퍼스타, 박세리다.미국 LPGA 개척자. 1998년 LPGA 무대에 뛰어들었고, 데뷔 4개월 만에 맥도널드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US오픈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특히 US오픈 연장 18번 홀에서 양말을 벗고 맨발로 연못에 들어가 샷을 한 장면은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박세리의 모습에 국민들은 힘을 얻었다. LPGA 25승으로 한국인 최다 우승자 역시 박세리다. -황영조(마라톤)'몬주익의 영웅'의 등장으로 한국 육상은 다시 한 번 세계적으로 위용을 떨쳤다.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황영조는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타 고이치를 따돌린 뒤 홀로 몬주익 스타디움에 들어섰다. 그리고 두 팔을 힘차게 들고 골인했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 육상 첫 올림픽 금메달. 1936년 베를린올림픽 손기정의 금메달 이후 첫 번째 금메달이었다. 이후 황영조는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며 다시 한 번 포효했고, 1994년 미국 보스턴마라톤에서는 당시 한국 최고 기록인 2분8초09를 기록했다. -심권호(레슬링)심권호라는 이름은 세계 최고라는 의미다.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 48kg급 금메달을 목에 건 뒤 1995년 프라하세계선수권,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까지 정상을 차지했다. 48kg급이 폐지되자 54kg급으로 체중을 늘려 다시 한 번 똑같은 코스를 밟았다. 1998년 예블레세계선수권·1998년 방콕아시안게임·2000년 시드니올림픽까지 금메달을 일궈냈다. 하계올림픽 최초 올림픽 2연패, 한국 올림픽 사상 첫 두 체급 석권 그리고 세계 레승링 최초 두 체급 그랜드슬램 달성. 기록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전기영(유도)한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는 유도선수를 꼽으라면 단연 전기영이다.유도 천재, 업어치기의 달인으로 불린 그는 20세의 나이로 참가한 1993년 해밀턴세계선수권 78kg급에서 우승했다. 한국 역대 최연소로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5년 지바세계선수권에서는 86kg급에 도전해 금메달을 차지, 두 체급을 석권했다.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에서는 1회전을 제외하고 모두 한판승으로 이기며 정상에 섰다. 1997년 파리세계선수권에서도 1위에 오르며 세계선수권 3연패를 달성했다. -박주봉(배드민턴)배드민턴의 교과서 박주봉. 그는 한국을 넘어 세계 배드민턴의 전설이었다.1980년 17세의 나이에 대표팀에 발탁됐고, 1982년 덴마크오픈에서 이근구와 한 조로 역대 최연소로 국제대회 우승을 일궈냈다. 1985년 캘거리세계선수권 우승·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1989년 자카르타세계선수권 금메달·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금메달·1991년 코펜하겐세계선수권 1위 등 승승장구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했다. 1996년 '배드민턴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허버트 스칠 상을 수상했다. -전이경(쇼트트랙)'쇼트트랙 여제'라 불리는 유일한 선수, 전이경이다. 그보다 압도적인 선수는 없었다.1988년 12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된 그는 1994년 릴레함메르올림픽 1000m와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석권, 2관왕에 올랐다. 이어 1995년 요빅세계선수권을 시작으로 1996년 헤이그, 1997년 나가노까지 개인종합 3연패를 일궈냈다. 1998년 나가노올림픽에서도 1000m와 3000m 계주를 석권하며 한국 여자 최초로 올림픽 2회 연속 2관왕에 오르는 영광을 품었다. -허재(농구)농구대통령이 당선됐다. 농구 9단이라 불리며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선수, 허재다.중앙대 1학년 시절 농구대잔치에 나서 평균 24득점을 올리며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어 기아자동차에 입단하자 기아 왕조가 구축됐다. 기아의 에이스로 농구대잔치 5연패 등 7회 우승을 일궈냈다. 3번 MVP를 수상했고, 베스트 5에 6회 포함됐다. 압도적인 실력과 카리스마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스타. 국가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다. 1990년 아르헨티나세계선수권 이집트전에서 62점을 넣으며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홍명보(축구)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다.그는 1992년 포항제철 아톰즈에 입단해 K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신인 최초로 MVP를 수상하는 영광을 품었다. 이후 일본 J리그에서 진출하며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등 활약을 이어갔다. 한국 대표팀 전설이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을 시작으로 1994년 미국월드컵,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 이어 2002년 한·일월드컵까지 아시아 최초로 4회 연속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홍명보는 A매치 136경기 출전으로 한국 최다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 -강호동(씨름)이만기를 1인자에서 내려앉히고 새로운 1인자로 등극한 괴물, 강호동이다.이만기의 은퇴는 곧 강호동이라는 새로운 황제의 등극과 연결된다. 1989년 일양약품에 입단한 20세 강호동은 첫 백두장사 타이틀을 차지했다. 당시 4강에서 이만기와 첫 공식전에서 맞붙어 2-0으로 승리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1990년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천하장사에 올라섰다. 이후 백두장사 7회, 천하장사 5회를 차지했다. 최단기간 천하장하 5회라는 신기록을 가지고 있다. 강호동이 은퇴하자 씨름의 황금기도 끝났다. <1999~2009 : 불모지에서 태어난 올림픽 스타 그리고 붉은물결 2002년>불모지 한국. 그동안 한국에서 약했던 종목에서 슈퍼스타들이 등장해 행복했던 시기다. 또 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영광이었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가 탄생했다. -박태환(수영)박태환의 등장. 한국스포츠는 새로운 역사를 맞이했다.수영 불모지에서 세계 1등이 탄생했다. 15세 나이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참가했던 그는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2007년 멜버른세계선수권 남자 자유형 400m 금메달을 따더니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아시아 최초로 400m 정상에 섰다. 200m에서도 은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3관왕, 2011년 상하이세계선수권 금메달 등 세계 정상급 기량을 이어갔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400m, 200m에서 은메달을 땄다. -장미란(역도)한국 역도 역사의 새로운 신화, 장미란이 썼다.2002년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2005년 카타르세계선수권부터 2006년 산토도밍고·2007년 치앙마이·2009년 고양까지 4연패를 일궈내며 세계 역도계에 독주체제를 구축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압권이었다. 여자 +75kg급 경기에서 인상 140 kg·용상 186 kg·합계 326kg을 기록,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했다. 이 과정에서 세계신기록을 두 번이나 경신했고, 2위와 격차가 무려 49kg이나 났다. 압도적인 우승, 압도적인 선수였다. -진종오(사격)한국은 세계최고의 권총 사수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한국에는 진종오가 있다.2008년 베이징올림픽 50m 권총에서 금메달을 딴 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2연패를 달성하더니,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세계 사격 역사상 최초로 3연패를 일궈냈다. 2010년 뮌헨·2014년 그라나다·2018년 창원 등 세계선수권에서도 연이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로 김수녕과 함께 역대 한국인 올림픽 최다 메달 공동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유승민(탁구)한국 탁구의 마지막 자존심, 유승민이다.2000년 18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된 유승민은 2004년 이집트오픈에서 우승하며 기대를 받았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남자탁구 단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16년 만에 금메달이 나왔다. 이 금메달은 21세기 올림픽에서 유일한 비중국인 탁구 금메달이었다. 이후 2012년 런던올림픽 단체전 은메달, 2018년 베이징올림픽 단체전 동메달 등을 목에 걸며 한국 탁구의 간판 역할을 했다. 유승민 이후 한국은 단 한 번도 올림픽 정상에 서지 못했다. -이승엽(야구)국민타자. 이승엽이 아니면 붙을 수 없는 이름이다.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고의 홈런왕. 1999년 54홈런을 기록하며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50홈런을 돌파했다. 2003년에는 한국 역대 최다인 56홈런을 때렸다. KBO 통산 465개의 홈런으로 역대 1위에 오른 이도 이승엽이다. 타점(1495점) 득점(1351점) 등도 1위다. 홈런왕 5회·MVP 5회·타점왕 4회·골든글러브 10회 등 기록이 이승엽의 위대함을 말해주고 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주역이기도 하다. -안현수(쇼트트랙)쇼트트랙 여제가 전이경이라면 황제는 안현수다.많은 선수들이 세계 정상에 선 경험이 있지만 안현수보다 압도적인 선수는 없었다. 쇼트트랙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선수. 16세에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2003년 바르샤바부터 2004년 예테보리·2005년 베이징·2006년 미니애폴리스·2007년 밀라노까지 세계 최초로 세계선수권 5연패를 달성했다.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1000m·1500m·5000m 계주까지 3관왕을 차지했다. 500m 동메달도 추가했다. 한국 올림픽 역사상 단일 대회 최다 메달 신기록이다. -김세진(배구)한국 배구에 등장한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스타, 김세진이다.1995년 실업배구 삼성화재의 창단멤버로 합류해 삼성화재 왕조를 이끈 스타였다. 김세진이 활약하던 시기 배구는 폭발적 인기를 받았다. 김세진을 앞세운 삼성화재는 리그 9연패를 일궈냈다. 배구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다. 2001년 창원아시아배구선수권과 2003년 톈진아시아배구선수권 우승을 이끌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도 목에 걸었다. 특히 1994년 월드리그에서 베스트 6에 오르며 월드스타라는 칭호를 얻었다. -서장훈(농구)한국 농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빅맨, 단연 서장훈이다.1994년 연세대를 대학 최초로 농구대잔치 우승을 이끌 때부터 그는 국보급 센터였다. 공격과 수비 외곽능력까지 갖춘 전천후 선수. 1998년 청주SK 입단 후 서울 삼성·전주 KCC·인천 전자랜드 등에서 활약했다. 1999년 리바운드 상 수상. 프로농구 사상 외국인 선수를 제치고 리바운드 왕을 차지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프로통산 1만3231득점·5235리바운드 기록, 역대 1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야오밍이 이끄는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최경주(골프)한국 남자 골프의 세계화를 이끈 선구자, 최경주다.1999년 한국 남자 선수 최초로 PGA투어 자격을 획득했다. 2001년부터 꾸준한 성적을 내기 시작했고, 2002년 5월 뉴올리언즈 콤팩 클래식에서 한국 첫 PGA 투어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탬파베이 클래식에서 2승을 챙겼다. 이후 AT&T 내셔널 등 PGA에서 6회 우승을 더 차지하며 통산 8회 우승을 기록했다. 한국 남자 선수로는 최고의 기록이다. 잡초 골퍼라 불리며 열악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한국 골프의 자존심을 높인 영웅이다. -박지성(축구)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환희,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그 중심에는 두개의 심장을 가진 박지성이 있었다.한국은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 등을 꺾고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성적인 4강에 진출했다. 거리는 붉은물결르 뒤덮혔고, 선수들은 국민영웅으로 등극했다. 그중 핵심은 박지성. 그는 2005년 잉글랜드 최고 명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유니폼을 입었다. 한국 최초의 잉글랜드 진출. 이때부터 맨유는 국민클럽이 됐다. 박지성은 맨유에서 리그 우승 4회 등 총 13개의 우승트로피를 수집했다. <2009~2019 : 동계스포츠의 비상 그리고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들>과거 한국의 동계스포츠는 쇼트트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달랐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다른 종목에서 세계 1등이 탄생했다. 프로스포츠에서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연아(피겨)한국 동계스포츠의 역사는 김연아가 있을 때와 없을 때로 나눌 수 있다. 피겨스케이팅 불모지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 김연아가 나온 건 기적이다.김연아는 한국을 넘어 세계 피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힌다. 하이라이트는 2010년 밴쿠버올림픽. 김연아는 쇼트 78.50점, 프리 150.06점 총합 228.56점으로 압도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올림픽·세계선수권·4대륙 선수권·그랑프리 파이널 등을 모두 제패하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최초의 선수로 역사에 기록됐다. 11번 세계신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이상화(스피드스케이팅)'빙속여제' 이상화를 빼놓고 한국 동계스포츠를 논할 수 없다.2010년 밴쿠버올림픽 여자 500m에서 76초09로 우승, 한국 여자 최초로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 74초70, 올림픽 신기록으로 2연패에 성공한다.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은메달을 기록하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3개 대회 연속 메달을 딴 선수로 남았다. 2013년 미국 솔트레이크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나온 36초36의 세계신기록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깨뜨리지 못하고 있다. -윤성빈(스켈레톤)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초로 올림픽 썰매 종목 금메달을 딴 주인공, 윤성빈이다.한국 스켈레톤의 간판인 그는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압도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평창올림픽 남자 스켈레톤 1∼4차 레이스에서 무려 3차례나 트랙 신기록을 갈아치우면서 1∼4차 합계 3분20초55로 정상을 차지했다. 한국과 아시아 동계스포츠의 새로운 역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스켈레톤 불모지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윤성빈. 그의 헬멧에 그려진 아이언맨처럼 그는 한국 스포츠의 영웅이었다. -양학선(체조)한국 체조의 새로운 역사, 도마의 신이 창조했다. 양학선이다.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에 이어 2011년 도쿄세계선수권 우승으로 큰 기대를 받았던 양학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신의 경지를 보여준다. 지구에서 단 한 명만 할 수 있는 최고난위도 기술 '양학선'을 앞세워 도마 금메달을 차지했다. 16.533점. 압도적 우승이었다. 한국 체조 역사상 첫 번째 올림픽 금메달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후 2013년 앤트워프 세계선수권에서도 우승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황경선(태권도)태권도 종주국 한국. 수많은 선수가 세계 정상에 섰다. 그중 가장 많은 최초의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이는 '태권여제' 황경선이다.18세 나이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 67kg에 나서 동메달을 차지한 그는 2005년 마드리드세계선수권과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그리고 2007년 베이징세계선수권까지 재패한다. 남은 건 올림픽.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멈추지 않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태권도 최초의 올림픽 2연패. 최초의 올림픽 3회 연속 진출을 일궈냈다. -박인비(골프)미국 LPGA에는 한국 여성 열풍이 불었다. 그 열풍 최선봉에 자리를 잡은 스타, 박인비다.골프 여제의 2008년 US오픈 우승. 박세리의 최연소 우승 기록을 깨면서 정상을 차지했다. US오픈 총 2회 우승 등 메이저대회에서 7회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최고 기록이다. LPGA 통산 19승으로 박세리에 이은 2위다. 56주 연속 세계랭킹 1위를 유지했고, 4개 메이저대회 타이틀을 모두 거머쥐는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아시아 최초로 달성하기도 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금메달 역시 박인비 품에 안겼다. -정현(테니스)2018년 1월, 한국에 테니스 열풍이 불었다. 그 바람은 정현이 일으켰다.정현은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대회 4강에 진출하는 역사를 썼다. 2018년 호주오픈 1~3라운드에서 미샤 즈베레프·다닐 메드베데프·알렉산더 즈베레프를 연이어 꺾으며 기대를 받았다. 16강 상대는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노박 조코비치.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현이 조코비치를 꺾고 8강에 진출한 것. 한국에 정현 신드롬이 일어났다. 8강에서 테니스 샌드그렌마저 넘으며 4강에 올라섰다. 4강에서 로저 페더러를 만나 부상으로 기권했다. -김연경(배구)한국 여자배구에 이렇게 독보적인 선수는 없었다. 김연경이다.흥국생명에 입단한 2005년. 득점상·공격상·서브상·신인왕·정규리그 MVP·챔피언결정전 MVP까지 싹쓸이한다. 얼마나 압도적인 선수인 지 알 수 있는 기록. 이후 3년 연속 정규리그 MVP에 올랐다. 2009년 일본 JT마베라스 유니폼을 입은 뒤 2011년 터키 페네르바체로 이적했고,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거듭난다. 가는 팀마다 우승으로 이끌면서 가치는 올라갔다. 2012년 런던올림픽 4강,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배구대표팀에서도 기둥이었다. -류현진(야구)21세기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라 불리는 그의 이름은 류현진이다.2006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자마자 다승·탈삼진·평균자책점 1위로 신인왕과 MVP를 동시석권한 프로야구 최초의 선수가 됐다. 2013년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로 이적한 첫해 14승 올리며 기대를 충족시켰다. 이후 꾸준함을 보이다 2019년 평균자책점 전체 1위를 기록, 올스타전 선발로 나서는 등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야구대표팀 역사와도 함께 했다. -손흥민(축구)지금 한국 축구는 '손흥민의 시대'다.2010년 독일 분데스리가 함부르크를 시작으로 레버쿠젠을 지나 2015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세계 톱클래스 공격수로 거듭났다. 특히 2018~2019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8강 2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 우승후보 맨체스터 시티를 침몰시켰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손흥민을 앞세운 토트넘은 최초로 결승에 올랐다. 축구대표팀에서도 에이스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 독일전 승리 주인공.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품었다. 최용재·김지한 기자 2019.09.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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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간 더 성장" 투자받는 류준열

과도기를 거쳐 안정권이다. 배우 류준열이 빠르지만 차근차근, 올바른 길로 성장 중이다. 지난 3년간 '반짝 스타'가 아닌 '믿고 볼만한 배우'로 제 필모그래피를 겹겹이 쌓은 류준열이다. 쉼없이 달렸고, 수 많은 평가를 받으며 '배우 류준열'을 각인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 결과 류준열의 영화계 내 입지는 '투자를 받을 수 있는 배우', 더 나아가 '투자자가 찾는 배우'로 더욱 탄탄해졌다. 자신을 일약 스타덤에 올린 tvN '응답하라1988' 이후 스크린 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류준열은 '더킹(한재림 감독)'을 시작으로 '택시운전사(장훈 감독)' '침묵(정지우 감독)' '리틀포레스트(임순례 감독)' '독전(이해영 감독)' '뺑반(한준희 감독)' '돈(박누리 감독)'까지 다양한 작품에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배우로서 가능성을 내비쳤다. 물론 MBC '운빨로맨스'를 통해 '응답하라1988' 이후 다시 한 번 드라마에 도전하기도 했지만, 드라마 보다는 배우 발걸음의 첫 시작점이었던 영화에서 조금 더 깊숙히 자리잡는 것이 맞는다고 판단, 스크린으로 눈을 돌린 것은 꽤 영리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흥행이 주 목적이 되는 상업영화 필드에서 타율까지 더할나위없이 흡족하다. 류준열은 '응답하라1988'을 통해 얻은 인기가 단순 거품이 아니라는 것도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응답하라19988'로 인지도가 높아진 것은 맞지만, 당시 영화계 내 류준열의 입지는 독립영화에서 주목 받으며 막 기지개를 피려는 신예에 불과했던 것이 사실. 남배우 트로이카'로 불리며 국내를 넘어 한류를 이끄는 톱스타로 스스로 브랜드화 된 김수현·송중기·유아인의 벽이 꽤 높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류준열을 점 찍었다. 김수현을 비롯한 또래 남배우들의 연이은 군 입대와 송중기의 결혼 후 공백 등으로 충무로 젊은 피 수혈이 뚝 떨어지면서 류준열의 등장은 오히려 영화계를 반색하게 만들었다. 류준열은 찾아 온 기회를 또 놓치지 않았고 물 들어올 때 제대로 노를 저었다. 그것도 열심히, 참 잘 저었다. 아무리 배우가 없다고 한들 진짜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수 많은 경쟁에서 류준열은 실력으로 눈에 띄었고, 수혜를 입을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결과는 '30대를 대표하는 배우' 타이틀. 대체불가 류준열의 독보적인 이미지도 자연스레 완성됐다. 무엇보다 류준열은 단순 캐스팅 보드에 많이 오르내리는 배우가 아닌, 제작사와 투자자가 콕 집어 움직이고자 하는 배우로 무게감이 더욱 커졌다. 성공을 우선시 하는 투자자 입장에서는 흥행이 보증되는 배우를 원할 수 밖에 없을 터. 때론 작품의 장르, 캐릭터의 싱크로율과 상관없이 캐스팅 하고 싶은 배우의 이름부터 언급하기 마련인데 그 라인업에 류준열 역시 당당하게 자리 잡았다. 몇몇 소속사 관계자들은 "배우마다 목표는 다르겠지만 소속사 입장에서는 0순위 캐스팅이 되는 배우를 키우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라 할 수 있다. 누구보다 먼저 캐스팅 선상에 오르고 싶고, 내 배우를 위해 쓰여졌다는 시나리오를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며 "작품의 크기 등 종류와 선택의 조건도 많겠지만 결과적으로 통상적인 '투자 배우 라인업'에 들어가는 것은 상위 1%, 하늘의 별따기다. '어떻게 하면 저기에 들어가냐'는 우스갯소리도 한다"고 말한다. 제작자들의 입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류준열은 이미 류준열을 주인공으로 원하는 시나리오를 받은지 꽤 됐다. 최근에는 더 나아가 "류준열이 아니면 안 된다"며 최소 2~3개월은 일단 기다리고 보는 작품들도 생겼다. 원하는 곳이 많아진 만큼 소속사와 류준열 입장에서는 더욱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 행복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류준열은 현재 '전투(원신연 감독)' 여름 개봉을 앞두고 데뷔 후 처음으로 꿀맛같은 휴식을 얻었다. 촬영 없이 해외여행 등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있는 것. 차기작은 최동훈 감독의 신작이 될 가능성이 크다. 크랭크인 시기에 따라 하반기 활동 계획은 유동적이다. 성장했고, 성장하고 있고, 또 성장해 나갈 류준열. 3년 후엔 또 어떤 배우로 성장해 있을지 지켜보는 맛이 쏠쏠하다. 조연경 기자 cho.yeongyeong@jtbc.co.kr 2019.06.12 08:08
야구

[김인식의 클래식] 로사리오의 일본 실패, 한국 투수가 얻어야 할 교훈

지난 5월 31일 서울에 온 장훈 선배와 식사했다. 그 자리에서 장 선배는 윌린 로사리오(한신)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올해 초 장 선배가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 갔을 때 있었던 일화다. 가네모토 도모아키 한신 감독이 '한국에서 좋은 선수를 데려왔다'고 했다더라. 가네모토 감독은 재일교포 출신이어서 장 선배를 아버지로 부를 정도로 친분이 두텁다. 캠프에서 언급한 '좋은 선수'는 바로 로사리오. 그러나 현지에서 로사리오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KBO 리그에 있다 돌아간 일본인 코치 대다수가 '좀 더 두고봐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해가 잘 안 됐지만, 시즌이 막상 시작되니 공감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로사리오의 2018시즌은 사실상 실패에 가깝다. 2년 최대 약 750만 달러를 받는 메가톤급 계약에 합의했지만 타율 0.203 4홈런 22타점을 기록한 뒤 6월 초 1군에서 제외됐다. 한신은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새 외국인 타자 에프런 나바로를 영입한 상태다. KBO 리그에서 2년 동안 타율 0.330 70홈런 231타점을 기록한 성적이 무색할 정도로 일본 적응에 애먹고 있다. 시사하는 바가 꽤 크다. 내가 두산 감독(1995~2003)을 맡고 있었을 때 타이론 우즈라는 외국인 타자가 있었다. 우즈는 1998년부터 5년 동안 무려 174홈런을 기록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출발이 화려했던 것은 아니다. 첫 시즌이었던 1998년 초반엔 어려움이 많았다. 변화구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5월 중순까지 헤맸다. 하지만 견뎌 내면서 서서히 극복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주니치에서 뛰면서 홈런왕을 차지하는 등 최고의 거포가 된 비결은 결국 KBO 리그에서 여러 변화구에 대한 적응을 마쳤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당시엔 정민태·정민철·송진우·구대성·손민한·박명환·이대진 등 리그 투수의 질이 지금보다 더 높았다. 우즈가 보여 준 일본에서 거둔 성공은 한국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실현됐다. 가만히 생각해 봤을 때 로사리오가 뛰었던 2016년과 2017년엔 KBO 리그에 뛰어난 투수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과 비교하면 양과 질에서 큰 차이가 난다. 로사리오가 한국에 있으면서 상대했던 변화구는 스피드도 느리고 휘어지는 각도 예리하지 못한 공이었다. 우즈가 활약하던 시절엔 변화구가 더 위력적이었고, 구속까지 빠르다 보니 타자 대처가 어려웠다. 현재 일본리그와 KBO 리그는 변화구 하나만 비교해도 격차가 크다. 일본인 코치들이 '빠른 변화구를 못 이겨 내는 것 아니냐'고 염려했던 이유 중 하나다.장 선배와 만남 이후 로사리오는 결국 2군에 내려갔다. 씁쓸하지만 우리나라의 투수력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2014년부터 2년 동안 연평균 40홈런에 육박하는 79홈런을 때려 낸 야마이코 나바로는 어떤가. 나바로도 삼성에서 거둔 성공을 지렛대로 삼아 일본 진출에 성공했지만 활약은 거의 보여 주지 못하고 짐을 쌌다.올 시즌엔 한화 제러드 호잉이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호잉은 스트라이크존을 크게 벗어나는 터무니없는 공에 반응하지 않고, 미국에서 결정적인 순간 대타로 뛴 경험이 있다. 베스트는 아니어도 대타 전문으로 여러 가지 상황에 익숙하다. 성공할 수 있는 자질이 분명 있지만, 본인도 아마 올 시즌 홈런을 이렇게 많이 칠 줄 예상하지 못했을 수 있다. 호잉의 결과에도 한국의 투수가 약한 것이 어느 정도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KBO 리그에서 거둔 성공이 일본에서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로사리오와 나바로의 일본 실패는 한국 야구가 간과하면 안 되는 '결과'다. 김인식 전 국가대표 감독정리=배중현 기자 2018.07.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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