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단기전 최강자 '미스터 롯데' 김용희…"KS 우승 때 믿을 건 최동원·응원뿐"
등록2020.09.25 05:40
롯데 자이언츠의 홈 연고지 부산은 '구도(球都)'로 통한다. 그만큼 야구 열기가 뜨겁다. 프로 출범 전에는 지역 고교 경남고와 부산고의 인기가 어마어마했다.
1975년 6월 실업팀으로 창단한 롯데는 1982년 프로팀으로 전환해 원년 구단의 자부심을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를 배출했다. '사직 노래방'은 해외 언론에 소개될 정도로 뜨거운 분위기를 자랑한다.
1984년과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정규시즌 우승은 아직 한 번도 없지만 팬들의 열성적인 응원만큼은 '최고'로 손꼽힌다.
1982년 출범 첫 시즌 김용희(65)는 롯데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경남고 출신인 그는 실업팀 포항제철을 거쳐 롯데의 개막전 4번 타자를 맡아, 팀의 첫 승리를 확정 짓는 결승타의 주인공이다. 1981년 허리 부상 탓에 고질적인 통증에 시달렸지만, 단기전에 강했다. 올스타전 MVP에 두 차례 선정되는 등 '미스터 롯데'로 불리기도 했다.
김용희 경기 운영위원장이 '1982 롯데' 선수단을 대표해 당시 이야기를 꺼냈다. 故 최동원의 활약, 부산의 뜨거웠던 야구 열기부터 친구 박철순(OB 베어스)에 관한 추억까지 끄집어냈다.
-부산 출신으로 롯데에 입단, 그것도 개막전에 4번 타자로 출전했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와 개막전이 구덕야구장에서 열렸다.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악한 시설이었지만, 열기는 정말 대단했다. 관중석이 꽉 들어찼다. 특별히 4번 타자에 의미를 두진 않았고, 팀 승리에만 열중했다."
-14대2로 크게 이긴 해태와 개막전에서 1회 결승타를 쳤다. "1회 무사 만루에서 중견수 앞 적시타를 쳤던 거로 기억한다. 당시 상대 투수가 누구였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현역 당시 별명이 '미스터 롯데'였다. "팬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아마추어 당시 국가대표를 경험해 부산 팬들에게 익숙했고, 첫해 올스타전에서 미스터 올스타(1982년과 1984년 두 차례 수상)에 뽑혀 롯데의 상징이 되지 않았나 싶다."
-두 차례 미스터 올스타 수상 때 상품은 어떻게 했나. "1982년 대우 맵시 자동차를 받았다. 당시 자가용이 없어 내가 직접 탔다. 2년 후엔 맵시나였다. 2년 전에 받은 맵시를 지인에게 주고, 새로 얻은 승용차를 한동안 이용했다." (다만 KBO 자료에 의하면 1984년 MVP 부상은 대우 로열 XQ다.)
-1984년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당시 삼성 전력과 한 마디로 비교하면 굉장히 열세였다. 삼성은 호화군단으로 타격과 마운드, 수비 모두 우리보다 우세했다. 우리가 믿을 건 최동원의 존재, 또 분위기였다. 그거로 싸웠다. 최동원이 전인미답의 한국시리즈 4승을 올렸다. 그 과정에서 다이나믹하고 드라마틱한 모습을 연출했다. 선수단 분위기를 한데 모으는 힘이었다. (삼성의 져주기 논란도 선수단 분위기에 영향을 끼쳤나?) 그렇다. 삼성이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롯데를 택한 것도 우리를 자극했다. 구덕에서 맞대결하는데 페어플레이에서 상당히 어긋나는 느낌을 받았었다."
-당시 롯데의 인기는 어땠나. "팀 성적이 좋을 때 엄청난 열기였다. 반면 1982~83년 각각 0.388(6개 팀 중 5위), 0.434(6위)의 승률에 그쳤을 땐 팬들의 비난도 많았다. 부산이 야구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프로야구 출범 전부터 라디오 주파수를 잘 조절하면 다른 지역에선 불가능했지만, 부산에선 일본 야구 중계 청취가 가능했다. 그 당시 연세가 높은 어르신들은 일본어에 능통했다. 일찍부터 야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어떻게 하면 승리하는지 알았다. 라디오를 틀면 항상 야구 중계가 이뤄졌다. 1984년에 우승 땐 난리 났다."
-반면 팬들의 뜨거운 열기 탓에 고충도 있었을 텐데. "경기에 지면 팬들이 버스를 막고 '왜 졌냐'고 따졌다. 야구장을 빠져나오는데 한 시간 넘게 걸리곤 했다. 소위 제6공화국 때 정치권에서 청문회가 한창이었는데, 야구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청문회' 풍경이 연출됐다. 버스를 흔들어 버스가 넘어질 듯한 상황도 있었다. 팀 성적이 안 좋을 때 경기 중에 욕을 하거나, 물건이 날아올 때도 있었다. 입장권을 사지 못한 일부 팬들이 외줄 타기 하듯이 40~50m 높이를 올라와 관중석에 들어오곤 했다. 연습 장비를 두는 좌측 외야를 무단으로 뚫고 경기장에 들어오신 분들도 계셨다.
-당시에도 키가 아주 컸다. 야구 열기가 높은 부산에선 어딜 가든 눈에 띄었을 것 같다. "실제로 그랬다. 고등학교 때부터 키가 컸다. 경남고 3학년 때 청룡기 대회에서 우승해 부산에서 카퍼레이드를 했다. 당시 부산 시내에 나가면 대부분 알아봤을 정도였다. (여성 팬도 많았나?) 야구장에 와서 관전하는 정도였다. 팬레터가 많을 때 100통씩 받곤 했다."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 일본전에서 역전 적시타를 기록하는 등 아마추어에서 화려함에 비해 프로에선 일찍 은퇴했다. (당시 대회 종료 후 포지션 별 최고 선수를 선정했다. 김용희 위원장은 일본 요미우리의 하라 다쓰노리 감독을 제치고 베스트 3루수로 뽑혔다.) "맞다. 아마추어 시절 활약에 비하면 다소 일찍 은퇴했다. 프로 출범을 앞둔 1981년, 실업야구 포항제철에 몸담았다. 당시 경기 도중에 베이스 러닝을 하다가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포항제철 감독님께서 '야구를 그만두고 사무직으로 옮기자'라고 권하셨다. 그 당시에는 의료진의 수술이나 구단의 재활 실력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열악했다. 수술대에 오르면 유니폼을 벗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수술을 기다렸다. 그런데 수술을 하기로 한 당일에 못 본 의사가 오더니 '너 김용희 맞네'라고 하시더라. 수술 전 회의 때는 '김용희'라는 이름만 봤을 뿐, 내가 야구 선수인지 몰랐던 거다. 그 의사 분이 '수술하면 야구 선수 생활이 끝난다. 그러니 수술하면 안 된다'라고 하더라. 그래서 수술이 취소됐다. 약 3개월 후에 퇴원했다."
-그래서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됐나. "그렇다. 다만 늘 허리에 통증을 안고 뛰었다. 허리를 제대로 숙이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전 경기 출전이 어려웠고, 정규시즌 성적(8시즌 통산 535경기, 타율 0.270 61홈런 260타점)도 안 좋은 편이다. 반면 포스트시즌과 같은 단기전이나 올스타전에선 좋았다. 조금 아파도 일주일은 눈을 딱 감고 참으며 뛸 수 있어서다. 당시 3루수로 나섰는데 옛날 수비 사진을 보면 다소 이상할 것이다. 허리가 아파서 (무빙하지 않고) 무릎에 손을 대고 있었다. 투수가 공을 던질 때 손을 조금 뗐다. 그만큼 통증에 시달렸다. 요즘에는 구단별로 트레이너가 3~5명 있지만, 당시에는 그냥 다친 부위에 파스 뿌리면 끝이었다."
-프로야구가 개막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어땠는지. "선망의 대상이었다. TV를 통해 일본 무대에서 활약한 장훈, 백인천 등 당대 최고의 선수 플레이를 보며 자랐다. 일본은 잔디 그라운드에, 관중석도 꽉 들어찬 모습이 부러웠다. 우리도 일본처럼 프로야구가 출범한다고 듣고선 굉장히 반겼다."
-프로 무대를 경험한 뿌듯함과 아쉬움이 교차할 것 같다. "정말 뛰어난 능력을 지닌 선배들도 밟지 못한 프로야구를 경험해 정말 행복했다. 프로야구 초창기여서 몸 관리를 비롯해 다양한 노하우를 전수받았다면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도 든다. 선수 때 너무 많이 아팠다."
-프로야구 원년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를 꼽자면. "단연 박철순(OB베어스)이다. 투구가 워낙 뛰어났다. 당시 22연승 대기록을 작성하지 않았나. 요즘은 투수 대부분이 체인지업을 던지지만, 그때는 박철순이 던진 체인지업의 구종 자체를 모를 시기였다. 박철순은 내 초등학교 친구다. 동광초에서 같이 야구를 했다. 경남중에 함께 진학했는데 키가 작았던 철순이가 1년을 쉬었다. 이후 서울(배명고)로 전학 갔다. 프로에서 만난 박철순은 정말 상대하기 어려운 투수였다. 기록을 자세히 모르지만, 상대 전적이 별로 안 좋았던 것 같다. (박)철순이의 체인지업을 보고선 다음 타자에게 상대한 느낌과 구종을 일러줄 때 '공이 오다가, 안 온다'라고 표현했다. 공이 직구처럼 날아오다가 홈 플레이트 근처에서 갑자기 아래로 휘어지며 속도가 뚝 떨어졌다. 1983년 롯데 자이언츠로 야구 선교사가 와 기술을 전수한 적 있다. 당시 투수들에게 써클 체인지업을 알려줬는데 우리 선수들이 '어떻게 공을 저렇게 던지노'라고 그냥 넘겼을 정도로 무지했다. 그때 투수 구종은 직구, 슬라이더, 커브 정도였으니 (박)철순이의 공을 치기 아주 까다로웠다."
-프로야구 원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첫 시즌 80경기 체제로 운영했다. 대개 팀당 일주일에 4경기 했다. 연고 구단이 없는 춘천을 비롯해 지방에서도 경기했다. 선수들 의식이 아마추어리즘이었다. 왜냐면 프로야구가 처음이었으니까."
-현역 은퇴 후 1992년 롯데 우승 당시 코치를 역임했다. 이듬해 바로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다. "시즌 전에 구단에 이런 의사를 미리 전했다. 미국에서 야구에 관한 기초를 배우고 싶었다. 구단은 우승 후에 만류했지만, '이때 아니면 갈 수 없겠다"라고 생각해 무조건 갔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씩 총 4번 정도 미국 연수를 다녀왔다."
-롯데, 삼성, SK에서 감독을 지냈다. 그라운드의 신사로 통하며 인자한 모습이었다. "안 좋은 거다. 감독은 어떻게든 성적을 올려야 하는 위치다. 감독으로서 코치들을 이끌며 선수들이 최선의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 (정규시즌 기준 통산 성적은 452승 501패 23무, 승률 0.474다.)
- 최근 프로야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선수가 있다면. "이정후(키움) 강백호(KT)다. 이정후는 故 장효조와는 또 다르게 정말 정교한 타격을 한다. 강백호는 지금껏 KBO리그 타자 가운데 스윙이 가장 빠른 듯하다. 아직 완전체는 아니지만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지녔다. 하드웨어와 근성이 뛰어나 아주 좋은 선수가 될 것이다."
-경기 운영위원으로 매일 프로야구 현장을 누빈다. "정말 바쁘다. 경기 진행 여부와 경기장 상태, 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관련해 선수단 입장 등을 체크한다. 바쁜 것보다 관중이 입장하지 못해 마음이 더 아프다. 얼른 코로나19가 사라져 팬들이 경기장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선수단도 관중의 소중함을 많이 느낄 것이다. 모든 것이 정상화되면 선수단이 성숙하게 바뀌어 있을 것으로 여긴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가 이토록 발전한 건 선수와 구단의 노력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가 팬들의 성원 덕분이다. 앞으로 더 많은 응원과 관심을 보내주시면, 선수들은 좋은 경기와 팬서비스로 보답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