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gma2024 ×
검색결과2건
연예

'6시 내고향' 트와이스 정연, 양평 식당에서 울컥한 사연은?

트와이스 정연이 양평 한 식당에서 울컥했다. 10일 KBS1 '6시 내고향'에서는 트와이스가 출연하는 코너 '오!만보기'가 방송된다. 앞서 모내기를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심장을 녹였던 트와이스는 힐링 여행을 시작한다. 사나의 리얼한 강아지 짖는 소리부터 시작해 진짜 오리도 놀라게 만든 채영이의 오리 흉내와 라이온킹 심바 따라잡기까지 귀엽고 깜찍한 개인기가 대방출된다. 이어 양평 토박이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 들른 트와이스. 식당 어머니는 딸, 손녀 같이 느껴져 반찬이라도 더 챙겨주기 바쁘기만 한데 그 모습에 정연이 눈시울을 붉힌다. 트와이스는 패러글라이딩 체험장도 찾았다. 처음 하는 비행에 무서울 만도 하건만 사나, 미나, 채영이 패러글라이딩을 통해 경기도 양평의 푸른 절경을 보기로 한다. 마지막 여정으로 선택한 곳은 야외 파티장. 트와이스는 서로에게 쓴 편지를 공개하며 황동했던 5년간 하지 못했던 말을 꺼내본다. 황지영기자 hwang.jeeyoung@jtbc.co.kr 2020.06.10 09:52
연예

[불편한 삼국지] 사마소, 교활하나 유능한 마키아벨리즘의 대가

‘삼국지연의’에서 사마소는 매우 간교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황제 조모를 시해한 흉험한 인물이며, 나라를 찬역한 역적이다. 게다가 종회와 등애를 시켜 서촉을 정벌하고는 그들을 의심해 모두 반역죄로 몰아 처단한다. 또 진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진공의 지위와 구석의 특전을 수도 없이 하사받고 끝없이 사양하고 반납하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마치 사심이 없는 듯 보여 교활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사마소는 간교한 찬탈자라는 이야기이다. 반면에 *춘추공양학파적 견해를 드러내기 좋아하는 최근 중국의 일부 논객들은 사마소를 충의와 인덕의 인물로 묘사하곤 한다. 이들은 사마소가 진공이 되는 것을 여섯 번이나 사양했고, 그 중에 한 번은 무려 세 번씩 세 차례 도합 아홉 번이나 사양한 것을 예로 들면서 그가 역적질 할 의도가 있었다면 이렇게 했겠느냐고 한다. 또 이들은 사마소는 위나라 황제 조모를 죽인 일에 전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 철딱서니 없는 조모가 분별없이 병력을 이끌고 사마소를 죽이겠다고 쳐들어오지만 않았더라도 그가 봉변을 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직접 병사를 동원한 *가충의 잘못이지 사마소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마소는 끝까지 위나라에 충성을 다하려고 했고 백성들을 잘 보살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소가 진공의 지위를 여러 번 사양했다는 것만으로 그에게 찬역의 뜻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면 조정에서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그를 진공에 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거듭 사양하는 태도를 취한 것은 여론을 의식한 행위였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촉한을 멸해 위명이 높아진 이후에는 진공의 자리를 바로 받았고, 그 이듬해에는 진왕이 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를 보면 그는 처음부터 진공이나 진왕이 되어 자신만의 나라를 세우고 싶었던 것이고, 다만 여론의 향배를 보기 위해 끊임없이 ‘간을 보았다’고 봐야 한다. 또 사마소가 황제를 위협해 권력을 세습하고, 황제를 시해한 일을 어찌 그의 가신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암묵적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끝내 황제의 자리를 빼앗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찬역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가 죽자 바로 그해에 그의 아들 사마염이 위나라를 대신한 것을 보면 그가 당대에 찬위하지 않은 것은 단지 후세 사람들로부터 찬탈자라는 비난을 모면하기 위한 교묘한 술책이었을 뿐이다. 이런 면에서 그가 교활한 찬역자가 아니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마소가 매우 유능하고 신중한 인물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는 훌륭한 통치자이자 위정자였다. 그는 10년의 통치기간 중 불필요한 전쟁이나 징발을 하지 않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했다. 이로 인해 중원의 경제가 되살아나고 인구가 회복됐다. 국력이 회복되자 사마소는 일거에 힘을 쏟아 촉한을 단번에 멸했으니 그가 얼마나 유능한 통치가이자 전략가였는지 알 수 있다. 사마소는 사자와 같은 무자비함과 여우와 같은 간교함을 지닌 마키아벨리적인 통치자였다. 그는 형식적으로나마 조씨 가문의 위나라에 충성했고, 백성들을 잘 보살피며 관대하게 아량을 베풀었다. 중원의 인심이 사마씨에게 향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 사마염 대에 이르러 위나라를 대체할 수 있게 된 것이다.[영웅의 이면] 사마사·사마소는 무적의 형제 사마의의 두 아들 사마사(A.D 208~255년)와 사마소(211~265년)의 성품은 무척이나 대조적이었다. 사마사는 대담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나 잔혹했고, 사마소는 소심하고 신중했으나 관대했다. 두 사람의 성격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쿠데타 바로 전날 밤 사마의는 두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몰래 살펴보았다. 실패하면 멸문지화를 당할 대사를 앞에 두고도 사마사는 태평하게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사마소는 걱정스러워 밤새 잠을 못 이루고 서성거렸다고 한다. 고평릉의 난을 성공시켜 사마씨 정권의 기틀을 닦은 것은 거의 전적으로 사마사의 공이였다. 사마사가 병력동원의 책임을 맡았는데 거사 당일 사마의가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삼천 명의 정병들이 질서정연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모의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이 군대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사마의조차 놀라 감탄했다고 한다. “이 아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없구나.”사마사는 중호군으로 재직하면서 군부 내에 만연했던 금품거래에 의한 인사관행을 뿌리 뽑았다. 이 일은 유능하다고 이름이 높았던 전임자들인 장제나 하후현도 해내지 못했다. 사마사의 일처리가 이처럼 과단성이 있었기에 그의 정적인 하안조차도 늘 그를 이렇게 칭찬했다고 한다. “생각컨대 천하의 일을 완성시킬 자는 오로지 사마사일 것이오.”사마사는 이 일로 젊은 무장들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기에 거사에 참여할 무사들을 취합할 수 있었다. 사마사는 일이 잘못되어도 남의 탓을 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을 졌다. 동흥의 싸움에서 패전하고, 병주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사마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를 보였다. 사람들은 그의 은혜에 보담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 들었다. 사마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일에 탁월했던 셈이다.반면에 사마사는 정적들을 숙청함에 있어서는 유감없이 잔혹성을 발휘했다. 사마씨 집권 이후의 유혈낭자한 숙청과 살육은 대부분 사마사의 역할이었다. 그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반대파를 모조리 처형함으로써 단기간 내에 사마씨 정권의 기반을 확고히 했다. 그는 반란을 모의한 이풍을 무단으로 체포한 후 고문 끝에 죽인 일도 있다. 이때 그는 욕설을 했다는 이유로 이풍의 입을 칼로 난도질하기도 했다. 아무튼 진의 건국은 그의 무자비한 숙청과 권력강화에 힘입은 바가 컸다.[거짓말 벗겨보기] 사마사·사마소가 제갈량 아들보다 못했다고? '삼국지연의'를 보면 사마의 삼부자가 제갈량의 계교에 빠져 상방곡에서 불에 타 죽을 뻔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마소 역시 강유에게 당해 철롱산에 갇혀 잡혀 죽을 위기에 처한다. 사마사도 양평관에서 제갈량이 발명한 연노에 혼쭐이 났다고 한다. 다 거짓말이다. 사마사와 사마소는 서방에서 촉한의 제갈량이나 강유와 직접 전투를 벌인 일이 없다. '삼국지연의'는 사마사와 사마소를 그저 부친 사마의의 후광을 이어받은 무능한 인물로 그리고 있으나 그랬다면 사마씨의 정권이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갈량, 육손의 아들들을 비교한다면 사마씨 형제가 가장 유능했다. 육손의 아들 육항은 동오의 덕장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은 허명만 높았지 가장 무능했다. 풀이 *춘추공양학파=19세기 청대 후기에 나타난 유학의 한 학파. 전통적 유교사상을 보전하면서 유럽의 근대사상을 받아들이려는 사상으로 발전했다. *가충=사마씨가 위나라를 진나라로 대체하는 일에 앞장 선 무장. 사마염이 진 무제에 오른 후 부귀영화를 누렸다. 2013.12.31 07:00
브랜드미디어
모아보기
이코노미스트
이데일리
마켓in
팜이데일리
행사&비즈니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