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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일반

'파리 올림픽 도전' 양학선 "'도마의 신' 끝까지 지킨다, 청년들도 많이 도전했으면"

“‘도마의 신’이요? 은퇴할 때까지 꼭 지키고 싶죠.”체조선수 양학선(30)은 한국 체조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AG) 금메달리스트로 혜성처럼 등장하더니,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대한민국 체조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따면서 ‘체조 전설’로 거듭났다. 이후 양학선은 자신의 이름을 딴 도마 최고 난도 기술 ‘양’을 개발해 세계 무대를 주름잡았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기술을 ‘양2’와 ‘양3’로 발전시켰다.하지만 불의의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2016 리우 올림픽을 앞두고 햄스트링과 오른쪽 아킬레스건 파열 부상을 당하며 대회 출전이 좌절됐다. 긴 재활 훈련의 터널 끝에 참가한 2020 도쿄 올림픽에선 부상 트라우마로 제대로 착지하지 못했다. 항저우 AG 국가대표 선발전 이후인 지난 4월엔 반대쪽(왼쪽)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 부상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양학선은 멈출 생각이 없다. 한때 은퇴 고민도 했지만, 주변의 응원 속에 2024년 파리 올림픽까지 도전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양학선은 ”은퇴하고 나서 후회하기 싫었다. 옆에서 아내도 ‘할 수 있을 때 즐기면서 더 많이 해라’는 말을 계속해 주다 보니 용기가 생겼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봄 인기 예능 프로그램 ‘피지컬:100’에 출연해 남다른 저력을 보여주며 해외 팬들의 많은 응원을 받기도 했다. 자신감을 얻은 양학선의 시선은 2024년을 향하고 있다. 그는 “파리 올림픽에 집중하기 위해 올해 항저우 AG 출전은 (부상 전부터) 내가 먼저 내려놨다(포기했다)”라고 말했다. 아직 재활 훈련 중인 양학선은 “몸을 잘 회복해서 오는 10월 열리는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부터 올림픽까지 영혼을 갈아 넣어 훈련을 하려고 한다”라고 힘줘 말했다. 양학선의 목표는 ‘도마의 신’ 타이틀을 지키는 것이다. 여전히 양학선을 수식하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최근 성적이 다소 아쉬운 게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마의 신’은 수성인 동시에 도전 과제다. 양학선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부담이 됐다. 두 번째 올림픽인 도쿄 대회 때도 심적으로 부담이 컸다”라면서도 “지금은 (좋은 성적을 거둬) 되찾아 오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은퇴할 때까지 이 타이틀을 지켜내는 것이 마지막 목표”라고 각오를 다졌다. 양학선은 지난 26일 청년의 날 홍보대사에 위촉됐다. 청년의 날은 청년의 권리보장 및 청년발전의 중요성을 알리고 청년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법정으로 제정된 기념일이다. 양학선은 또 한 명의 ‘청년’으로서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함께 성장하고자 홍보대사직을 수락했다. ‘도전의 아이콘’ 양학선은 “청년이라고 무조건 도전을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청년들이 도전을 원동력 삼아 자기의 길을 잘 찾아갔으면 한다”면서 “많이 실패해 봐야 자신이 더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갈 수 있다. 청년들이 더 많이 도전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윤승재 기자 2023.09.02 08:00
스포츠일반

부상 이겨낸 신유빈, WTT 컨텐더 단식-혼합복식 2관왕

신유빈(대한항공)이 부상을 이겨내고 국제대회 2관왕에 올랐다. 세계랭킹 34위 신유빈은 6일(현지시간) 슬로베니아 노바고리차에서 열린 월드테이블테니스(WTT) 컨텐더 대회 여자 단식 결승에서 샤오신 양(14위·모나코)을 4-3(11-6 12-10 11-2 10-12 9-11 6-11 11-6)으로 제압하고 우승했다. 신유빈은 임종훈(KGC인삼공사)과 짝을 이뤄 출전한 혼합복식 결승에서도 인도의 사티얀 그나나세카란-마니카 바트라 조(6위)에 3-0(11-7 11-7 11-5)으로 이겨 1위에 올랐다. 신유빈이 국제대회에서 개인 단식 우승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신유빈은 지난해 11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오른 손목 피로골절 부상을 입었고, 그 여파로 올해 국가대표 선발전에도 나서지 못했다. 올 초 손목에 핀을 박는 수술을 받고 재활 끝에 국제대회에 나섰으나 9월 WTT 오만, 카자흐스탄 대회에서 손목 통증이 재발해 만족할 만한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는 지난 9월 말 손목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아 한 달여 재활을 거쳤다. 신유빈은 매니지먼트사를 통해 "부상에 낙담하지 않고 재활과 훈련에 정말 많은 노력을 해왔는데 이번 우승을 통해 조금이라도 노력의 결실을 본 것 같아 기쁘다"면서 "이제부터가 시작이기 때문에 한 단계씩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은경 기자 2022.11.07 15:28
프로축구

[한일 축구의 과거와 미래①] 황선홍 감독이 한일전 통해 얻은 고민 "한국 축구 색깔은 무엇인가"

황선홍(54) 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은 선수 시절 ‘일본 킬러’였다. 그런 그가 감독으로서 한일전 참패의 쓰디쓴 경험을 했다. 과거 일본을 상대할 때 배수의 진을 치고 덤벼들었던 한국 축구는 최근 각급 대표팀이 4연속 ‘0-3 패배’를 당하는 굴욕을 경험했다. 이 중에는 황선홍 감독이 이끄는 23세 이하(U-23) 축구대표팀이 6월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8강전에서 기록했던 0-3 패배도 있다. 선수와 지도자로 치열한 한일전을 모두 경험해본 황선홍 감독에게 한일전에 관해 물었다. 과연 한국 축구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에게 한일전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U-23 대표팀 감독으로서 아시아 최강팀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이야기를 나눠봤다. 경기도 분당의 한 카페에서 만난 황선홍 감독은 “선수 때 한일전은 월드컵 경기만큼 비중이 컸다. 지면 안 된다는 생각만 있었다. 일본에 패하면 선수에 대한 비난, 언론 질타 같은 후폭풍이 매우 컸다. 한일전만큼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질 수 있게끔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말했다. 〉〉기사 이어집니다. 황선홍 감독은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8강에서 한국은 일본과 맞붙었다. 이 경기에서 멀티 골을 넣은 황선홍 감독은 “일본이 한국의 상대로 정해지자 다들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집중하기 시작했다. 라커룸에서 본 선수들의 눈빛부터 달랐다. 누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선수들 스스로 일본과 경기에서는 그렇게 돌변했다”며 돌아봤다. 요즘 한국 축구에 투지력과 정신력이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러나 젊은 선수들을 지도하는 황선홍 감독은 정신력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황선홍 감독은 “경기장에서 평정심을 유지해 냉정한 플레이를 하는 게 정신력이지 않나. 선수들한테 정신력으로 이기자고 강요해선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축구로 이길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요즘 젊은 친구들은 한일전을 수많은 경기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시대의 흐름이지 않나. ‘너희들이 태극기를 달고 뛰면 무조건 일본은 이겨야 해’라는 논리보다 ‘어떤 방법을 꺼내 일본을 제압할 것인가’를 제시해야 한다. 강요만 해서는 설득이 안 된다. 지도자로서 선수들에게 동기부여하는 부분에 대한 고민이 참 많다”고 덧붙였다. ━ 한국 축구의 ‘색깔’ 고민해야 황선홍 감독은 선수 시절 아시아 최고의 타깃형 스트라이커였다. 이런 그는 “한국 축구의 색깔이 무엇일까, 장점은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든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한국 축구의 장점은 속도라고 본다. 빠른 스피드를 이용해 직선적이었다. 공·수 전환이 재빨랐고, 아주 저돌적이었다. 지금은 이런 장점이 없어진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아 기존의 장점을 발전시킬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시기”라고 강조했다. 발전된 축구 전술 등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괴리감이 나타났다. 최근 세계 축구의 트렌드는 빌드업(패스 위주의 공격전개), 게겐프레싱(강한 전방압박)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국 축구대표팀의 파울루 벤투 감독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세계 축구 트렌드에 부합하는 축구를 접목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개인 기술이 부족한 한국 선수들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황선홍 감독은 “세계 축구의 트렌드는 계속 변한다. 그러한 축구가 나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다만 한국 선수에게 맞는 축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빌드업과 더불어 우리 선수와 축구에 맞는 지향점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유소년 및 학생 축구의 잣대는 프로와 대표팀이지 않나. 대표팀-프로-유소년이 함께 가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현재 한국 축구는 과도기다. 더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혼선이 나타났다. 후방 빌드업 등 좋은 기술이 접목되지 않으면 더 나은 축구를 할 수 없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상대 선수와 투쟁, 몸싸움 등을 강조해야 한다. 기술 축구를 하기 위해 거친 플레이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유로 (한국 축구가) 어려움을 겪는 단계가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일본은 자국 축구의 약점을 지도자 교육을 통해 보완하기 시작했다. 지도자 교육 강좌에서 일본 선수가 몸싸움에 져 나뒹구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아무 말도 없이 15분 동안 보여주기도 했다. 몸싸움을 이겨내지 못하면 축구 강국과 대결해 이길 수 없다는 경각심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현재 J리그와 일본 대표팀 모두 저돌적이고 빠른 템포의 경기가 가능해졌다. 반면 한국 축구는 소극적으로 변했다는 게 황선홍 감독의 진단이다. 그는 “우리의 강점이 없어졌다. 약간 정적인 축구가 돼버렸다. 한국은 파워풀한 축구가 사라지고 얌전하게 패스만 하는 축구를 하고 있다. 일본과 반대가 됐다. 예전에 우리가 장점으로 삼았던 속도, 공간 침투와 움직임을 일본이 보여주고 있다. ‘축구 류(스타일)’가 바뀌었다”고 짚었다. 한국 축구만의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색깔을 찾아야 한다는 게 축구계의 지적이다. 한국 축구의 방향성을 정립하기 위해 황선홍 감독은 ▶인적 자원 투자 ▶지도자 교육 ▶유소년-프로-대표팀의 축구 스타일 정리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황 감독은 “어떠한 축구를 시도하겠다는 정책의 일관성이 없다. 대한축구협회, 프로축구연맹 등이 머리를 맞대고 방향성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황선홍 감독은 “한국과 일본의 전반적인 시스템, 저변, 투자 규모 등에 차이가 있다. 이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과 일본의 격차가 벌어지는 건 사실이다. 일본의 움직임을 봤을 때 (한국이) 미래지향적인 방법을 실행하지 않으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면서도 “난 늦지 않았다고 본다. 한국 축구는 경쟁력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대한축구협회에서도 많이 고민하고 변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만의 축구 문화 등을 정리해 나간다면 일본과 격차를 줄일 수 있다고 본다. 우리의 실정에 맞는 좋은 시스템을 고민해야 한다. 축구가 국민에게 주는 희열과 감동을 우리는 직접 눈으로 확인했지 않은가.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마음을 한데 모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성남=김영서 기자 zerostop@edaily.co.kr 2022.10.05 11:35
프로축구

[한일 축구의 과거와 미래①] '일본 킬러'에서 '올림픽팀 지도자'로...황선홍 감독이 돌아본 한일전

황선홍(54) 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은 선수 시절 ‘일본 킬러’였다. 그런 그가 감독으로서 한일전 참패의 쓰디쓴 경험을 했다. 과거 일본을 상대할 때 배수의 진을 치고 덤벼들었던 한국 축구는 최근 각급 대표팀이 4연속 ‘0-3 패배’를 당하는 굴욕을 경험했다. 이 중에는 황선홍 감독이 이끄는 23세 이하(U-23) 축구대표팀이 6월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8강전에서 기록했던 0-3 패배도 있다. 선수와 지도자로 치열한 한일전을 모두 경험해본 황선홍 감독에게 한일전에 관해 물었다. 과연 한국 축구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에게 한일전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U-23 대표팀 감독으로서 아시아 최강팀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이야기를 나눠봤다. 경기도 분당의 한 카페에서 만난 황선홍 감독은 “선수 때 한일전은 월드컵 경기만큼 비중이 컸다. 지면 안 된다는 생각만 있었다. 일본에 패하면 선수에 대한 비난, 언론 질타 같은 후폭풍이 매우 컸다. 한일전만큼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질 수 있게끔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말했다. ━ ‘일본 킬러’였던 황새 선수 시절 황선홍의 대표적인 한일전은 1998년 4월 1일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 친선전이다. 폭우 속에서 치러진 이 경기를 보기 위해 5만 명이 넘는 만원 관중이 들어찼다. TV 시청률은 최고 73%까지 나왔다. 당시 한일전이 국민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 수 있는 수치들이다. 당시 한국은 경기 직전까지 일본에 2연패를 당하고 있었다. 황선홍은 부상 탓에 1년 4개월간 재활 훈련을 한 뒤 이 경기를 통해 대표팀에 복귀했다. 한국과 일본이 1-1로 맞서던 후반 27분 황선홍이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을 맞았다. 그러나 그라운드가 비에 흠뻑 젖어 공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순간 일본 골키퍼 가와구치 요시카쓰가 뛰어나와 공을 잡으면서 득점 기회가 날아간 듯했다. 그 순간 선수 공이 누군가의 발에 맞고 솟구쳐 오르자 황선홍이 황새처럼 날아올랐다. 그리고 시저스킥으로 골망을 갈랐다. 결승 골이었다. 황선홍은 선수 시절 네 차례 일본전에 나서 5골을 터뜨렸다. 놀랍게도 이 골은 모두 결승 득점이었다. 선수 시절을 회상하던 황선홍 감독은 “한일전은 국민의 관심이 상당히 크지 않나. 나는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포지션인 공격수이다 보니 (팬들로부터 받는) 기대가 상당히 컸다. ‘일본 킬러’라는 별명이 부담으로도 다가왔다. 한편으로는 일본이 그만큼 ‘나를 두려워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떠올렸다. 그가 한일전 무패 기록을 이어갔던 원동력으로 꼽은 건 ‘선수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이다. 모두가 한일전만큼은 절대로 져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대화하며 경기를 준비했다는 것이다. 황선홍 감독은 “최용수, 이상윤 등 공격수들과 경기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정말 많이 대화했다”며 “내가 골을 넣어야 승리할 수 있으니까 다른 경기보다 골 욕심이 컸다”고도 했다. 황선홍 감독은 “한국은 항상 최고의 공격수들을 갖고 있었다. 대형 공격수에 의해 승부가 많이 결정됐다”고 꼽았다. 또 하나의 승리 비결은 신체조건에서 우위였다. 건장한 체격(1m83㎝·79㎏)의 황선홍은 비교적 왜소했던 일본 선수들을 몸싸움에서 압도했다. 황선홍 감독은 “당시 일본 선수들은 체격이 조금 작고 스피드가 느렸다. 대신 교과서적인 축구, 즉 패스 위주의 기술 축구를 했다. 체격 조건이 좋았던 한국이 힘으로 일본을 눌러버리면 이길 수 있었다”고 짚었다. ━ 저돌적으로 변한 일본 축구 0-17. 지난해부터 올해 9월 중순까지 한일 연령별 축구대표팀의 점수 합계다. 한국은 ▶2021년 3월 A대표팀(0-3 패) ▶2022년 6월 16세 이하(U-16) 대표팀(0-3 패) ▶6월 23세 이하(U-23) 대표팀(0-3 패) ▶6월 대학 선발팀(0-5 패) ▶7월 A대표팀(0-3 패) 경기에서 5연패를 당했다. 황선홍 감독이 이끄는 U-23 대표팀은 6월 12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파흐타코르 스타디움에서 열린 일본과 U-23 아시안컵 8강전에서 0-3으로 졌다. 일본은 한국을 상대로 한 수 위의 경기력을 뽐냈다. 황선홍 감독은 “상당히 안 좋게 끝났다. 준비도 부족했다. 누구를 탓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며 고개를 숙였다. 황선홍 감독은 “일본의 축구 스타일이 바뀌었다. 예전의 일본 축구는 얌전했다. 섬세한 기술이 좋았다. 최근 기존 강점에 적극적으로 뛰는 저돌성까지 생겼다. 공간이 생기면 침투하고, 패스 타이밍도 빨라졌다. 축구의 다양성이 생겼다. 과거 일본은 패스 축구에 한정된 플레이를 해 대비하기 쉬웠다. 이젠 다양한 축구가 가능해져 대응하기 상당히 어려워졌다”고 짚었다. 축구계는 일본이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더 강한 축구’를 만들었다고 본다. 일본축구협회(JFA)는 ‘2030년 월드컵 4강 진출, 2050년 월드컵 우승’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위해 장기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겼다. 유소년 시절부터 JFA가 만든 가이드라인에 맞춰 일관된 교육 시스템을 구축한 게 단적인 예다. 자국보다 ‘축구를 더 잘하는’ 국가의 선진 시스템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황선홍 감독도 일본의 장기 계획이 성공궤도를 달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일본 축구는 세계의 중심으로 가는 게 그들이 가진 첫째 목표인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에서 계속 상대해야 하는 한국을 꺾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수십 년 전부터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서 실행을 시작했다. 이제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국과 일본 선수 간의 기량 차이가 벌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 선수들은 충분히 경쟁력이 있고,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일본 선수들의 의식이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옛날 한국 축구처럼 한다. 공격 방향으로 돌진하는 도전적인 플레이가 크게 늘었다. 반면 한국은 실수를 줄이려는 안전한 축구를 하려고 한다. 한국과 일본의 축구가 서로 바뀌었다”고 했다. 〉〉기사 이어집니다. 성남=김영서 기자 zerostop@edaily.co.kr 2022.10.0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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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수다 꿀케미' 고영표 배제성 소형준 "올 가을도 작년처럼"

배제성(26)과 소형준(21)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티격태격한다. 특유의 엷은 미소를 띠며 이 모습을 지켜보던 고영표(31)가 이내 수다에 가세한다. 많게는 10살 차이가 나는 선·후배. 그러나 허물없다. KT 위즈가 강팀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선발진이다. 다른 팀 사령탑조차 부러움을 감추지 않는다. 특히 최근 3년 국내 선발진을 맡은 고영표·배제성·소형준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고영표는 최근 2년 동안 40번이 넘는 퀄리티스타트(6이닝 이상 3실점 이하)를 해내며 '꾸준함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배제성은 최근 3년(2019~2021) 동안 국내 투수 중 가장 많은 승리(29승)를 거뒀다. 2020년 신인왕 소형준도 데뷔 3년 만에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가 됐다. KT는 이들을 앞세워 지난해(2021년) 통합 우승을 해냈다. 일간스포츠는 창간 53주년을 맞이해 KT를 강팀으로 이끈 세 투수를 만나 얘기를 나눴다. 서로의 장단점은 물론, 음료 취향과 잠버릇까지 꿰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끈끈한 팀워크를 엿볼 수 있었다. 배제성은 현재 전반기 막판 부침으로 구원 임무를 맡고 있다. KT도 1위가 아닌 3위 경쟁 중이다. 통합 우승을 차지한 지난해와 다른 상황이다. 그러나 이들의 목표는 올해도 같다. 가장 마지막 경기에서 웃는 것이다. Q : KT 선발진 사이 시너지 효과를 꼽는다면. 소형준(이하 소)=데뷔 2년(2020~2021) 차까지는 그저 실점을 막는 투구만 신경 썼다. 그러나 작년 영표 형이 많은 이닝(166과 3분의 2)을 소화하는 것을 보면서 점수를 좀 주더라도 이닝을 더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투구 지향점이 달라진 덕분에 올 시즌 경기당 이닝(6과 3분의 1이닝)이 늘어난 것 같다. 고영표(이하 고)=나는 군 복무를 마치고 지난해 합류했다. 후배들이 잘하는 모습이 자극제가 됐다.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밀린다'는 위기감이 생겼다. 선발 투수로서 가장 중요한 건 이닝 소화라고 생각했다. 후배들에게 귀감이 된 것 같아서 기쁘다. 나도 항상 후배들에게서 배운다. 배제성(이하 배)=KT 투수진의 가장 큰 강점은 소통이 원활하다는 것이다. 웨이트 트레이닝장이 그 무대다. 너 나 할 것 없이 허심탄회한 얘기를 나눈다. 의견을 주고받다 보면 좋은 기운이 생긴다. Q : 슬럼프에 빠진 선수가 도움을 받을 것 같다. 고=요즘 어때? 어제(등판 경기) 괜찮았어? 등 안부를 묻는 것부터 대화가 시작된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수다로 이어진다. 다들 프로다. 자신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잘하고 있다. 어설픈 배려나 조언은 하지 않는 편이다. 배=안 좋은 상황에 있는 선수에겐 오히려 말을 아끼는 것 같다. 말을 하더라도 내 생각을 전하는 정도다. 지시가 오갔다면, 트레이닝장에 지금처럼 좋은 분위기가 생기기 어려울 것이다. 고=아마 이런 자리(인터뷰)도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소=난 이제 데뷔 3년 차이고, 다른 팀에서 뛰어보지 못했다. 그래도 내부에 조성된 경쟁심이 딱 이상적인 수준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위기가 좋다'는 표현으로는 다 설명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나도 데뷔 첫 시즌부터 1군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배=같은 생각이다. 어떤 집단에서나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남을 깎아내리는 사람이 있다. 프로 선수에게 위기감과 경쟁심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남의 불행을 바란다고 내가 잘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 팀 경쟁 분위기는 딱 좋은 것 같다. Q : 서로에게 탐나는 능력이 있다면. 고=직구 평균 구속이 130㎞대인 나는 당연히 두 후배의 빠른 공이 탐난다. 때로는 힘으로 타자를 제압하고 싶다. (배)제성이의 슬라이더나 (소)형준이의 컷 패스트볼처럼 꺾이는 각도가 크지 않는 구종도 탐난다. (포수) 장성우 선배도 '그런 공 하나만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 배=영표 형한텐 당연히 체인지업이다. 최고의 구종 아닌가. 형준이한테 부러운 건 명확하다. 긍정적인 마인드다. 나는 솔직히 화(火)가 좀 있다. 형준이는 대량 실점하며 부진한 날에도 정말 잘 잔다. 소=나도 못 잘 때가 있다(웃음). 배=거짓말이다. 내가 형준이의 룸메이트였다. 한 번도 침대에서 뒤척이는 걸 보지 못했다. 소=솔직히 못 던졌다고 잠을 못 이루진 않는다. 작년에 한창 털릴 때(부진할 때)도 잠은 잘 잤다. 길게 봐야 한다. 당장 다음 등판을 위해서라도 잘 자야 한다. 배=모든 사람이 그러고 싶다. 그게 어렵다는 걸 형준이는 모른다. 소=난 영표 형의 회복력이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얼마 전에도 느꼈다. 100구 넘게 던진 경기 다음 날 전력으로 캐치볼을 한다. 몸도 너무 가벼워 보인다. 다른 동료들도 '파머(farmer·농부)의 아들'이라며 강인한 신체에 놀란다. 배=(선발) 등판 다음 날 골골대는 투수도 있다. 영표 형은 마치 일주일을 쉬고 나선 투수 같아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나도 그런 신체 능력이 부럽다. 고=나는 구위형 투수가 아니지 않나. 엔진을 100% 가동하지 않는다. 그래도 신체 회복력은 좋은 편 같다. 등판 다음 날에도 높은 강도로 운동하는 이유는 경험을 통해 정립한 루틴이다. 어설프게 하는 것보다 빵빵 때리며 던지는 게 낫더라. Q : 2021년 두산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KS)에서 고영표는 헐거워진 KT 허리진을 보강하기 위해 불펜 투수로 나섰다. 소형준은 2차전에 등판해 6이닝 무실점을 기록했고, 배제성은 4차전에서 5이닝 3실점 하며 승리 투수가 됐다. 지난해 KS를 돌아본다면. 고=군 복무 전까지 KT는 하위권이었다. 복귀하니 강팀이 됐고, 정규시즌 1위까지 하더라. KS 기간 내내 얼떨떨한 마음이었다. 배=2020년 두산과의 플레이오프(PO)에선 컨디션이 정말 좋았지만, 벤치에 신뢰를 주지 못해 좌타자 타석 때 교체됐다. 2021년 KS(두산전)에서 만회하고 싶었는데, 감독님이 다시 기회를 주셨고, 우승을 확정하는 경기(4차전)에서 승리 투수가 돼 기뻤다. 소=정규시즌 내내 좋지 않았다. 걱정했는데 감독님이 2차전을 맡겨주셨다. 운이 좋아서 실점 없이 6이닝을 막았다. 데뷔 2년 차에 우승을 경험할 수 있어 행복했다. Q : 올해 포스트시즌(PS)에서는 와일드카드 결정전 또는 준PO부터 치러야 할 거다. 고=나는 지난해 KS에서 불펜 대기했다. 정규시즌 선발로 잘했기 때문에 이강철 감독님의 선택에 서운했다. 그러나 KS를 치르며 내가 중책을 맡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런 마음을 가진 나를 자책했다. 올해 PS에서 내 임무를 궁금해하는 분이 많다. 물론 선발로 나가고 싶지만, 롱릴리버든 셋업맨이든 다 좋다. 작년보다 더 잘할 수 있다. 배=나는 올 시즌 후반기 선발에서 밀렸다. 어떤 상황에 등판하든 자신감을 갖고 무조건 점수를 안 주는 투구를 하겠다. 소=탈락한 2020년 PO, 우승한 2021년 KS 모두 두산 한 팀만 상대했다. 이번 PS에선 여러 팀을 상대하고 싶다. 무엇보다 홈인 수원KT위즈파크에서 첫 가을야구 경기를 치를 수 있을 것 같아서 기쁘다. 영표 형이 먼저 등판해서 상대 타선 기를 죽이고, 분위기를 KT로 가져오길 바란다. 배=형준이가 잘 던져서 KT가 PS에서 치러야 할 경기가 많아지면, 나도 선발로 나설 기회가 오지 않을까. 형준이가 제발 잘 던져줬으면 좋겠다. 고=제성이는 지난해 KT가 통합 우승을 확정한 경기(4차전) 승리 투수였다. 나는 제성이가 다시 한번 그 모습을 재연했으면 좋겠다. 배=단기전은 변수가 많다. 정규시즌에서 KT의 순위가 작년보다 떨어졌지만, 더 높은 무대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소=모든 선수가 마지막에 웃기 위해 그라운드에 설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Q : 20년 뒤 KT가 어떤 모습이길 바라나. 고=한 시즌에 만원 관중이 여러 번 기록될 만큼 넓고 깊은 팬덤을 보유한 팀이 돼 있길 바란다. 이를 위해 우승 트로피 7개 정도는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메이저리그는 경기장에 초청된 팀 레전드가 올드팬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레전드와 팬이 많은 팀이 되길 바란다. 배=지금 같은 팀 문화가 잘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고교 야구 선수들이 오고 싶은 팀이 될 것이다. 소=내 꿈은 KT에서 영구결번(30번)이 되는 것이다. 양현종·김광현 선배처럼 150승 이상 해내고 싶다. 배=형준이는 야망이 크다. 지금도 잘하고 있는데 만족할 줄 모른다. 소=1번과 19번(각각 고영표와 배제성 등 번호)도 영구결번으로 지정돼 외야석에 새겨졌으면 좋겠다. 수원=안희수 기자 2022.09.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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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③ 황선우 인터뷰] "한국 수영 단거리 세계챔피언은 불가능? 편견 깨고 싶어 더 욕심 난다"

황선우는 지난해 18세 나이에 수영 자유형 100m와 200m에서 박태환의 한국기록을 갈아치웠고, 가장 큰 무대인 올림픽에 처음 나가서 자유형 100m 아시아신기록을 새로 썼다. 경기장 밖에서 미디어 앞에 설 때의 그는 ‘신기하고 즐겁다’는 듯한 표정으로 소년처럼 이야기한다. 황선우는 이달 초부터 3주간 소속팀 선수들과 튀르키예 고산지대 훈련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와 서면 인터뷰로 만났다. -어린 시절 박태환의 금메달을 보며 수영 선수의 꿈을 키웠을 거 같다. 박태환처럼 중장거리를 선택하지 않고 단거리를 하게 된 계기가 있나. “먼저 자유형 영법부터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자유형에는 두 가지 영법이 있다. 양쪽에 동일하게 힘을 실어주는 정박자(기본) 영법과 한쪽에 힘을 더 실어주는 로핑 영법이 있다. 로핑 영법은 정박자 영법과 비교했을 때 단거리에 더 적합하다. 어릴 때부터 로핑 영법이 내 몸에 더 맞다고 판단하고 지속적으로 훈련했다. 계속해온 로핑 영법이 몸에 익어서 그런지 100m와 200m가 더 맞는 것 같다.” -‘한국 수영에서 단거리 세계 챔피언이 나오는 건 불가능하다’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이 많다. 거기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없었는지. “그런 편견을 깨고 싶어서 단거리 종목에 더 욕심이 난다. 한국에서 단거리 세계 챔피언이 나오기 힘들다는 선입견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자신감을 가지고 계속하다 보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여섯 살 때 수영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수영을 하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건 무엇이었나. “스피드다. 물속에서 느껴지는 스피드가 지상과 다른 특별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스스로 돌아봤을 때 실력이 확 늘었다고 느낀 시점이 있다면. “중학교 3학년 때 출전했던 맥도날드 챔피언십인 것 같다(이 대회는 2018년 12월 호주 퀸즐랜드에서 열렸다. 황선우가 2021년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까지 유일하게 참가했던 해외의 국제대회였다). 평소와 느낌이 조금 달랐다. 페이스 조절 능력과 레이스 운영, 그리고 후반 지구력이 향상된 느낌이었다. 이 대회에서 당시 자유형 200m 개인 최고기록인 1분51초를 2초 앞당겼다.” -지난 6월 부다페스트 세계선수권대회 자유형 200m와 100m를 석권한 포포비치의 성장이 놀랍다. 자유형 200m에서 황선우는 포포비치에 이어 은메달을 따냈다. 둘의 체격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이던데. “세계선수권이 끝나고 유럽선수권대회에서 포포비치 선수가 자유형 100m에서 세계신기록(46초86), 자유형 200m에서 1분42초대를 기록하는 등 정말 엄청난 기량을 보여줬다. 도쿄 올림픽 때만 해도 나와 기록이 비슷했는데, 1년간 기록을 놀라울 만큼 단축했더라. 나도 자극을 많이 받았다. 피지컬을 보면, 포포비치 선수는 기존의 세계적인 단거리 선수들처럼 큰 근육을 가진 선수가 아니다. 말랐지만 탄탄한 근육을 보유한 선수다. 그리고 나보다 리치(팔 길이)가 10㎝정도 더 긴 이점이 있다. 하지만 물을 잘 타는 내 장점을 살려서 급하지 않게 나만의 레이스를 운영하며 포포비치와 경쟁하고 싶다. 포포비치 역시 계속 발전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속도에 뒤처지지 않게 나도 훈련에 매진해서 기록을 단축해 가겠다.” -어릴 때 ‘넘사벽’으로 보였던 라이벌을 넘어선 기억이 있나. “어릴 때는 딱히 라이벌을 두지 않았다. 굳이 라이벌을 만든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최고기록이 내 라이벌이다. 그래서 나는 옆 레인의 누군가를 이겨야겠다는 생각보다 항상 내 기록을 깨려고 노력했다. 가장 좋은 기록을 세웠을 때 수영했던 느낌을 살려 매번 그 기록을 깨야겠다는 생각으로 레이스를 펼쳐왔다.” -자신의 기록과 싸워가는 수영 선수는 훈련하는 내내 스스로 나태해지지 않도록 다잡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거다. 그런 부분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 “게을러지지 않고 마음을 다잡는 습관이 되어있어야 (나태함을) 극복할 수 있는 거 같다. 수영은 개인종목이기 때문에 내가 훈련을 소홀히 하면 나만 뒤처진다. 그래서 훈련에 더 집중하고 기록 관리를 신경 써야 한다. 혼자 노력하는 부분 외에 연습은 동료들과 다 같이 하다 보니 서로 경쟁도 하고 응원도 해준다. 나태해지지 않게 도와준다.” -코로나19 탓에 최근 2~3년간 국제대회가 거의 열리지 않아 국제대회 경험이 부족했다.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첫 올림픽을 치렀는데, 멘털 관리는 어떻게 했나. “여러모로 걱정이 많이 되긴 했다. 그래도 너무 욕심내지 않고 내가 가진 모든 기량을 보여 주자라는 생각이었다. 자유형 200m 결승 레이스에서 경험 부족으로 오버페이스를 했다. 후반부에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조금 아쉬운 등수(7위)를 받았다. 그래도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에서 개인기록을 경신했고, 많은 경험을 얻어와서 만족한다. 도쿄 올림픽 때는 멘털 관리를 어떻게 했는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 했다. 첫 세계 메이저 무대였기 때문에 열심히 훈련했던 날만 생각하며 경기했다.” -6월 부다페스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황선우를 포함한 한국 남자팀이 계영 800m 한국신기록을 경신(7분06초93·2021년 종전 신기록 대비 2초96 단축)했다. 그동안 ‘한국 계영은 그냥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는 종목’ 정도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통쾌한 반전을 줬다. “세계선수권대회 계영 800m에서 한국신기록을 두 번이나 경신하고, 결승에 진출해 6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번 계영 800m 레이스를 펼친 선수들의 기록이 자신의 베스트 기록에 못 미치는 기록들이었다. 내년 항저우 아시안게임까지 계속 훈련하면 기록을 단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더 보여 줄 수 있는 게 많다. 앞으로도 많이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주시면 감사하겠다.” -일상 속의 평범한 청년 황선우도 궁금하다. 친구들이 평가하는 황선우는 어떤 사람인가. “그냥 평소에는 계속 수영만 한다. 휴가 때 여유를 잠깐 즐기다 다시 수영만 하는 사람?(웃음)”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미국)가 엄청나게 먹는 양이 많은 거로 유명했다. 혹시 황선우 선수도 ‘대식좌’인가. “그냥 보통보다 조금 많이 먹는 것 같은데… 대식가 스타일은 아닌 거 같다(웃음).” -세계신기록 도전에 대해 로드맵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당연히 모든 수영 선수들이 세계신기록을 경신하고 싶어 할 것이다. 세계신기록 보유자라는 타이틀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수영 선수라는 증명이다. 하지만 나는 세계기록을 경신한다는 생각보다 개인 최고기록을 경신한다는 목표를 잡는다. 조금씩 목표에 다가가면 세계신기록에도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항상 개인 최고 기록 경신을 목표로 세운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 이은경 기자 2022.09.26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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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② 우상혁 인터뷰] "바심이 버티고 있어 안타깝다고? 그가 있어 내가 성장했다"

우상혁과의 인터뷰는 훈련 중 잠시 시간을 내 전화로 이뤄졌다. 경기 중에는 격렬한 세리머니를 하고 늘 밝게 웃는 ‘스마일 점퍼’ 우상혁은 인터뷰할 때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말을 골랐고, 조심스러우면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긍정적인 단어를 많이 쓴 그는 “높이뛰기가 너무 재미있고 운동을 사랑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국제대회에 계속 참가하느라 해외에 오래 머물다가 9월 초 귀국했다. 훈련은 어떻게 진행 중인가. “한국에 오자마자 계속 훈련하고 있다. 마지막 다이아몬드리그 대회를 잘 못 해서(로잔 다이아몬드리그 2m15·공동 8위)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은 10월 열리는 전국체전을 준비 중이다. 올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체전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내고 싶다.” -세계 무대 경쟁자들에 비해 키(1m88㎝)가 크지 않다. 또 어릴 때 교통사고를 당해 양 발 크기가 다른 짝발이다. 국내 최고 전문가조차도 ‘우상혁은 안 될 거다’라고 평가했다던데. “물론 나한테 직접 그런 말을 한 건 아니다. 하지만 들리는 소리가 있으니 나도 그런 말들을 전해들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자극받았고 동기부여가 됐다. ‘한국 선수는 왜 안 돼?’ ‘신체조건이 완벽하지 않으면 왜 안 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도 스테판 홀름(스웨덴 1m81㎝)처럼 키가 크지 않은데도 국제대회에서 잘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홀름 같은 선수가 내 롤모델이었다.” -우상혁이 지금까지 대단한 결과를 보여줬지만, 사실 바심이라는 존재가 너무 거대해 보인다. ‘왜 하필 역사적인 선수가 동시대에 있나’라고 원망한 적은 없나. “나는 바심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높이뛰기는 무조건 밀고 당기는 게 있어야 한다. 앞서 가는 선수가 있으면 그를 추월하고, 거기서 자극받고 이런 게 반복돼야 발전한다. 그게 보이지 않아도 선수들끼리는 느낌으로 안다.” -선수 커리어에서 ‘이때 내 실력이 크게 늘었다’라고 생각하는 시점이 있나. “2019년 12월 김도균 코치님(육상대표팀 수직도약 코치)를 만난 이후다. 이전까지 나는 욕심히 과한 선수였다. 높이뛰기는 욕심이 과하면 다친다. 2019년 1월 부상을 당했고, 그게 슬럼프의 시작이었다. 코치님이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챙겨주셨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넘치는 의욕을 절제하도록 해줬다. 김도균 코치님을 만난 이후로 부상이 없다. 코치님과 훈련한 3년이 3개월처럼 느껴졌을 정도로 훈련했다. 3년간 정체됐던 내 기록을 2021년 6월 깨면서부터 포텐셜이 터진 것 같다.“ -도쿄 올림픽 4위에 오르면서 말 그대로 스타가 됐다. 그때 나름의 성취감을 느꼈을 텐데 흐트러짐없이 올 시즌 더 발전했다는 게 대단하다. “도쿄 올림픽 결과에 만족하지 않았다. 만족감은 그 순간뿐이다. 결국 메달을 못 땄고, 겸허히 받아들이고 앞으로 남은 3년 파리 올림픽까지 달리자고 생각했다. 3년은 생각보다 짧다. 벌써 2년 앞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곧 1년 앞으로 올 거다. 김도균 코치님은 도쿄 올림픽을 마치고 ‘2m35를 한 번 뛴 걸로 만족하면 안 된다. 평균적인 기록을 좋게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스타그램 아이디에 숫자 238이 들어간다. 개인적인 목표 기록이 2m38이라는 뜻인가. “앞서 말했듯이 한 번의 기록이 깨지는 것보다 평균치를 유지하면서 목표 기록을 달성하는 게 구체적인 목표다. 잘 준비하면 무조건 기록이 깨진다고 믿는다. 언젠가는 그 이상의 목표도 생각하고 있다. 지금처럼 꾸준히 준비하다 보면 내년 시즌에도 2m38을 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높이뛰기가 재미있고, 달리기가 재미있고, 운동이 재미있다. 하던 대로 열심히 하면 좋은 날이 있지 않을까?(웃음)” -인스타그램에 일상복을 잘 입는 ‘남친룩 사진’이 많아 화제가 됐다. 옷은 어느 부분을 신경써서 입는지. “그냥 마음에 드는 게 보이면 사고, 주로 인터넷 쇼핑을 많이 했다. 지금은 푸마와 스폰서 계약을 해서 거기서 보내주시는 옷 위주로 꾸민다.” -한국의 육상 선수가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와 계약했다는 자체로 대단히 상징적인 일인데. “개인적으로 엄청나게 자부심을 느낀다. 나의 가치를 인정해줬으니 책임감도 있다. 더 열심히 하고 좋은 결과를 내야겠다는 생각이다. 어릴 때 ‘한국 육상에 대단한 선배가 있었다면 내가 따라갔을 텐데’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후배들이 나를 보고 따라올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다.” -수영의 황선우와 응원 메시지를 주고받았다던데 친하게 지내는 사이인지. “그냥 안부 인사 하는 사이다. 나중에 한번 보자는 말만 했다. 황선우는 어린 친구지만 배울 점이 많다. 나는 어릴 때 국제대회에 많이 나가서 경험을 쌓았다. 덕분에 성장했다고 믿고 있다. 경험이 진짜 중요한데, 황선우는 국제대회 경험이 거의 없는데도 올림픽에서 아시아신기록을 냈다. 아시아신기록이 기초 종목에서 얼마나 힘든 건지 알기 때문에 ‘진짜 멋있다, 리스펙트(존경) 한다’, 이렇게 응원 메시지를 내가 먼저 보냈다.” -육상과 수영이 한국 선수에게 얼마나 힘든 종목인지 사람들이 진짜 속사정은 잘 모르지 않나. “육상 국제 대회에 나가면 말 그대로 ‘그사세’다. 그들이 사는 세상, 그들만의 리그다. 올해 유럽 대회에 계속 참가하면서 느낀 게 많다. ‘아, 유럽 잔치구나. 우리가 낄 수 없는 자리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더 오기가 생겼고, 더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 육상은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그런 말을 많이들 했다. 난 듣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흔들리니까 아예 안 들으려고 했다. 난 내가 안 될 거라고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의욕이 과한 게 문제였지(웃음). 나는 운동하는 게 행복하다. 물론 노는 것도 즐겁고 행복하겠지만, 그건 나이 먹고도 할 수 있다. 선수 시절의 행복은 돈 주고도 살 수가 없다. 내가 남은 선수 생활 동안 대회를 몇 개나 뛸 수 있을까 계산해보니 많아야 50경기 정도? 100경기보다는 확실히 적다. 그런 걸 생각하면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다.” -거수경례 세리머니가 트레이드 마크인데, 이제 전역(9월 2일자)했다. 앞으로는 못 보는 건가. “외국 선수들도 그걸 묻더라. 그래서 ‘전역했지만 내 트레이드 마크라서 밀고 나갈 거야’라고 답해줬다. 바심도, 지안 마르코 탬베리도 독특한 세리머니가 있다. 거수경례 세리머니로 많이 관심을 가져주셨는데 군인 신분이 아니어도 할 생각이다.” 이은경 기자 2022.09.26 08:50
스포츠일반

[창간특집 우상혁-황선우①] I'm possible! 불가능을 깬 즐거운 도전

‘한국 육상은 안 돼.’ ‘한국에서 단거리 수영은 안 돼.’ 어릴 때부터 안 될 거란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자란 선수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꿈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피나는 노력을 통해 자신들의 실력이 세계에서 통한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이들은 이제 큰 무대를 겁내지 않고 즐기고 있다. 남자 높이뛰기 우상혁(26)과 수영 자유형 단거리의 황선우(19·강원도청)가 그 주인공이다. 우상혁과 황선우는 한국이 전통적으로 매우 취약한 육상 필드 종목과 수영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다. 기초 종목에서 월드클래스로 성장한 두 선수에게 열광하는 이유다. 한국 육상은 과거 마라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스타는 몇몇 배출했지만, 높이뛰기에서는 국제 메이저 대회 본선 무대도 거의 밟지 못했다. 수영은 박태환(33)이 자유형 400m에서 세계 정상에 오른 적이 있다. 그러나 자유형 100m와 200m 같은 단거리 종목은 여전히 서양 선수들만의 무대로 여겨졌다. 한국 선수는 들어갈 틈이 없다고 겁을 먹었다. 우상혁과 황선우는 커리어 발전 과정이 마치 ‘평행이론’처럼 닮은 구석이 많다. 이들은 지난해 여름 열린 2020 도쿄 올림픽에서 국민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우상혁은 남자 높이뛰기 결승에 진출해서 2m35의 한국신기록을 세웠다. 이진택의 2m34를 무려 27년 만에 넘어서며 새로 쓴 기록이었다. 그는 한국 육상 트랙&필드 종목 올림픽 최고 성적인 4위를 기록했다. 황선우는 도쿄올림픽 수영 남자 자유형 100m 준결승에서 47초56의 아시아신기록을 세웠다(결승 성적은 5위). 자유형 200m 예선에서는 1분44초62의 한국신기록을 썼다. 생애 첫 올림픽 무대에서 얻은 눈부신 결과였다. 2022년 세계선수권 은메달로 더 높이 날아오른 것도 닮았다. 우상혁은 지난 2월 체코 후스토페체 육상 세계선수권대회(실내)에서 2m36을 넘어 한국신기록을 다시 쓰면서 우승했다. 7월 미국 오리건 주 유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실외)에서는 2m35로 은메달을 따냈다. 올 초 카타르 도하 다이아몬드리그 개막전에서도 당당히 우승했다. 황선우는 6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수영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자유형 200m에서 1분44초47로 자신이 세운 한국신기록을 갈아치우며 은메달을 거머쥐었다. 2021년 12월에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열린 쇼트코스(25m 경기장) 세계선수권대회 자유형 200m에서는 처음으로 우승을 맛 봤다. 하필이면 동시대의 강력한 세계 최강자와 경쟁을 피할 수 없다는 점도 비슷하다. 우상혁은 실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무타즈 에사 바심(31·카타르)에 이어 2위를 했다. 바심은 아시아최고기록인 2m43의 대기록을 보유한 주인공이다. 황선우는 세계선수권대회 자유형 200m 결승에서 다비드 포포비치(18·루마니아)에 1초26 모자란 2위에 올랐다. 포포비치는 지난달 유럽선수권 자유형 100m에서 46초86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한 발 더 앞서나갔다. 종전 기록은 2009년 ‘기술 도핑’으로 불렸던 전신 수영복 시대에 나온 것이라 깨지기 어렵다는 평가였는데, 포포비치가 0.05초 단축했다. 이처럼 신기할 정도로 행보가 비슷한 두 명의 젊은 스타들, 우상혁과 황선우는 2024 파리올림픽에서 정상을 노린다는 목표도 똑같다. 이들의 기록과 성적보다도 감동을 주는 부분은 따로 있다. 많은 이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험난한 목표에 당당하게 도전하고 즐기는 모습이 그것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있는 우상혁과 황선우, 늘 밝은 표정으로 웃으면서 도전을 즐기는 이들의 이야기를 창간 53주년을 맞은 일간스포츠가 직접 들어봤다. 이은경 기자 2022.09.26 08:49
연예일반

[IS 창간53] 일간스포츠 광고로 본 시대의 발전(ft. 1970~2020년대)

일간스포츠가 2022년 창간 53주년을 맞았다. 반세기를 지난 일간스포츠는 스포츠, 연예 소식은 물론 국내외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을 전달하며 독자들의 친구로 오프라인에 이어 온라인에서 친근하게 매분, 매시, 매일 만나고 있다. 일간스포츠는 창간 53주년을 맞아 과거부터 현재까지 신문에 실린 광고를 통해 세월의 흐름, 트렌드의 변화를 한 눈에 알아봤다. #1970년대 : 성장의 시대 1970년대는 한국이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함과 동시에 국내 프로야구, 프로축구 산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 시계업체 시티즌은 미국의 3번째 달 착륙선 아폴로 13호를 기념해 ‘약진하는 시티즌’이라는 광고를 게재했다. 식료품, 주류광고 또한 지면에 등장하며 국민의 소비 활동이 활발한 시기였음을 보여줬다. #1980년대 : 88올림픽과 호돌이 1980년대 한국은 내부적으로 격변기를 지났고 외부적으로는 국운 상승기였다. 1980년대 초반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계엄령 철폐가 일어났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면서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각인이 되기 시작했다. 특히 88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 호돌이는 한국의 상징적인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자동차, 오토바이, 맥주 등 다양한 회사들은 올림픽을 응원하고 선전하는 광고를 지면에 올렸다. 1984년에는 지면의 컬러전환이 이뤄져 시각적 재미를 더했다. # 1990년대 : IMF와 금모으기 운동 1990년대는 198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호황이 정점을 찍은 황금기임과 동시에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인한 최악의 경제적 시련기였다. 금융시장 자율화 정책이 시작되며 외국 투자자들이 활발히 투자를 이어왔다. 당시 산업들의 부실로 인해 투자심리가 위축됐고 기업들은 연쇄부도를 면치 못하며 보유 외환이 바닥이 났다. 그 이후 IMF가 터져 국가가 갚아야 할 외화 빚이 산더미로 불어났다. 이에 국민은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 국가를 살리기 위해 시계나 금, 은, 등 돈이 될만한 물건들을 국가에 헌납해 외환위기를 국민의 힘으로 극복했다. # 2000년대 : 기술 발전과 광고 혁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1면의 광고뿐만 아니라 작은 광고들이 지면 곳곳에 고루 실리기 시작했다. 로또, 휴대폰, 비데, TV, 협회 등 장르와 종목을 떠나 다양한 광고들이 신문을 수놓았다. 정보통신기술 혁신, 국민 소득 증가로 경제 활동 인구를 타깃으로 한 광고가 많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또 2002년 한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한 월드컵 축구대회가 개최되면서 관련 광고들이 성황이었다. 일간스포츠는 2009년 들어 판형을 전환해 유가신문 중 콤팩트판으로 전환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2000년 이후 스포츠신문의 이미지와 패턴에 한계가 왔다고 판단, 판형 변화를 돌파구로 삼은 것이다. 판형은 물론 콘텐츠의 물갈이를 통해 새로운 개념의 스포츠신문 시장을 구축, 광고주와 독자를 동시에 사로잡았다. # 2010년대 : 거대 상업 광고의 등장 2010년대는 종류를 불문하고 자극적이고 상업적인 광고들이 게재됐다. 보험, 렌털, 기능식품, 유아용품 등 브랜드 광고들이 집중적으로 생겨났다. 2018 평창에서 열린 제23회 동계올림픽 당시에는 올림픽을 응원하는 회사와 방송국 매체들이 홍보 광고를 실기도 했다. # 2020년대 : 팬클럽 광고 한류가 나날이 성장하면서 팬덤의 규모 또한 상상을 초월만큼 컸다. 회원 수는 물론 이들이 스타를 위해 소비하는 금액도 이전보다 훨씬 커지면서 스타의 생일, 데뷔 날, 기념일 등을 기념한 팬클럽 광고가 대형으로 지면을 장식했다. 과거에는 국내 팬덤을 중심으로 이러한 광고들이 집행됐다면, 현재는 해외 팬덤이 단독으로 주도하는 기념 광고들이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글로벌 스타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등의 팬덤 화력이 전 세계적으로 더 거세짐에 따라 멤버 개인을 위한 광고도 왕왕 있다. 김다은 기자 dagold@edaily.co.kr 2022.09.26 08:30
프로야구

"이승엽 클래스는 여전하네요" MLB 317홈런 타자도 인정했다

2006년 3월 13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 에인절스타디움에서 열린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라운드(8강) 1조 첫 경기 멕시코전. 3번 타자·1루수로 선발 출전한 이승엽이 1회 말 1사 1루에서 로드리고 로페스의 6구째 체인지업을 때려 결승 2점 홈런(2-1 승리)을 터뜨렸다. 전년도 미국 메이저리그(MLB) 볼티모어 오리올스 소속으로 15승을 거둔 투수(로페스)를 상대로 이승엽이 한국 프로야구 최고 홈런 타자의 매운맛을 제대로 보여줬다. 이 경기에 6번 타자·1루수로 나선 멕시코의 아드리언 곤잘레스는 이승엽이 베이스를 도는 모습을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날 3타수 1안타(멕시코 총 5안타)를 기록한 곤잘레스는 우리에게 LA 다저스 시절 류현진(현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도우미로 잘 알려져 있다. ━ 한국서 만난 두 '국민타자' 이승엽(46)과 곤잘레스(40)가 16년 만에 한국 땅에서 만났다. 지난 16~17일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컬처파크에서 열린 '홈런더비 X' 무대에서였다. 야구의 세계화를 위해 MLB 사무국이 주최한 이번 행사에서 곤잘레스는 닉 스위셔, 자니 곰스, 지오바니 소토 등 은퇴 선수와 함께 MLB 4개 팀을 대표해 방한했다. 곤잘레스는 "16년 전 이승엽이 결승 홈런을 친 장면을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팽팽한 투수전(한국 2-1 승)으로 펼쳐져 더 또렷하게 생각난다"며 "이승엽의 부드러운 스윙이 돋보였다"고 생생하게 기억했다. 이승엽은 곤잘레스를 보자마자 "에드가 곤잘레스와 (2010년)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함께 뛴 적 있다"고 소개했다. 아드리언 곤잘레스의 형 루이스 곤잘레스도 MLB(193경기 출전)를 경험한 선수 출신이다. 이승엽은 "2006년 한국-멕시코전에 곤잘레스도 출전했다. 당시 샌디에이고 소속이었던 걸로 기억난다"며 "워낙 유명했고 수비력도 좋은 선수였다. 스윙이 아주 부드럽고 타격 타이밍도 잘 잡았다"고 정확하게 기억했다. 이어 "다저스에서 류현진을 많이 도와줘 더 친숙하다. 총연봉도 1억 달러(실제로는 1억9064만8500달러·2655억원)를 넘지 않았을까 싶은데. 멕시코 대표팀 사상 가장 좋은 타자 아닌가"라고 화답했다. 서로의 평가처럼 둘은 닮은 점이 많다. 이승엽은 '국민타자'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최고 스타였다. 곤잘레스 역시 멕시코를 대표하는 타자다. 곤잘레스는 미국과 멕시코 이중국적을 갖고 있지만, WBC 1~3회 모두 멕시코 대표팀으로 출전했다. 그라운드 밖에서 선행을 펼치는 점도 비슷하다. 곤잘레스는 장학 재단을 설립, 암환자를 비롯한 라틴계 어린이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사회 공헌 활동을 펼치는 선수에게 수여하는 로베르토 클레멘테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승엽도 은퇴 직후인 2018년 야구 꿈나무 육성을 위한 재단을 설립, 재능 기부와 함께 소아암 환우 등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있다. ━ 메이저리그 꿈꿨던 이승엽 프로 입단 때부터 '최고'였다. 이승엽은 1995년 고졸 신인 최고대우 계약금(1억 3200만원)을 받고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곤잘레스는 2000년 MLB 전체 1번으로 플로리다에 지명된 최고 유망주 출신이다. 내야수가 전체 1번으로 뽑힌 건 1993년 알렉스 로드리게스(은퇴·통산 696홈런) 이후 처음이었다. 같은 좌타자에 포지션(1루수)도 같다. 이승엽은 KBO리그 한 시즌 최다 56홈런(2003년)을 비롯해 각종 홈런 기록을 갖고 있다. KBO리그 개인 최다 홈런(467개)을 비롯해 한·일 통산 홈런만 626개(일본 159개)에 이른다. 홈런왕을 5차례나 차지했다. 일본 최고 명문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제70대 4번 타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국제무대에서는 중요할 때 한방을 터뜨리는 '해결사'였다. 오죽하면 '합법적 병역 브로커'라는 별명까지 있다. 곤잘레스 역시 빅리그 15년 동안 홈런 317개를 때린 강타자다. 텍사스 레인저스-샌디에이고 파드리스-보스턴 레드삭스-LA 다저스-뉴욕 메츠를 거치는 동안 총 1929경기에서 통산 타율 0.287 1202타점을 기록했다. 곤잘레스 역시 멕시코 대표팀의 최고 해결사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이승엽은 1회 WBC 멕시코전을 포함해 대회 기간 총 홈런 5개를 기록했다. 대회 홈런왕과 공동 타점왕에 올랐다. 켄 그리피 주니어와 같은 타점 10개를 올렸다. 야구의 본고장 미국에서 '매운맛'을 선보인 이승엽도 곤잘레스처럼 MLB에서 뛸 기회가 있었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KBO리그를 평정한 이승엽은 미국 진출 의지가 컸다. 2002년 시카고 컵스, 2003년에는 플로리다 말린스의 초청 선수로 참가했다. 이승엽은 "미국 야구를 한 번 경험해 보고 싶어 추진했다. 2002년 컵스에서 캐리 우드(통산 86승)와 새미 소사(609홈런), 프레드 맥그리프(493홈런) 등 스타 선수와 함께 훈련했다. 어느 날 소사와 사진을 찍었는데 팔뚝이 정말 엄청나게 굵더라. 반면 난 너무 왜소했다"고 떠올렸다. 이승엽은 컵스 소속으로 시범경기 7경기에서 홈런 2개를 기록했고, 이듬해 플로리다에서도 홈런 2개를 터뜨려 미국 진출 가능성을 한층 높였다. 그는 "3주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유로운 훈련 분위기에서 많은 공부를 했다. 동기부여도 됐다"고 말했다. 이승엽은 2002년 47홈런을 터뜨렸고, 2003년에는 아시아 한 시즌 최다인 56홈런을 날렸다. 이승엽은 2003년 시즌 종료 후 부푼 꿈을 안고 아내 이송정 씨와 미국으로 건너갔다. LA 다저스 홈구장에서 함께 사진도 찍었다. 그는 "다저스와 시애틀 매리너스 관계자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마지막에 다저스와 한 차례 더 만났는데 (계약 조건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라고 했다. 그는 "미국으로 출국 전에는 계약이 잘 될 줄 알았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 야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더라. 그 부분이 너무 아쉬웠다"고 덧붙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KBO리그를 거쳐 미국 무대에 진출한 야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한국 야구의 자존심인 이승엽이 예상보다 낮은 조건에 사인하는 것도 국민 정서와 거리가 있었다. 결국 이승엽은 일본 지바 롯데 말린스와 2년 총 5억엔(49억원)에 계약했다. 지바 롯데 입단 기자회견 당시에는 MLB 진출의 꿈을 접은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19년 전을 회상하며 "당시 결혼도 했고 가족 부양의 책임도 있었다. 또 어머니가 수술 후 병상에 누워 계셨다. 협상이 내 예상과는 달랐다. 내 꿈만 좇아 (미국에 가는 건) 무모하다고 생각했다"며 "한국에 남으면 FA(자유계약선수) 4년 계약을 해야 하니까 우리보다 수준이 더 높은 일본에서 2년 동안 뛰고…(다시 한번 도전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승엽은 2012년 삼성에 복귀 후 2017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그는 "은퇴하고 나니 성공과 실패를 떠나 미국에서 한 번도 뛰지 못해 정말 아쉽더라. 사실 2011년 일본 오릭스 퇴단 때 미국 마이너리그라도 한 번 가볼까 생각했다"라고 털어놓았다.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그는 "그때 한국(삼성)에 돌아오지 않으면 영원히 못 돌아올 수 있겠다는 걱정이 들었다"고 말했다. ━ 두 거포의 클래스는 여전했다 은퇴 후 5년이 흘렀지만, 이승엽은 여전히 홈런 타자의 위용을 자랑했다. 지난 17일 컵스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홈런 더비에서 25개의 타격 기회 중 11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상대편이었던 다저스의 곤잘레스가 이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곤잘레스는 "이틀 동안 이승엽의 부드러운 스윙을 보니 2006년 WBC 멕시코-한국전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전력분석 등을 통해) 이승엽이 결정적일 때 해결하는 타자라고 여겼다. 세월이 흘렀지만 역시 클래스가 여전히 그대로임을 느꼈다. 대단한 선수"라고 치켜세웠다. 이승엽은 홈런더비 X MVP에 뽑힌 곤잘레스를 향해 "세계적인 선수와 어울려 영광"이라고 말했다. 영종도=이형석 기자 2022.09.23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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