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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김지철♥' 신소율, "순댓국 먹다 열애설, 2세 질문 스트레스..." (백반기행)

신소율이 김지철과의 열애설 비하인드와 2세 질문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털어놨다.지난 10일 방송된 TV조선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서는 배우 신소율이 출연해 허영만과 함께 강원도 원주시의 맛집을 방문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이날 허영만을 처음 만난 신소율은 "실례지만 사진 혹시 잘 찍으시냐?"며 사진을 부탁해 웃음을 자아냈다. 서로의 사진을 찍어준 두 사람은 한층 친해졌으며 허영만은 자신의 사진을 본 뒤 "거미 다리처럼 나왔다"며 8등신 비율로 만들어준 신소율의 노하우에 혀를 내둘렀다.첫 번째 식당으로 선택한 곳은 비지찌개집이었다. 식당에 들어선 허영만은 "평소에 무슨 음식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신소율은 "순댓국, 감자탕 이런 거 좋아한다. 데이트 초반에는 거의 순댓국을 많이 먹었다"고 말했다.그러다 신소율은 "(남친과 사귈 때) 삼성동에 있는 국밥집에서 순댓국을 먹고 있었다. 옆에 회식을 하는 단체 테이블이 있었는데, 연예부 기자였다"며 순댓국 데이트를 들켜서 열애설이 터졌던 아찔한 순간을 회상했다. 다음으로 국수, 옹심이까지 강원도 토속 음식을 올킬한 두 사람은 마지막 식당으로 메밀전병, 수육을 먹으러 갔다.이곳에서 허영만은 신소율이 쓴 책에 대해 물었다. 신소율은 "첫 번째 책은 제가 나이도 있고 결혼도 했다 보니 아이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 질문이 어느 순간부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내가 뭔가 안에 불편한 게 있으니까 그 질문이 불편하게 느껴진 게 아닐까"며 책을 집필한 계기를 밝혔다.이어 "두 번째 책은 말에 대한 자극을 많이 받는다. 기억에 남는 말 한마디가 좌우명으로 남을 수도 있고, 상처받는 말 한마디로 마음이 많이 상할 수도 있다. 나한테 영향을 준 말들을 생각하다가 쓰게 됐다"고 설명했다.신소율의 책 이야기를 들은 허영만은 "간단한 소재로 책을 만들었다는 건 글재주가 좋다는 거다. 글을 쓰는 힘이 있다는 것"이라며 신소율을 응원했다. 한편 배우 신소율은 1985년생으로 올해 39세이며, 지난 2019년 3세 연하의 뮤지컬 배우 김지철과 결혼했다.이지수 디지털뉴스팀 기자 2023.02.11 08:53
연예일반

류시원, "재혼한 아내 대치동 수학강사, 나보다 더 잘 벌어" (백반기행)

TV조선 ‘허명만의 백반기행’에 류시원이 출연해 재혼 풀 스토리를 공개했다. 지난 8일 '백반기행'에 출연해 허영만과 만난 류시원은 방송 최초로 재혼한 아내에 대해 "외동딸인 대치동 수학강사이고, 나이차도 많다"고 밝혀 화제를 모았다. 이날 일일식객으로 등장한 그는 허명만과 강원도 속초, 양양으로 향했다. 이어 물곰탕 맛집에 간 두 사람은 그간의 근황과 인생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며 식사를 했다. 특히1972년생으로 51세임에도 불구하고 전성기 시절 못지 않은 매력을 과시한 그는 2010년 결혼해 슬하에 딸 하나를 뒀지만 2015년 3년간의 이혼 소송 끝에 헤어지게 된 사연, 그리고 5년 뒤인 2020년 재혼에 이른 과정을 간접적으로 털어놨다. 그는 재혼한 아내에 대해 “연예인이 아니어서 비공개로 결혼했다. 잠깐 어려운 시기(이혼)를 겪고 인생에서 소중한 결정을 한 것”이라고 운을 뗐다. 이어 "혹시라도 너무 공개되면 상처가 될까 봐 (조심스럽다)”면서도 "아내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들은 많은데, 와이프가 나이차이가 좀 난다. 결혼할 때 정보 없이 하니 기자 한 분이 (나이를)잘 못 썼더라. 재혼한 아내를 2세 연하의 비연예인이라고 했는데..”라며 머뭇거렸다. 이에 허영만은 “설마 0하나 뺐나? 20살 차이?”라고 물었고, 류시원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답을 대신했다. 결국 20살 차이인지, 1이 빠진 12세 차이인지에 대해서는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잠시 후, 허영만은 류시원의 아내가 맞벌이 하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류시원은 “어디서 말한 적 없는데 최초공개한다”며 “수학 가르치는 대치동 수학강사다. 아내가 돈을 잘 벌어서 요즘은 나보다 잘 번다”며 웃었다. "결혼할 때 처가의 반응은 어땠냐?"는 질문에 류시원은 “나이차가 많이 나니까 장인어른은 아내에게 ‘네가 정말 좋다면 아빠는 오케이’라고 했는데 장모님이 걱정을 많이 했다. 아내가 외동딸이다 보니까,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좋은 모습 보여드리려 노력했다. 지금은 너무 좋다”고 답했다. 허영만은 “핸디캡이 많으니 잘해야한다”고 조언했고, 류시원은 “처가에서 잘 해줘 더 열심히 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지수 디지털뉴스팀 기자 2022.07.09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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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삼국지] 사마소, 교활하나 유능한 마키아벨리즘의 대가

‘삼국지연의’에서 사마소는 매우 간교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황제 조모를 시해한 흉험한 인물이며, 나라를 찬역한 역적이다. 게다가 종회와 등애를 시켜 서촉을 정벌하고는 그들을 의심해 모두 반역죄로 몰아 처단한다. 또 진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진공의 지위와 구석의 특전을 수도 없이 하사받고 끝없이 사양하고 반납하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마치 사심이 없는 듯 보여 교활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사마소는 간교한 찬탈자라는 이야기이다. 반면에 *춘추공양학파적 견해를 드러내기 좋아하는 최근 중국의 일부 논객들은 사마소를 충의와 인덕의 인물로 묘사하곤 한다. 이들은 사마소가 진공이 되는 것을 여섯 번이나 사양했고, 그 중에 한 번은 무려 세 번씩 세 차례 도합 아홉 번이나 사양한 것을 예로 들면서 그가 역적질 할 의도가 있었다면 이렇게 했겠느냐고 한다. 또 이들은 사마소는 위나라 황제 조모를 죽인 일에 전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 철딱서니 없는 조모가 분별없이 병력을 이끌고 사마소를 죽이겠다고 쳐들어오지만 않았더라도 그가 봉변을 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직접 병사를 동원한 *가충의 잘못이지 사마소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마소는 끝까지 위나라에 충성을 다하려고 했고 백성들을 잘 보살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소가 진공의 지위를 여러 번 사양했다는 것만으로 그에게 찬역의 뜻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면 조정에서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그를 진공에 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거듭 사양하는 태도를 취한 것은 여론을 의식한 행위였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촉한을 멸해 위명이 높아진 이후에는 진공의 자리를 바로 받았고, 그 이듬해에는 진왕이 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를 보면 그는 처음부터 진공이나 진왕이 되어 자신만의 나라를 세우고 싶었던 것이고, 다만 여론의 향배를 보기 위해 끊임없이 ‘간을 보았다’고 봐야 한다. 또 사마소가 황제를 위협해 권력을 세습하고, 황제를 시해한 일을 어찌 그의 가신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암묵적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끝내 황제의 자리를 빼앗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찬역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가 죽자 바로 그해에 그의 아들 사마염이 위나라를 대신한 것을 보면 그가 당대에 찬위하지 않은 것은 단지 후세 사람들로부터 찬탈자라는 비난을 모면하기 위한 교묘한 술책이었을 뿐이다. 이런 면에서 그가 교활한 찬역자가 아니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마소가 매우 유능하고 신중한 인물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는 훌륭한 통치자이자 위정자였다. 그는 10년의 통치기간 중 불필요한 전쟁이나 징발을 하지 않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했다. 이로 인해 중원의 경제가 되살아나고 인구가 회복됐다. 국력이 회복되자 사마소는 일거에 힘을 쏟아 촉한을 단번에 멸했으니 그가 얼마나 유능한 통치가이자 전략가였는지 알 수 있다. 사마소는 사자와 같은 무자비함과 여우와 같은 간교함을 지닌 마키아벨리적인 통치자였다. 그는 형식적으로나마 조씨 가문의 위나라에 충성했고, 백성들을 잘 보살피며 관대하게 아량을 베풀었다. 중원의 인심이 사마씨에게 향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 사마염 대에 이르러 위나라를 대체할 수 있게 된 것이다.[영웅의 이면] 사마사·사마소는 무적의 형제 사마의의 두 아들 사마사(A.D 208~255년)와 사마소(211~265년)의 성품은 무척이나 대조적이었다. 사마사는 대담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나 잔혹했고, 사마소는 소심하고 신중했으나 관대했다. 두 사람의 성격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쿠데타 바로 전날 밤 사마의는 두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몰래 살펴보았다. 실패하면 멸문지화를 당할 대사를 앞에 두고도 사마사는 태평하게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사마소는 걱정스러워 밤새 잠을 못 이루고 서성거렸다고 한다. 고평릉의 난을 성공시켜 사마씨 정권의 기틀을 닦은 것은 거의 전적으로 사마사의 공이였다. 사마사가 병력동원의 책임을 맡았는데 거사 당일 사마의가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삼천 명의 정병들이 질서정연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모의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이 군대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사마의조차 놀라 감탄했다고 한다. “이 아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없구나.”사마사는 중호군으로 재직하면서 군부 내에 만연했던 금품거래에 의한 인사관행을 뿌리 뽑았다. 이 일은 유능하다고 이름이 높았던 전임자들인 장제나 하후현도 해내지 못했다. 사마사의 일처리가 이처럼 과단성이 있었기에 그의 정적인 하안조차도 늘 그를 이렇게 칭찬했다고 한다. “생각컨대 천하의 일을 완성시킬 자는 오로지 사마사일 것이오.”사마사는 이 일로 젊은 무장들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기에 거사에 참여할 무사들을 취합할 수 있었다. 사마사는 일이 잘못되어도 남의 탓을 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을 졌다. 동흥의 싸움에서 패전하고, 병주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사마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를 보였다. 사람들은 그의 은혜에 보담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 들었다. 사마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일에 탁월했던 셈이다.반면에 사마사는 정적들을 숙청함에 있어서는 유감없이 잔혹성을 발휘했다. 사마씨 집권 이후의 유혈낭자한 숙청과 살육은 대부분 사마사의 역할이었다. 그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반대파를 모조리 처형함으로써 단기간 내에 사마씨 정권의 기반을 확고히 했다. 그는 반란을 모의한 이풍을 무단으로 체포한 후 고문 끝에 죽인 일도 있다. 이때 그는 욕설을 했다는 이유로 이풍의 입을 칼로 난도질하기도 했다. 아무튼 진의 건국은 그의 무자비한 숙청과 권력강화에 힘입은 바가 컸다.[거짓말 벗겨보기] 사마사·사마소가 제갈량 아들보다 못했다고? '삼국지연의'를 보면 사마의 삼부자가 제갈량의 계교에 빠져 상방곡에서 불에 타 죽을 뻔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마소 역시 강유에게 당해 철롱산에 갇혀 잡혀 죽을 위기에 처한다. 사마사도 양평관에서 제갈량이 발명한 연노에 혼쭐이 났다고 한다. 다 거짓말이다. 사마사와 사마소는 서방에서 촉한의 제갈량이나 강유와 직접 전투를 벌인 일이 없다. '삼국지연의'는 사마사와 사마소를 그저 부친 사마의의 후광을 이어받은 무능한 인물로 그리고 있으나 그랬다면 사마씨의 정권이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갈량, 육손의 아들들을 비교한다면 사마씨 형제가 가장 유능했다. 육손의 아들 육항은 동오의 덕장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은 허명만 높았지 가장 무능했다. 풀이 *춘추공양학파=19세기 청대 후기에 나타난 유학의 한 학파. 전통적 유교사상을 보전하면서 유럽의 근대사상을 받아들이려는 사상으로 발전했다. *가충=사마씨가 위나라를 진나라로 대체하는 일에 앞장 선 무장. 사마염이 진 무제에 오른 후 부귀영화를 누렸다. 2013.12.3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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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삼국지] 안목 없는 원술, 조조의 미인들을 탐하다

원술은 욕심이 많았다. 돈·재물·여자·권력·명성 무엇이든 갖고 싶으면 반드시 가져야만 했다. 사세삼공의 집안에서 하나밖에 없는 적자로 태어나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적이 없었다. 뭐든지 소망하면 당연히 저절로 생기는 것으로 알았다. 그것을 준비하고 마련해 주는 사람들의 수고와 고생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다. 원술이 한때 협객 행세를 한 것도 배다른 형인 원소나 조조가 낙양 소년배들 사이에서 얻고 있는 명망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었다. 원술은 소싯적에 낙양의 무뢰배들을 모아 짐짓 협의를 행한답시고 설치고 다녔다. 조조가 그를 비웃었다. 아무하고나 어울려 다니며 못된 짓이나 하는 것이 무슨 협행이냐고. 원술이 조조를 부러워했던 것은 협객으로서의 명성만은 아니었다. 원술은 미모와 재능이 뛰어난 조조의 처첩들을 탐냈다. 재력이 풍부한 원술은 양적인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많은 미인들을 소유했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조조를 따라갈 수 없었다. 이것은 돈이나 권세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안목과 취향의 차이였다. 원술은 호시탐탐 조조의 미인들을 빼앗을 기회를 노렸다. 조조가 동탁을 피해 동쪽으로 달아나자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조조는 급히 달아나느라 가족들에게 기별도 하지 못했다. 협객 세계에서 명망이 높던 원소와 조조가 동쪽으로 달아나자 원술도 이를 흉내내기로 했다. 딱히 동탁이 붙잡지도 않았는데 원술 역시 후장군 직책을 내던지고 낙향을 결심했다. 이 와중에도 그에게는 꼭 챙겨야 할 것이 있었다. 원술은 행장을 차린 후에 바로 조조의 집을 찾아갔다. 원술은 조조의 처첩들에게 은근히 겁을 주었다. “조조가 달아나다 이미 동탁에 붙잡혀 죽었으니, 너희들도 각자 도생해야 할 것이다.”조조의 처첩들이 놀라 어쩔 줄 몰랐다. 많은 여인들이 짐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갈 차비를 했다. 원술이 노린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 각자 낙향하는 조조의 처첩들 중 평소에 눈여겨 두었던 미인들을 거두어 챙겨보려 한 것이었다. 이때 창기 출신의 변부인이 나서서 적극 만류하는 바람에 원술의 이 음험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원술의 치졸함을 비웃었다. 조조가 늘 원술에 대해서만은 지나칠 정도로 각박하게 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미화된 영웅] 원술, 자기만 아는 귀공자 출신의 맹주하북의 원소, 하남의 원술. 반 동탁을 기치로 일어선 산동반군은 한 번도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된 적이 없었다. 원소가 맹주로 추대되자 원술(A.D ?~199)이 바로 반발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 나를 두고 종놈의 자식을 맹주로 추대하다니!”천하대란이 일어난 까닭은 동탁이 원봉·원외를 비롯한 원씨 집안을 멸족시켜 천하의 공분을 샀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원씨 집안과 그 문생고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들은 원씨 집안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기병했다. 원술은 적통이었으므로 당연히 자신이 맹주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생각했다. 원술의 반발은 곧바로 산동반군의 분열을 가져왔다. 원술에게 손견이 합류하자 단번에 큰 세력이 형성됐다. 황하 이남의 각지에서 일어난 대소 군벌과 종적, 향당들은 다 원술을 맹주로 삼았다. 한동안 조정에서도 반란의 수괴가 원소인지 원술인지 헷갈릴 정도로 양쪽의 세력은 팽팽했다. 맹주로 추대된 원술은 명망과 권력, 풍부한 자원을 모두 얻었지만, 이를 지키고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원술은 손아귀에 쥔 부와 권력과 명성을 마치 장난감처럼 즐기고 누리기만을 좋아할 뿐, 그것들이 커다란 책임을 수반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하남의 맹주가 된 원술은 곧 본말을 잃어버렸다. 그가 기병한 이유는 역적 동탁을 타도해 밖으로는 한나라 황실을 바로세우고, 안으로는 원씨 집안의 원수를 갚는 것이었다. 그러나 허영심이 충족된 원술은 이제 자신의 욕심부터 채우려 들었다. 원술은 사치스럽고 방탕한 성품이었고 욕심이 끝이 없었다. 한나라 황실이 *이각·곽사의 난을 겪으면서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원술은 급기야 황제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됐다. 당시 *'대한자당도고'란 참언이 크게 유행했다. 원술은 '당도고'가 바로 자신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전국새를 얻은 것도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부채질했다. 원술은 손견이 죽자 그의 부인을 협박해 전국새를 빼앗았다. 원술은 양주의 풍부한 인력과 물자를 소유한 자신의 손에 전국새가 들어오자 그야말로 명분과 실리가 부합됐다고 믿고 황제를 참칭했다. 원술이 칭제하자 하루아침에 온 천하가 그의 적이 됐다. 결국 그는 조조·여포·유비 등의 연합 세력에 처참하게 패전할 수밖에 없었다. 원술은 허명만 높았지 그에 상부하는 실력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국가 운영의 핵심이 무엇인지 몰랐다. 국가는 일방적으로 세금과 노역을 수탈해서는 존립할 수 없다. 국가는 안보와 질서유지를 통해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해주어야만 한다. 원술은 백성들을 무한 수탈했다. 어려서부터 대가없이 원하는 것을 얻는 일에만 익숙했던 때문이었다. 남양·예주·양주, 그가 거쳐 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유랑하고 토지는 황폐해졌다. 마치 메뚜기떼가 훑고 지나간 것처럼 남아난 것이 없었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아랫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수탈행위는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고, 의지할 데가 없어진 원술은 더운 여름 꿀물 한 그릇 못 얻어먹고 피를 토하고 죽었다. 부족한 것이 없었던 부잣집 도련님치고는 참으로 비참한 최후였다. 자신의 능력과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죄, 타인의 삶과 이익을 고려하지 못한 죄 탓이었다.[거짓말 벗겨보기] 손책의 출병과 옥새는 무슨 관련? 손책이 강동을 정벌하러 가려고 원술에게 군사를 빌려달라 하면서 전국옥새를 담보로 맡겼다고 한다. 마치 원술이 옥새에 눈이 어두어 손책이 자립할 의사가 있음을 알고도 병사를 내어준 것처럼 보인다. 손책의 출병과 옥새는 아무 관련이 없다. 원술은 강동에 자리잡고 자신을 견제하던 유요를 격파하기 위해 손책을 장수로 파견했을 뿐이다. 손책은 장성한 후 원술의 번장이 되어 구강군을 함락시켰고, 여강태수 육강을 토멸했다. [풀이]*이각·곽사의 난=동탁의 사후 동탁의 부장이던 이각과 곽사가 A.D 192년 장안으로 쳐들어가 동탁 제거와 관련된 사람들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한 난. 이각과 곽사는 이후 조조에게 패해 괴멸됐다. *대한자당도고(代漢者當塗高)='한나라를 대신할 자는 당도고'라는 뜻이지만 참언이므로 당도고가 누굴 가리키는지 애매하다. 훗날 당도고가 위나라라는 해석이 붙었지만 원술은 원씨를 뜻한다고 생각했다. 2013.03.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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