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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일반

허진석 한국체대 교수 게재...20세기 독일 체육학자가 바라본 손기정의 모습은

한국체대의 허진석 교수가 20세기 초 독일의 스포츠 학자 겸 행정가인 칼 딤(Carl Diem)이 기록한 한국의 모습을 논문을 통해 담았다.허진석 교수는 최근 한국체육사학회지(제29권 제3호)에 「Carl Diem의 동아시아여행기에 나타난 KOREA 인식과 그 영향에 대한 고찰」을 게재, 일제강점기 시절 딤이 바라본 한국의 모습을 소개했다.딤은 독일 현대 스포츠의 발전에 다양한 방면에서 기여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업적은 행정가, 교육인, 정책입안자 등 세 분야로 집약되다. 그의 모든 활동이 독일 현대 스포츠와 체육 교육, 나아가 유럽을 넘어 세계 스포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딤은 행정가로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조직위원회의 사무총장을 맡았으며, 올림픽 역사상 최초의 성화 봉송을 기획하고 실현한 인물이다. 1947~1962년 독일체육대학 총장으로 일했고, 정책가로서는 독일사회체육시스템을 상징하는 '황금계획' 입안자의 한 사람이다. 이러한 인물이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경성을 방문해 국제경기에 참가했다는 사실은 그동안 국내에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딤은 1942년에 간행된 『올림픽의 불꽃』 제2권의 「동아시아 여행기」에서 식민지 조선에 대해 언급했다. 여행기는 11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8번째 항목이 1929년 10월 15일부터 17일에 이르는 식민지 조선 체류 기록이다. 'Korea'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딤은 1929년 11월 10일 베를린 소재의 독일 유력지 『포시셰 차이퉁(Vossische Zeitung)』에 기고한 대회참가 보고서에서도 한반도 방문 경험을 언급한 바 있다. 딤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 일본과 독일의 육상대항경기에 참가하는 독일선수단을 이끌고 식민지 조선의 경성을 방문했다.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경험을 신문 기고와 저서를 통해 남긴 바 있다.딤이 방문 당시의 경험을 자세히 기록하여 신문 기고와 저서로 남겼다는 사실은 스포츠사의 영역을 넘어 시대적 고찰의 동기를 제공한다. 허진석 교수는 딤의 기록을 당대의 국내 신문 보도와 비교한 다음 그의 경험과 기록이 독일 스포츠 계에 남겼을 Korea에 대한 정보와 이미지를 유추한다. 현대 한국인 입장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당대 한국 체육계의 스타, 손기정에 대한 인식이다. 논문은 당대 독일과 서구사회가 손기정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나아가 식민지 조선의 정치적 지형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나마 넓힐 수 있었는지를 확인한다.딤의 기록을 살펴보기 전까지 한국 사회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당시 손기정에 대한 독일의 인식이 미지의 동양인, 또는 일본 선수 가운데 하나라는 평면적 인식에 머물렀을 것으로 여겨 왔다. 하지만 허진석 교수는 독일 사회에 일본이 식민 통치하고 있는 동아시아 지형에 대한 폭넓은 교양과 이해가 존재했을 것으로 판단했다.1929년 일본과 조선, 만주를 방문했던 딤은 훗날 저서와 신문 기고에서 각종 수치와 관찰 결과를 들어가며 한반도 주민과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드러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일본제국주의와 같은 눈높이와 정치적 등고선에 자신을 위치시켰고, 조선과 조선인을 타자화하는 자세를 보여줬다. 딤은 경성에서 열린 박람회를 일본 통치의 탁월함을 증명하는 행사로 받아들였다. 경성에서 경기에 참가한 일본의 운동선수들은 조선인들이 본받아야 할 존재들이라고 인식했다.딤의 이러한 인식은 그가 독일 체육계와 지식 사회에서 점유하는 위상에 비추어볼 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손기정이 올림픽에 참가한 1936년은 딤이 동아시아 여행을 다녀온 뒤 7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독일 사회에서 제국주의 일본의 판도 아래에서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지식과 이해도 더욱 구체화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허 교수는 논문을 통해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손기정의 노력과 별개로 독일 사회는 이미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인식하고 있을 거로 봤다. 논문은 당시 독일 언론의 보도 등에서 이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허 교수는 올림픽 경기 중계에서 손기정을 "Koreanische Student(한국의 학생)"라고 지칭한 것은 독일과 서구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동아시아와 식민지 조선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할 뿐이고, 이는 새삼스러운 발견이나 진실의 고백으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허 교수는 이 같은 결론이 손기정의 애국심이나 민족의식에 대한 의구심과는 무관하며, 그에 대한 연구가 답습해온 '망국의 설움' '일제에 대한 저항'의 틀에서 벗어나 손기정을 세계 스포츠와 올림픽 역사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재고찰해야 할 필요성을 환기한다고 지적했다.허 교수는 또한 1936년에 세계 최고의 마라톤 선수가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에도 그에 대한 이해의 영역은 슬픈 시상식과 일장기 삭제 사건에 머무르며 학술 연구도 '민족정신'과 '애국심'의 패러다임을 탈피하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차승윤 기자 2024.10.24 14:12
연예일반

왜 오니는 은어를 좋아하는가..장재현 감독이 밝힌 ‘파묘’ A to Z [전형화의 직필]

“‘검은 사제들’(544만명)보다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는데 감사할 뿐입니다.”장재현 감독은 ‘파묘’가 올해 첫 600만 관객을 돌파했지만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에 대한 반응이 자신의 예상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영화 전반부보다 후반부를 오컬트 마니아들이 더 좋아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오히려 일반 관객들이 더 호응해주고 있는 탓이다. “감사하다”는 말을 연거푸 하는 그에게 ‘파묘’의 A부터 Z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을 물었다. 때로는 의도한 것부터, 더러는 관객이 의미를 부여해준 것까지 ‘파묘’의 아주 긴 뒷이야기를 전한다. 이 인터뷰는 ‘파묘’의 스포일러를 대거 포함합니다. -엄청난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데.호불호가 있는 장르라 엄청 큰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검은 사제들’보다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이 내심 있었을 뿐이다.-어렸을 때 이장을 하는 것을 보고 ‘파묘’의 원형적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고 했는데. 본격적인 준비는 ‘사바하’ 이후부터였을텐데.살던 동네가 그런 일들이 많았다. 이장을 했는데, 굿도 하고 제사도 크게 지냈다. 무덤을 파고 관을 뜯었다. 고백하자면 그 때부터 관을 좋아했다. 무덤에서 갓 꺼낸 낡은 관이 주는 이미지를 좋아했다. 관을 놓고 이야기를 발전하려 했다. ‘사바하’ 끝나고 한국장례협회를 찾아 대표님을 만나서 이틀 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풍수지리사 분들도 만났고. 통상적으로 지관이라고 하는데, 지관은 조선시대 관직이고 풍수지리사가 더 맞는 말이다. 풍수지리사협회가 여러 곳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한국풍수지리협회 분들을 만났고 협회에 소속 되지 않고 혼자 재벌집 묫자리를 봐주는 분들을 만났다. 동시에 장의사분들도 만났고.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분들이 살면서 쌓아온 코어랄까, 내공이랄까, 거기에 공통된 것들이 있더라. 대체로 이장의 80% 정도는 땅을 팔거나 재개발이 돼 하는 경우다. 나머지 20%가 다른 경우인데, 무덤을 꺼내는 것 자체가 잘못됐던 걸 꺼낸다는 의미다. 그게 과거로 가는 여정 같다고 생각했다. 뭔가 과거의 잘못된 것을 꺼낸다는 것, 거기에서 이야기가 출발했다. -파묘와 친일파, 일본제국주의를 연결한 까닭은.소재를 계속 파헤치면서 어떻게 하면 더 깊이 있는 이야기가 나올까 고민했다. 그런데 파묘를 검색하다보면 친일파 파묘란 단어가 많이 나온다.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가까운 과거이면서 더 밑에는 뭐가 있을까로 계속 들어갔다. 티눈 수술을 했는데 고름을 빼도 끝이 아니더라, 뿌리까지 뽑아야지 새로운 게 나온다. 그것처럼 친일파 밑으로 뿌리까지 파 내려가보자고 마음먹었다. -영화 초반 틀니 일화는 감독의 실제 일화에서 비롯 됐다던데.친척 분 중에 무속인이 계신다. 난 할머니가 거의 키워주시다시피 해서 할머니에 대한 정이 많다. 돌아가신 뒤 할머니를 기억하려 틀니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친척 분이 할머니 틀니를 갖고 있냐고 하시더라. 그래서 갖고 가셔서 불 태워서 공양하셨다고 하더라. -일제가 한반도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는, 사실 실체가 불분명하다. 말뚝을 박아서 정기를 끊는다는 이야기는 정조실록에 정조가 인재가 없는 걸 한탄하자 고려말 명나라 도사가 와서 정기를 끊기 위해 말뚝을 박아서 그렇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오래된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 이야기를 영화 속으로 가지고 들어온 이유는. 그말대로 쇠말뚝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사로도 “99%는 가짜다. 그럼 1%는?”이란 대사를 넣었다. 영화 속에 실제 쇠말뚝을 안 넣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내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깐. 게다가 쇠말뚝을 넣으면 너무 ‘국뽕’일 듯 했다. 그래서 쇠말뚝을 대체할 수 있는 상징성이 있는 걸 넣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걸 오컬트 장르에 붙여보자고 생각했다.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중에 ‘사무라이의 시대’란 게 있다. 그걸 재밌게 봤는데, 4화인가에 임진왜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무라이들이 조선인을 죽이는 게 삽화로 묘사되는데 기분이 너무너무 안 좋더라.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 군국주의 침략의 상징과 사무라이 정령을 결합시키고 그걸 쇠말뚝을 상징화하는 걸로 만들었다. 그걸 뽑으면 이 땅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파묘’에 그 상징을 한반도 허리에 해당하는 곳에 박아놓는 음양사 이름을 무라야마 준지라고 설정했는데.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귀신’ 등을 집필한 무라야마 지준에서 따온건가.노코멘트다. ‘사바하’ 때 고생을 많이 해서리. -최민식이 맡은 상덕, 김고은이 맡은 화림, 유해진의 영근, 이도현의 봉길 등 주요 인물들의 이름들이 다 독립운동가에서 비롯됐다. 나라를 지킨다는 뜻의 보국사나 그 절을 세운 스님 이름이 원봉이라는 것도 그렇고, 의열장의사란 이름도 그렇고. 이렇게 이름을 지어야겠다고 언제부터 마음 먹었나.처음부터다. 원래 전작들에서도 극 중 인물들 이름을 영화 주제에 맞게 지었다. ‘파묘’는 앞에는 오컬트, 뒤에는 항일이다고 하는 평이 있는데 난 두 개가 같은 맥락이라고 처음부터 생각했다. 무덤을 한 번 더 파는 것이라고. 친일청산과 항일을 나눠서 생각하는 게 아닌 것처럼. 독립기념관에 갔는데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분들이 너무 많더라. 그 분들의 이름을 어감을 고려해 되살리려 했다.-네 명 주인공들의 옷색이 파란색(좌청룡)과 검정색(북현무), 빨간색(남주작), 하얀색(우백호)인 건 사방신의 의미를 고려한 것인가. 캐릭터 포스터에서도 이들이 각 사방을 보고 있는데.의상을 설정 할 때부터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가장 먼저 고려한 건 최민식-유해진 세대와 김고은-이도현 세대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초반에 화림이 의뢰를 받은 미국 저택에서 불상 뒤에 야차상을 꺼내 놓는 건, 2부 오니의 등장을 알리는 복선으로 준비한 것인가.그렇다. 영화가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갈 때 이질감을 없애기 위해 도깨비, 요괴 등 이물감을 줄 수 있는 물건들을 곳곳에 배치했다.-왜 이야기를 이렇게 두 갈래로 만들었나. 원래 구상을 할 때는 미국 의뢰인 박지용이 주인공이었다. 깔끔한 오컬트 같은 구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쓰다가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졌다. 극장에 가서 마스크를 쓰고 영화를 보는데 많이 답답하더라. 그 당시 작가주의 작품들이 많이 개봉하기도 했는데, 여느 때라면 극장에서 사유할 거리를 얻고 극장문을 나서는데, 코로나 때는 답답하게 나오게 되더라. 그럼 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게 뭘까를 고민하게 됐다. 난 체험이라고 생각했다. 관객이 체험할 수 있도록 앞의 빌런과 뒤의 빌런을 다르게 하고, 정통 오컬트에 다른 장르를 접목시키고자 했다. 난 뒷부분을 크리처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뱀파이어, 미이라, 강시영화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것들 역시 광의의 오컬트물이고. 초자연적 존재들의 이야기니깐. 그리고 그런 뒷부분을 이런 장르물 마니아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었던 건, 앞에는 보편적이고 뒤에는 마니아들이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반대였다는 점이다. ‘황혼에서 새벽까지’처럼 영화 속에서 장르가 바뀌는 부분이 덜 대중적이고 마니아들이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반대라 의외였다.-무속인들이 LA에 출장을 많이 가나.실제로 많이 간다. 특히 일본으로 가장 많이 간다. 일본에는 우리 같은 의미의 신내림이 거의 없어서 알음알음 소개로 많이 간다. 미국도 재미교포들 소개로 많이 가고. 풍수사들도 해외 출장을 많이 다닌다.영화에 편집된 장면이 있는데 화림과 봉길이 일본으로 출장을 갔던 장면이 있다. 무당길드라고 해야 할까, 스승님이 있고 거기서 파생된 신자매, 가족들이 있다. 대사에도 나오지만 그 스승님이 일본과도 연이 있었던 거다. -그래서 첫 장면에 김고은이 일본인이 아니다라고 일본어로 이야기하는 건가.화림이 일본어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 영화의 톤앤매너, 지향하는 바를 그 대사로 보여주고 싶었다. -컨버스를 신고 에어팟을 꼽는 MZ무당이 화제를 모았는데.실제로도 그렇다. 무속인들을 만나면 생각보다 많이 젊다. 세대교체도 되고 있고. 많이 뛰다 보니 도가니가 아파서 컨버스 같은 편한 신발, 편안한 구두를 많이 신는다. -이도현이 맡은 봉길이 몸에 새긴 문신은 태을보신경인가. 그 캐릭터도 실제 인물에서 가져왔다던데.태을보신경이 맞다. 잡귀신으로부터 몸을 보호해달라는 경이다. ‘사바하’ 때 야구선수를 하다가 신병이 와서 무당이 된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이 몸에 그렇게 문신을 새겼다. 언젠가 그 캐릭터를 꼭 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봉길로 가져왔다. -대살굿이 원래 있나? 타살굿인데 영화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대살굿으로 바꿨나.통상적으로 타살굿이라고 많이 한다. 저승사자가 왔을 때 마지막으로 제물이 대신 죽는 굿. 그걸 대살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대살굿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하더라. 그래서 영화적으로 대살굿으로 썼다.-김고은이 대살굿을 할 때 받는 건 몸주신인 할머니인가, 아니면 다른 귀신인가. 할머니와 대살굿이 어울리지 않는데.대살굿을 할 때는 장군신을 받는다. 아주 강력하게 맞서야 하니깐. 대살굿은 저주 같은 오펜스굿이 아니라 방어하는 디펜스굿이다. 그래서 그 때는 자신의 몸주신이 아니라 장군신이 오는 것이다. -대살굿은 실제 굿의 동선을 그대로 가져온 것인가.그렇다. 원래는 4시간 짜리 굿을 5분 안에 보여줘야 했기에 어떤 걸 보여줘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김고은이 무속 선생님 집에서 연습을 정말 많이 했다. 하루 종일 리허설을 했다. 그 뒤 하루에 몰아서 카메라 4대로 찍었다. 그 감정을 나눠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깐. 일단 김고은에게 즐기는 모습을 모습을 보여달라고 주문했다. 실제로 무속인은 신을 받으면 즐긴다. 웃음도 보이고. 김고은이 굿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 칼로 자신의 얼굴을 긋는 장면, 뜨거운 숯에 손을 넣는 장면 등은 자신에게 신이 들어왔는지를 확인하고 남들에게도 보여주기 위해서다. 내 안에 신이 들어와서 나도 멀쩡하니 당신들도 안전할거야라고. 그걸 보고 인부들이 일을 시작한다. 칼을 땅에 묘지 방향과 반대로 던지는 건, 원래 모든 굿이 그렇다. 이 근처의 나쁜 것들이 이 칼 밖으로 나가 일종의 결계가 쳐지는 것이다. 화림이 동물 피를 마시는 건, 신에게 일종의 밥을 바치는 의미이고. -굿을 시작하기 전 봉길이 화림의 신발끈을 묶어주는 게 많은 연성러들을 자극시켰는데. 둘의 관계는 이성적인 게 담겨 있거나 발전 가능성이 있는 건가. 둘의 전사를 담은 이야기를 만들 계획은?무속 세계에선 스승이 굿 준비를 하면 제자나 신아들,딸들이 옷도 입혀주고 신발도 신겨주고 다 준비를 해준다. 둘의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려고 그 장면을 넣었다. 이성적인 마음이 담겨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둘의 전사를 담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파묘’보다 더 재밌는 좋은 이야기여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산소탈로 직계 장손들이 해를 입는데, 왜 직계가 아닌 의뢰인의 어머니 즉 친일파 유령의 며느리까지 죽임을 당하는 건가. 영화적 설정 오류이지만 며느리가 죽는 건, 엔딩크레딧에 써 있듯이 이름이 배정자이기 때문인가? 일제시대 대표적 친일파?노코멘트다. 설정이 어긋나는데 작가의 개입인 것만은 분명하다. -친일파 영혼이 LA집 창문을 열어달라거나 프라자호텔 창문을 열어달라고 하는데. 사실 문을 열어줘야 들어간다는 건 뱀파이어물의 특징이지, 동양적인 오컬트 특징은 아닌데. 맞다. 연출적으로 재미를 주려고 섞은 것이다. -전반부 친일파 귀신 장면은 덜 자극적인 것 같은데.일부러 담백하게 담았다. 더 직접적이고 잔인한 장면들이 있었는데 편집했다. 전반부가 담백해야 후반부에서 더 강렬할 것이라 생각해서 그리했다. -친일파 귀신이 사실 영화 속 곳곳에 숨겨져 있는데.유리에 비추기도 하지만, 잘 찾아보면 많은 곳에 있다. 심령사진을 보면 귀신은 찍는 게 아니라 찍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찍힌다는 느낌으로 영화 속에 담았다. -첫 번째 묘를 꺼낼 때 등장하는 뱀은 일본요괴 누레온나인데. 하필이면 돼지띠 일꾼에게 죽임을 당한다. 돼지랑 뱀은 상극이기도 한데. 그래서 동티 난 그 일꾼은 틀니 파묘할 때 나온 인물이기도 한데. 일이 해결된 뒤 어찌 되나. 누레온나는 물의 요괴다. 잘못된 것을 건드렸다는 설정으로 넣었다. 물의 요괴라 그걸 건드리자 비도 오고 그러는 것이다. 원래 묘가 탈이 나는 경우 뱀이 관에 들어오는 ‘사염’, 벌레가 들어오는 ‘충염’, 바람이 든다고 해서 ‘풍염’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는 뱀이 관에 들어갔는데 밑의 요기가 너무 세서 뱀이 변태가 일어나지 않았을까란 설정이다. 그래서 비슷한 대사도 넣었다. 그 인부는 틀니 파묘할 때 나온 인물이 맞다. 일부러 동티 나는 인물로 연결하기 위해 틀니 파묘할 때 포커싱을 잡았다. 편집됐는데 나중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그 양반도 좋아진다는 장면이 있었다. 동티풀이가 된 셈이니깐. -조선총독부가 보이는 프라자호텔은 세트 촬영인가.내부는 세트고, 창에 보이는 광화문 정경은 프라자호텔에서 소스 촬영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소스를 LED월을 띄우고 촬영했다. 블루스크린를 놓고 합성을 하는 건 색감이 잘 안맞는 것 같았다. -친일파 귀신 혼부르기를 할 때 화림이 그 장례식장 주소를 읊는데.실제로 그렇다. 혼이 와야 할 위치를 부른다. 무속인에게 고증을 받아 만들었다.-의뢰인에게 진짜 상덕이 거는 휴대전화 진동음과 친일파 귀신이 거는 휴대전화 진동음이 다른가.아니다. 같다. 쇼트 길이가 차이가 나서 같은 음을 넣는데 리듬이 달라진 것이다.-의뢰인이 욕조에 누워있는 것을 비롯해 전반부에 물의 이미지가 많은데.그렇다. 욕조도 그렇고 땀도 그렇고 비도 그렇다. 후반부에는 불의 이미지가 많다. 드럼통 불도 그렇고. 그렇게 물과 불의 이미지를 전반부와 후반부에 대비시켰다. -친일파 관을 태울 때 일제 시대 때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훈장이 들어있는데.그래서 이장할 때 그 신분이 드러날까봐 관을 열지 말고 그대로 화장하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염을 할 때 먼길옷을 입히는데, 우리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생전에 고인을 상징하는 옷을 입히는 경우도 있다. 고인이 좋아하는 물품을 넣기도 하고. -영화에 등장하는 숫자는 실제로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하는 곳인가. 어디며 어떻게 짚었나.풍수사들에게 물었더니 모두 같은 곳을 이야기하더라. 강원도 고성 향로봉이다. 영화 속에도 나온다. 상덕 화림 등이 얼굴에 문신하고 산에 올라갈 때 드론샷으로 산의 정경을 인트로로 잡는데 바로 그곳이 향로봉이다. -관을 두 개 넣는 첩장은 새로운 건 아니지만 밑에 넣는 관을 세로로 넣어서 마치 못의 형국으로 만든 게 기발한데.이야기했지만 실제 쇠침, 쇠말뚝을 넣는 게 아니라 그걸 상징하는 걸 넣고 싶었다. 그래서 그 자체를 못처럼 만들었다. -흉한 것인 오니의 설정은.전쟁터에서 신처럼 모셔지려면 외형부터 거대해서 위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8척 거구를 생각했고, 2미터 40센치미터로 설정했다. 임진왜란에도 참전했고, 그 뒤 세키가하라 전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반대 진영에 참전했다가 패배한 뒤 영화 내용처럼 된 인물이란 설정이다.-한국의 도깨비와 일본의 오니는 다른 존재인데. 그래서 5장 도깨비불 옆에 일본어로 오니라고 적었다. 다른 소제목은 다 한글 옆에 한자인데 그것만 일본어다. 원래는 그 장의 제목을 도깨비라고 했다가 너무 의미가 많을 듯 해서 좀 더 명징하게 가고자 도깨비불로 가고 옆에 오니를 넣었다. 그때부터 막가는 설정이니 좀 더 직관적인 제목으로 관객을 인도하고 싶었다.-도깨비불로 주인공들이 환각을 보는 데 별다른 설명은 없는데.자연스럽게 관객이 같이 홀리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왜 나이트클럽 들어가면 처음에 사이키 조명에 홀린 것처럼. 플래시백 느낌으로 만든 게 아니니 설명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니가 오백년 전에 불경을 정복했다고 하는 장면은 ‘드라큘라’가 떠오르는데.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 광팬이다. 거기에서 드라큘라가 십자가를 이미 정복했다고 한 장면의 오마주다. -오니가 은어와 참외를 좋아한다는 설정은.일본만화 ‘음양사’를 좋아하는데, 은어와 참외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거기에서 전국시대 사무라이가 좋아할 법한 음식들을 고민해서 가져왔다. -화림이 탑으로 가니 안전했다는 건. 탑, 곧 부도는 스님의 사리가 있는 곳이고 그래서 신성하다는 의미로 설정했다. -보국사 보살이 봉길 위에 올라간 뒤 자신의 옷을 찾는데. 불교에서 선종할 때 부처의 옷을 입고 육신의 원한을 잊는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인지. 보통 영은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고, 그 억울함을 표현할 수 있는 것과 스님의 옷을 매칭시켰다. 그 장면을 그렇게 해석해도 될 듯 하다. -음양오행을 마지막 문제 해결의 원리로 사용했는데.오행이 원래 풍수지리의 베이스다. 풍수사가 과연 어떤 걸 마지막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결국 풍수사가 오행을 고민해서 싸우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영화 속에서 화림과 봉길은 ‘음양’, 상덕 영근은 ‘오행’이란 설정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거론되는 그 무덤을 만든 기순애는 일본어로 여우인 키츠네에서 온 것인가. 그렇다. 일제 때 우리나라 문헌에도 여우를 기순애라고 표현한 것들이 있다. 연배가 있으신 분들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보국사 표시판에 있는 풍수사 표식은 원래 있는 것인가.그렇다. 풍수사협회에 따라 다양한 표식들이 있는데 가장 이 영화에 맞는 걸 가져왔다.-화림의 몸주신인 할머니는 일본 음양사랑 맞섰거나 그런 전사가 있는 인물인가. 실제 무속인인 고춘자님이 연기했다던데.화림의 조상 중 음덕을 많이 쌓은 분이란 설정인데 그런 전사까진 설정하진 않았다. 일종의 수호천사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고춘자님이 두 번 정도 등장하는데, 그 장면들은 직접 찍으셨다. 그런데 워낙 바쁜 분이라 보충 촬영은 대역이 찍었다. -여느 퇴마극과 달리 주목을 사이에 놓고 오니와 화림이 대화를 나누는 게 이채로운데.어느 산이든 산주인이라 불리는 큰 나무가 있고, 그걸 주목이라 불렀다. 일본은 그런 경우가 많은데, 우리도 성황목이라 불리는 나무들이 있었고. 그걸 일본의 정령신앙을 대입해서 풀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병실에 누워있는 봉길을 놓고 도깨비놀이를 하는데. 제주도에 있는 굿인데, 귀신을 속여서 정체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오니 투구에 지네 문양이 있고, 봉길을 놓고 닭으로 대살굿을 준비하는데. 지네와 닭이 천적이라는 걸 고려한건가.지네는 항상 북쪽으로 간다. 뒤로 가지 않고 전진을 하고. 그걸 오니의 캐릭터에 은유하고 싶었다. 그리고 닭은 그걸 고려했다기보다 봉길이 닭띠라 닭을 준비한 거다. 일종의 대살굿이니 앞에서 돼지 띠 인부들을 위해 돼지를 준비한 것처럼.-유해진을 교회 다니는 설정으로 한 건.그래도 제가 교회 다니는 집사인데 이런 영화 만들면서 교인들에게 면피를 하고 싶었다. 실제로도 만난 장의사 중 한 분이 교회 장로님이기도 했고. -음악 설계는 어떻게 했나. ‘사바하’도 같이 했던 김태성 음악감독과 작업했는데.전체적으로 저음이 많다. 불협화음이 도드라지고. 김태성 음악감독님이 훌륭히 해주셨다. -마지막 결혼식 사진 장면은 독립운동가 사진들을 은유한 것인가. 또한 ‘사바하’ 이다윗이 등장하는 건 장재현오컬트유니버스를 고려한 설정인가.독립운동가 사진처럼 찍은 것이냐는 질문은 노코멘트하고 싶다. 이다윗이 등장하는 건 사실 원래 조명팀 중 한 명에게 그 장면을 부탁했는데, 마침 다윗이 시간이 있다고 해서 찍었다. 특별히 장재현오컬트유니버스를 고려한 건 아니다.-‘사바하’의 이정재 이다윗, ‘파묘’의 김고은 이도현이 한 사건을 쫓는 설정으로 ‘사바하2’를 만들 계획은 없나.오컬트유니버스가 계획에 없는 건 아니어서 매 작품마다 다른 배우들을 캐스팅 하기는 했다. 시나리오를 빨리 쓰기야 ‘사바하2’보다 ‘파묘2’가 빠를 수는 있겠지만 더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 것이라 장담을 못하겠다. 등장인물보다 얼마나 재밌는 이야기여야 하는 가가 가장 중요하다. -‘검은 사제들’에선 사람을, ‘사바하’에선 하늘을, ‘파묘’에선 땅을 이야기했는데. 차기작은 어떤 걸 이야기할 계획인가.신에 대한 이야기다. 믿음에 대한 이야기고. 어두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건국전쟁’ 감독이 ‘파묘’에 좌파가 몰리고 있다고 했는데.일단 영화를 봐주셔서 감사하다. 아무래도 영화를 보시고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겠나. 난 ‘파묘’가 색깔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땅에 사는 한국사람이라면 무의식에 담겨 있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다. 전형화 기자 brofire@edaily.co.kr 2024.03.05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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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축구대표팀 유니폼은 왜 국기 색상과 다를까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축구 국가대표팀의 유니폼 색상은 주로 자국의 국기로부터 따 온다. 물론 예외도 있다. 전통적인 축구 강국 중에는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가 대표적이다. 신흥 강국 중에는 일본과 호주가 있다. 최근의 독일대표팀은 2018, 2022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연달아 실패하며 부진에 빠졌지만, 전통적으로 이들은 꾸준함의 대명사였다. 독일은 월드컵에 19번 출전해 8강 이상을 16번 기록했고, 결승전 최다 진출국(우승 4번, 준우승 4번)이다. 뛰어난 축구 실력과 더불어 독일대표팀은 아름다운 셔츠를 종종 선보이며, 글로벌 축구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독일대표팀의 홈 셔츠는 흰색이다. 국기 색상인 검정, 빨강, 금색(노랑색이 아님)과 연관이 없다. 예전에 이에 관한 주제를 다룬 적이 있지만, 필자의 글을 처음 접하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소개한다.키트 색상의 역사는 11세기 말에 시작한 십자군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성지 예루살렘을 무슬림으로부터 되찾기 위해 많은 가톨릭 수도회가 생겼다. 수도회에 속한 이들은 수도자이자 기사였다. 이 중 대표적인 기사단이 구호기사단, 성전기사단, 튜튼기사단(독일기사단)이다. 튜튼기사단은 예루살렘이 위치한 레반트 지역과 발트해의 기독교인을 보호했다. 튜튼기사단은 13세기 초반 발트해 남동쪽에 독일 기사단국을 세웠다. 16세기 초반 기사단국은 세속 국가로 전환하며 프로이센 공국이 되었다. 1701년 왕국으로 승격한 프로이센은 1871년 분열된 독일 민족을 통일하며 독일 제국을 출범시켰다.독일 축구대표팀 키트의 색상은 1926년 이후부터 흰색 셔츠, 검은색 바지에 흰색 양말이 되었다. 블랙과 화이트로 구성된 프로이센 국기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또한 프로이센의 국기는 튜튼기사단의 상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독일팀의 홈 키트 색상은 십자군 전쟁에서 유래했다.195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TV에서 축구가 중계되었다. 경기장의 관중들은 한 팀이 파란색 다른 팀이 빨간색 혹은 검은색 셔츠를 입어도, 두 팀을 구분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흑백 TV를 통해 경기를 보는 시청자들에게는 혼란을 일으켰다. ‘두 번째 색상(second color)’을 가진 어웨이 셔츠가 본격적으로 나오게 된 계기다.1954 스위스 월드컵에 참가한 서독대표팀의 어웨이 셔츠는 녹색이었다. 이후 2000년까지 녹색이 짙어지거나 다른 색상과 혼합될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녹색은 이들의 어웨이 셔츠 칼라였다. 축구 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독일대표팀은 자신들과 별 상관없이 보이는 녹색을 생뚱맞게 택했기 때문이다. 이에 그럴듯한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2차대전 후 전범국이 된 서독과 축구를 하고 싶은 유럽 국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아일랜드가 곤경에 빠진 서독에 손을 내밀어 경기를 갖게 된다. 이후 서독축구협회는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아일랜드의 상징 색상인 녹색으로 어웨이 셔츠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낭만적인 스토리는 오랫동안 사실처럼 축구팬들 사이에 떠돌았다. 심지어 현재 구글에서 검색을 해도 이렇게 설명이 된 경우가 꽤 있다. 하지만 현실은 주로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팩트를 얘기하면, 아일랜드는 서독과 축구를 처음 한 국가가 아니다. 전쟁 후 서독과 맞대결한 첫 번째 나라는 스위스였다. 1950년 11월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서독과 스위스의 친선 경기에는 무려 10만 2000여 명의 관중이 모일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1942년 11월 슬로바키아전을 마지막으로 8년 만에 열리는 국가대표팀 경기였기 때문이다. 결과는 서독의 1-0 승리. 서독팀은 1951년 4월 스위스와 리턴 매치를 했고, 6월 베를린에서 터키와 경기를 가졌다. 9만여 명의 관중이 모인 터키와의 경기 때 서독은 처음으로 녹색 셔츠를 착용했는데, 1-2로 패했다. 이후 서독은 오스트리아와 경기를 했고, 같은 해 10월 더블린에서 마침내 아일랜드와 대결해 2-3으로 졌다.그렇다면 녹색의 기원은 도대체 어디일까? 나치 시절의 독일축구협회(DFB)는 이니셜 D, F, B를 검은색, 흰색, 빨간색으로 표시했다. 흑-백-적은 독일 제국의 국기색으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상징이었고, 1933년 히틀러의 나치당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해체하며 부활시킨 색상이다. 종전 후 1949년 DFB가 재조직되면서 새 로고가 만들어졌다. 축구장의 피치를 상징하는 녹색이 협회의 시그니처 칼러가 되었고, 그린 색상의 어웨이 셔츠는 이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독일 국기의 색상인 검-적-금이 DFB의 로고에 추가되면서, 어웨이 셔츠도 녹색 일변도에서 변하기 시작했다. 독일팀은 2002 월드컵에는 ‘두 가지 색으로 된 회색(two-tone grey)’, 2004 유로에는 검은색 어웨이 셔츠를 선보였다. 2006년 자국에서 개최한 월드컵 때는 당시 감독이었던 위르겐 클린스만의 강력한 제안으로 빨간색을 어웨이 색상으로 정했다. 많은 팬들이 익숙한 녹색으로 돌아오길 바랐지만, 클린스만은 “적색 셔츠가 팀에게 심리적 우위를 주고, 행운을 가져오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클린스만의 기대와는 달리 월드컵을 앞두고 열린 평가전에서 적색 셔츠를 입은 독일팀은 1승 3패로 저조했다. 그나마 거둔 1승의 상대도 약체인 남아공이었다. 클린스만은 “월드컵 본선에서 가능한 자주 적색 셔츠를 입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독일대표팀은 2006 대회 때 치른 모든 경기에서 흰색 셔츠를 입었다. 참고로 독일이 월드컵과 유로에서 각각 4번, 3번 우승했을 때 그들은 언제나 흰색 홈 셔츠를 착용했다.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객원교수 2024.03.01 15:00
해외축구

FIFA SNS 계정에 욱일기 등장…네티즌 지적에 '삭제'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공식 소셜미디어(SNS)에 일본의 욱일기가 올라왔다가 네티즌의 항의로 삭제되는 일이 벌어졌다.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14일 자신의 SNS에 '최근 FIFA 월드컵 공식 계정에 욱일기가 또 등장해 논란이 됐다'며 '12월 13일부터 22일까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리는 FIFA 클럽 월드컵을 홍보하기 위한 프로모션 이미지가 계정에 올라왔다. 지난해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참가하는 우라와 레즈를 소개하는 이미지도 업데이트됐는데 이 이미지에서 유럽파 출신 나카지마 쇼야가 메인에 등장했고 배경으로 욱일기가 사용됐다'고 밝혔다.서경덕 교수에 따르면 욱일기 사진은 많은 한국 네티즌이 댓글과 메시지로 항의, 결국 관련 사진이 삭제되고 다른 이미지로 바뀌었다. 서 교수는 '욱일기는 일본인들의 풍어, 출산 등의 의미로도 사용돼 왔지만, 과거 일본이 아시아 각국을 침략할 때 전면에 내세운 깃발로 일본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상징한다'며 '즉 FIFA와 같은 국제기구에서 욱일기 디자인을 사용하는 것은 아시아인들에게 과거 일본이 범한 전쟁범죄의 공포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행위다. 그리하여 지난 카타르 월드컵에서 일본 측 응원단이 펼친 욱일기 응원을 FIFA 측에서 즉각 제지했던 것'이라고 전했다.이어 '이처럼 FIFA에서의 욱일기 응원 제지, 이번 공식 SNS 계정에서의 신속한 욱일기 삭제 등의 좋은 사례를 가지고, 향후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 또다시 등장할지 모를 욱일기 디자인을 꾸준히 없애 나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배중현 기자 bjh1025@edaily.co.kr 2023.12.14 08:58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아름다움에 감춰진 유체이탈 화법 [정진영의 독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전쟁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면 지나치게 관조적인 자세다. 특히 그 말이 전범국의 입에서 나온다면 차원이 달라진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이자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지브리에서 나온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도무지 곱게 보이지 않는 이유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것부터 확실히 한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메시지는 반전(反戰)에 가깝다. 인류가 전쟁으로 쌓아온 지난 과오를 소년 마히토는 짧은 시간 동안 체감하고, 악의가 없는 새로운 돌을 쌓고자 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인류는 이토록 어리석은 선택과 행동을 반복해왔는데, 후손인 당신들이 정말 또 그것을 반복하겠는가라는 의미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류가 계속해서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는 점에서 이 물음은 회의적이지만, 전쟁과 제국주의가 초래한 결과가 처참함을 극에서 계속 보여줬다는 점에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당부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가해국가의 국민으로서 자기연민에 빠지지 말라거나 자신의 서사를 이야기하지 말라는 오래된 이야기를 반복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전쟁의 화살은 전범국의 민간인을 비껴가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로 추정되는 7500만 여명 가운데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민간인은 전쟁을 일으킨 주체가 아니다. 전쟁으로 일본의 민간인들 역시 다수 세상을 떠나거나 그 후유증으로 고통받았다. 당연히 전쟁을 일으켰던 당시 일본 국민에게도 꿈이 있었을 것이며(‘바람이 분다’), 일본인 가운데도 자국의 제국주의나 전쟁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붉은 돼지’).1941년생으로 어린 시절 제2차 세계대전을 관통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여러 작품을 통해 전쟁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드러냈다. 개봉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의 흥행 신기록을 세웠던 ‘하울의 움직이는 성’ 역시 전쟁이 남긴 상처를 그렸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이 같은 작품들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같지만, 한 가지 확연한 차이점이 있다. ‘전쟁의 시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다. 영화는 초반부터 이 작품의 배경이 언제인가를 명확히 알려준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엄마를 잃은 마히토는 아빠와 함께 시골로 내려간다. 그곳엔 엄마와 꼭닮은 엄마의 동생, 즉 이모가 있다. 뱃속엔 자신의 동생을 임신한 채다.그곳에서 마히토는 미스터리한 건물을 하나 발견하는데, 집에서 일하는 할머니들에 따르면 그것은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기 바로 얼마 전 마히토의 조상이 세운 것이다. 그 조상은 학문을 무척 사랑한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래서 탑 안이 모두 책으로 가득 차 있다. 사실 이 탑은 하늘에서 느닷없이 떨어진 어떤 돌탑을 가려놓은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돌탑과 학문에 조예가 깊은 할아버지가 세운 책으로 가득한 건물.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본을 덮친 서구 제국주의의 물결을 받아들인 일본이 서구의 사상을 배움으로써 그들을 따라가고 나라를 개혁하고자 하며 메이지유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집 안에 걸려 있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흡사 서구인으로 보인다는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여러 차원의 레이어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전쟁에서 엄마를 잃은 마히토라는 소년의 시각에서 본 전쟁을 판타지적으로 그려냈다고도, 삶과 죽음에 대한 동화적인 성찰이라고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분석과 전쟁에 대한 생각을 담아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세 번째 관점에서 보면 영 찝찝하다.미스터리한 건물로 들어간 이후 마히토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혹은 작품 속에선 할아버지)이 일으킨 제국주의에 대해 살펴보게 된다. 마히토가 건물 안에서 마주치는 앵무새는 2차대전 당시 마지막 몇 개월 동안 활동했던 독일 공군 최정예 전투비행단인 제44전투단을 떠올리게 하며, 태어나기 위해 날아가는 와라와라를 잡아먹는 펠리컨을 히미가 불로 태우는 장면은 2차대전을 종식시킨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을 떠올리게 한다. 히미의 불길은 펠리컨 뿐 아니라 와라와라들까지 불태워 죽이는데, 이는 원자폭탄 투하로 수많은 민간인들 역시 참혹하게 살해당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비슷한 대사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도 나온다. 하울은 “적이야? 아니면 우리 편?”이라고 묻는 소피에게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라고 답한다. 이 불길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펠리컨 한 마리는 “그러게 와라와라를 잡아먹지 않았으면 될 것 아니냐”는 마히토에게 “우리는 와라와라를 잡아먹기 위해 이 섬에 끌려온 것이다. 이 섬엔 먹을 게 없다. 우리는 더 높은 곳으로 날아봤지만 계속해서 이 지옥 같은 섬으로 떨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이는 마치 1939년의 일본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육지로 뻗어나갈 수밖에 없었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을 식민통치한 것과 같은 제국주의의 횡포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으로 들린다.어쩌면 선택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비슷한 참상이 반복되거나, 다른 사람들이 희생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배와 피지배, 제국주의와 전쟁을 그 같이 관조적인 시선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피해자여야 한다. 올 초 개봉했던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볼륨3’에서 진화를 위해 처참한 신체 개조를 당한 라일라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로켓에게 이 같이 말한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이들에겐 그들을 이곳으로 이끈 더 큰 섭리가 있어”라고. 이 말이 울컥하게 다가오는 건 그러한 끔찍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친 피해자 라일라가 얻어낸 해답이기 때문이다. 그 말을 타인의 신체를 대의라는 명분으로 훼손한 하이 에볼루셔너리(츠쿠디 이우지)가 했다면 결코 그런 감동은 없었을 것이다.‘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전쟁의 참상과 그것을 반복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란 끔찍한 선택은 언제나 반복됐으며(전 시간대를 통틀어서 악의가 없는 돌은 13개 밖에 없었다는 마지막 대사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죄 없는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에도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바로 그 지점이 이 영화를 불편하게 만든다. 아날로그 작업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영상미가 시각을 압도하고 섬세한 효과음이 귀를 자극할수록 불쾌해진다. ‘그런 빛나는 재능을 쏟아부어 고작 이런 제3자 화법의 납작한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물론 이 같은 해석이 잘못됐을지도 모른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언제나 그랬듯 어떤 한 시점에서 명쾌하게 떨어지진 않으니까. 다만 영화의 어떤 부분이 마치 제국주의를 변명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면, 그것에 대한 오해는 직접 풀어야 하는 것 아닐까. “인생의 창조적 시간은 10년이지. 예술가나 설계자나 똑같아.”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작 ‘바람이 분다’에서 지로는 자신의 롤모델인 비행기 설계사로부터 이 같은 말을 듣는다. 어쩌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창조적 시간은 이미 끝난 게 아닐까. 지금껏 수많은 작품으로 감각적 쾌감과 뭉클한 여운을 준 거장의 은퇴 복귀작이 고작 ‘전쟁은 나쁘지만 모든 전쟁은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이유에서 발발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너무나 큰 실망이다. 어쩔 수 없이 때렸더라도 폭력은 폭력이고, 폭력은 나쁜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80년이 가까이 되지만 여전히 한국과 일본이 앙금을 풀지 못 하는 건 이런 유체이탈 화법 때문일지 모른다.역시 2차대전의 전범국인 독일이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 속에서 고통 받는 한 민간인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독일, 창백한 어머니’를 내놓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그 영화 안에서도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납득시키기 위해 얼마나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정진영 기자 afreeca@edaily.co.kr 2023.11.01 05:48
연예일반

[IS리뷰] 동화에서 길을 잃어버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심오한데 빠져든다. 동화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 이런 걸까 싶다. 지난 25일 개봉한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전적 판타지를 담은 작품이다. 그가 은퇴를 번복하고 10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으로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어머니가 일하던 병원에 화재가 발생하고 그길로 어머니를 잃게 된 마히토. 이듬해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의 고향인 시골로 이사를 하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푸른 깃털의 왜가리는 “어머니가 살아있다”며 마히토를 자극하고 왜가리를 따라 이세계로 들어가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최소한의 티징 콘텐츠도 없고, 개봉 전 기자시사회도 진행하지 않았지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40%가 넘는 예매율을 기록하며 지브리팬들의 기대를 모았다. 베일을 벗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한국 관객에겐 불편한 요소들이 곳곳에 담겨있다. 배경부터 일본이 제국주의로 치달아 곳곳에서 전쟁을 일으켰던 1930년대다. 마히토의 아버지는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의 대표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여기에 아버지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처제 나츠코와 함께 사는 것 역시 국내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이는 마히토가 나츠코를 구하는 데 있어 감동을 만들기 위해 심어둔 장치 같으나 오히려 국내 관객이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있을 수 있다.뿐만 아니라 상징, 은유가 많고 설명은 부족하다.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는 요소 때문인지 해석도 각각이다. 한편으론 정해진 마감 기한 없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원하는 예술 세계를 자유롭게 펼친 듯한 작화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지브리 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물과 불을 활용한 장면, 인물들의 리얼한 먹방 장면 등이 이번에도 특유의 그림체와 만나 그리움을 자아낸다. 등장하는 순간 귀엽다는 말이 절로 나올법한 와라와라 무리는 보는 재미를 더한다.영화 중간중간에 깔리는 지브리스러운 음악은 장면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주제가인 요네즈 켄지의 ‘지구본’이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는데 노래가 좋아 끝까지 자리를 지킬 만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머리는 어느 순간부터 이해를 거부하지만, 눈과 귀는 즐거울 법 하다. 지난 25일 개봉. 전체관람가. 124분.이세빈 기자 sebi0525@edaily.co.kr 2023.10.28 11:55
해외축구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독일대표팀 유니폼이 십자군 복장에서 유래했다고?

각국의 축구대표팀은 다양한 색상이 들어간 셔츠를 입는다. 이들이 착용하는 셔츠 색깔은 주로 대표하는 나라의 국기에서 따 온다. 물론 예외인 경우도 있다. 전통적인 축구 강국 중에서는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가 여기에 속한다. 일본도 그들의 국기에 없는 파란색이 홈 셔츠에 단골로 들어간다. 축구팬이라면 3가지 색이 가로선으로 이루어진 독일 국기에 익숙할 것이다. 잠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보통 외국인들은 독일 국기의 검정, 빨강 밑에 있는 색깔이 노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랑처럼 보이는 이 색은 사실 금색이다. 독일에서는 금색이 아니라 노랑이라고 표기할 경우 명예훼손으로 기소되어 형사처벌 받을 수도 있다. 흑-적-금인 삼색기는 1848년 3월 혁명 때 처음 등장했고, 1919년 출범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기이기도 했다.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 삼색기는 2차 대전 이후 독일 국기로 재지정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독일축구대표팀의 셔츠는 자국의 국기 색상과는 다르게 흰색이다. 무슨 연유로 이들은 흰색에 검은색이 보조로 들어가는 셔츠를 입게 됐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 년 전 역사로 돌아가야 한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200여 년 동안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8번에 걸쳐 원정을 갔다. 이 전쟁에 참여한 기사들은 갑옷과 방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십자군이라고 불렸다. 십자군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많은 가톨릭 수도회가 생겨났다. 이들은 수도자이자 군사적 의무를 맡은 기사였다. 대표적인 기사단으로는 성전 기사단(템플 기사단), 성요한 기사단(구호 기사단, 몰타 기사단)과 튜튼 기사단(독일 기사단)을 꼽을 수 있다. 1099년 1차 십자군 원정을 통해 기사단은 레반트 지역에서 무슬림을 격퇴하고 그리스도교 국가인 예루살렘 왕국을 세운다. 성모 마리아를 위한 독일 형제수도회는 1190년 왕국의 수도인 아크레에서 성지 순례를 하는 기독교인을 돕고 병원을 설립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이 조직원들이 바로 튜튼 기사단이다. 이들은 성지인 레반트 남쪽 지역과 발트해의 기독교인을 보호하기 위해 십자군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튜튼 기사단은 검은색 십자가가 그려진 흰색 옷과 가운을 입었고, 이러한 디자인과 색상이 그들의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예루살렘 왕국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기로 결심한 튜튼 기사단은 1230년 발트해 남동쪽 지역에 독일 기사단국을 세운다. 튜튼 기사단의 37대 기사단장인 알브레히트는 가톨릭에 회의를 느껴 신교인 루터교로 개종했고, 기사단국을 세속 국가로 전환시킨다. 이로서 알브레히트를 초대 공작으로 한 프로이센 공국이 1525년 세워졌다. 프로이센 공국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1618년 연합했고,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을 형성한다. 프로이센(Preußen)의 영어 표기가 프러시아(Prussia)다. 프러시아는 러시아와 국명이 비슷하지만, 실제로 관련은 없다.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된다. 분열된 독일 민족을 두고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은 서로의 주도하에 독일을 통일하고자 했다. 재상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 왕국은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차례로 전쟁을 벌였고, 결국 1871년 통일을 이룩하며 독일 제국이 출범했다. 독일 제국의 국기는 검은색-흰색-빨간색으로 이루어진 삼색기였다. 현 독일 국기인 흑-적-금인 삼색기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상징한다면, 흑-백-적 국기는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상징이다.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을 해체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은 흑-백-적 국기를 부활시킨다. 1935년부터는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를 국기로 지정하는데, 이 깃발에도 흑-백-적 색상이 들어있다. 독일축구협회는 1900년 설립됐고, 대표팀은 1908년 스위스와 첫 번째 공식 경기를 가졌다. 당시 대표팀이 입었던 셔츠는 독일 제국의 중심적 역할을 한 프로이센 왕국의 깃발을 본떠 셔츠 소매는 흰색이고 몸통은 검은색이었다. 셔츠 가슴에는 흰색을 바탕으로 한 검은색 독수리도 들어갔다. 1926년 이후 독일대표팀 유니폼의 전형적인 색상은 흰색 셔츠, 검은색 바지에 흰색 양말로 자리 잡는다. 이 배색 조합 역시 프로이센 국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또한 프로이센 국기는 튜튼 기사단의 상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독일축구대표팀의 유니폼 색상은 12세기 십자군 전쟁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3.04.12 08:00
프로야구

한일전 또 등장한 욱일기, 서경덕 교수 "전범기, WBC에 항의메일"

한·일전에 또 등장한 욱일기에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측에 항의 메일을 보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10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WBC B조 본선 1라운드 한국과 일본의 예선전에서 욱일기가 등장한 것에 대해 "WBC 측에 항의 메일을 보냈다"고 밝혔다.서 교수는 11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서비스(SNS)를 통해 "욱일기는 일본의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깃발로서 나치 독일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와 같은 의미인 전범기라고 메일을 통해 설명했다"라면서 "욱일기 응원은 과거 일본이 범한 침략전쟁의 역사를 부정하는 꼴"이라며 "아시아인들에게는 전쟁의 공포를 다시금 상기하는 행위"라고 이야기했다. 이어 그는 "국제축구연맹(FIFA)은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일본 측 응원단의 욱일기 응원을 즉각 제지했다"며 "WBC도 욱일기 응원을 반드시 금지해야만 한다"고 덧붙였다.서 교수는 외신 기자단에 해당 자료를 보내 욱일기 응원의 문제점을 알릴 계획이다.윤승재 기자 yogiyoon@edaily.co.kr 2023.03.11 08:47
영화

서경덕 교수가 밝힌 영화 ‘영웅’ 고증 포인트

역사적 사실, 독립운동가, 그리고 웅장한 음악. 영화 ‘영웅’을 구성하는 세 가지 키워드는 ‘국뽕(과장되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행태)이 아니냐’는 오해를 불러온다. 하지만 ‘영웅’을 단순한 국뽕 영화로 폄하하기는 어렵다. 장면마다 녹아 있는 철저한 고증 덕분이다.영화 ‘영웅’은 독립운동가 안중근(정성화 분) 의사의 거사 과정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안중근의 의병 활동부터 하얼빈에서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순국까지 이어지는 장면마다 윤제균 감독의 세세한 고증 노력이 돋보인다.연출을 맡은 윤제균 감독은 안중근 의사를 다룬 서적 수십여 권을 독파하며 영화 속 ‘디테일’을 살렸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안중근 의사가 일본군 포로를 국제법에 따라 놓아주거나, 거사를 치른 뒤 수감된 곳에서 일본인 간수의 존경을 받는 장면은 ‘국뽕’이 아닌 ‘실제’였다. 일본인 포로를 놓아준 이야기는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작성한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등장하며, 일본인 간수 치바 도시치는 평생 그를 기리며 존경했다.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면도 마찬가지다. 안중근이 거사에 사용한 권총은 ‘FN M1900’으로, 총 7발의 총알이 들어간다. 영화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향해 6번의 총격을 가하는데, 실제로 안중근 의사가 체포된 후 총에는 1발의 총알이 남아있었다.9일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일간스포츠에 “영화에서 안중근 의사가 거사에 쓸 총을 최재형(장기용 분) 선생이 준비하는 묘사가 담겼다”며 “실제로 최재형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가들의 ‘대부’로 통했던 인물”이라고 설명했다.최재형 선생은 연해주 한인사회를 이끈 인물로 항일 무장투쟁을 위해 군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은 독립 운동가였다. 서 교수는 “역사 속에서 최재형 선생은 직접 안중근의 의거를 적극적으로 도운 인물”이라며 “하얼빈 의거에서 최재형 선생의 역할이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지만, 극 중에서 총을 준비해주는 역할을 맡은 것은 (군자금 지원을 적극적으로 했던) 그런 업적을 제대로 녹여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최재형 선생도 안중근 의사와 같이 유해를 조국으로 모시지 못한 상태”라고 덧붙였다.다만 뮤지컬 ‘영웅’을 영화화한 만큼, 영화 ‘영웅’은 허구의 인물이나 설정을 집어넣어 영화적 재미도 함께 살렸다. 예를 들어 극 중 이토 히로부미(김승락 분)에게 접근하는 첩보원 설희(김고은 분)는 실제 인물이 아니다.이에 대해 서경덕 교수는 “설희는 뮤지컬 ‘영웅’에도 등장하는 캐릭터로 영화에서도 연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등장하는 캐릭터”라며 “설희의 역할은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역사적 고증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당시 을미사변을 겪은 조선인들의 참담함을 함축척으로 보여주는 역할이라는 설명이다.서경덕 교수는 “개인적으로는 영화 ‘영웅’같은 콘텐츠를 OTT서비스 등으로 전세계에 퍼뜨리고 싶다”며 “문화 콘텐츠를 통해 일제의 역사를 전세계에 정확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앞서 드라마 ‘파친코’에서도 일제침략기 강제징용 문제나 쌀 수탈 등 문제가 자연스럽게 콘텐츠에 녹아들면서 일본 누리꾼들이 굉장히 두려워 했다”며 “영화 ‘영웅’도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개척점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김혜선 기자 hyeseon@edaily.co.kr 2023.01.10 06:00
해외축구

서경덕 교수 "FIFA 욱일기 제지 아주 의미 크다, 퇴출시키자"

욱일기 퇴치 운동을 펼치는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국제축구연맹(FIFA)의 너무나 적절한 조치였다"고 밝혔다. 서경덕 교수는 28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지난밤 코스타리카와 일본과의 E조 2차 경기가 열리는 알라이얀의 아흐마드 빈 알리 스타디움 관중석에 일본 축구 팬들이 또 욱일기 응원을 펼쳤다"며 "하지만 경기장 안전요원들이 곧바로 출동해 이를 제지했다"고 밝혔다. 경기장에 욱일기를 걸어 두려다 제지를 당하는 일본 팬도 있었다. 욱일기는 일본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상징한다. 일본이 19세기 말부터 태평양 전쟁을 비롯한 아시아 침략 전쟁에 사용해 온 군대의 깃발로, 과거 일본의 침략을 당한 한국과 중국·동남아 등 아시아 국가에 역사적 상처와 고통을 상기시킨다. FIFA가 제동을 걸고 나선 데 대해 서 교수는 "FIFA가 드디어 욱일기 응원을 공식적으로 제지한 것이라 아주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일로 인해 일본은 국제적 망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다시는 욱일기 응원을 펼치면 안된다는 좋은 교훈으로 삼아야만 할 것이다. 이 여세를 몰아, 전 세계 모든 스포츠 경기에서의 욱일기 응원을 다 퇴출시킬수 있도록 더 힘을 모으자"고 밝혔다. 이형석 기자 2022.11.28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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