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프로야구에서 한국인의 기개를 드높인 장훈 씨(65)가 울었다. `박치기 왕` 김일 씨(78)를 보고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운 감정이 떠올랐는지 눈시울을 붉힌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웃으며 말했지만 목소리는 떨렸다. "김일 선배님, 선배님 ….`
■눈물과 기쁨의 교차
김일과 장훈. 1960~1970년대 일본 프로레슬링과 프로야구에서 일세를 풍미했던 두 거목은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과 설움이 심했던 당시 한국인들의 한과 상처를 씻어 준 영웅이었다.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조센징`이 스타가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런 거부하기 힘든 흐름을 거스르고 두 사람은 레슬링과 야구로 일본 열도를 평정했다.
한국민에게 진한 감동과 기쁨을 안겨 줬던 두 사람이 지난 2월 27일 오후 9시 도쿄 롯폰기(六本木) 차이나 레스토랑 `로가이로`에서 해후했다. 34년 만이다. 1972년 6월 김 씨가 동경에서 인터내셔널 헤비급 챔피언을 획득했을 때 장 씨가 경기장 라커로 직접 찾아와 "한국인의 기개를 전 세계에 떨쳐 축하드린다"며 술을 따랐을 때가 마지막 만남이었다.
"아~, 김일 선배님! 이게 몇십 년 만입니까." 그는 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김 씨의 손을 꼭 잡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휠체어에 앉았던 김 씨도 그 순간만은 벌떡 일어났다. 레슬링 후유증으로 15년 동안 투병 중으로 거동이 불편한 김 씨의 손을 잡고 놓을 줄 모르던 그는 이내 눈시울을 붉히더니 곧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또 이날의 만남이 믿기지 않는 듯 "야, 야! 이게 꿈입니까"라고 감탄사를 연신 내뱉으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그는 "일주일 전 (김일) 선배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만날 날을 손꼽으며 들떠 있었다"면서 "요코하마에서 볼일을 본 후 승용차로 시속 150km 속도를 내며 기쁜 마음으로 달려왔다"라고 밝혔다.
두 사람은 3.1절을 이틀 앞두고 만났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어 했다. 그것도 일본 중심가에서. 그는 "선배님, 우리가 몇 년, 몇 년 만입니까"라며 손가락으로 연도를 세며 지난 세월의 흐름을 되새겼다. 그는 "일간스포츠(IS)가 마련한 김 씨의 일본 방문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그 만남의 시기가 얼마나 또 늦춰졌을지 모르는 일"이라며 무척이나 기뻐했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 추억을 더듬고
특히 34년 전의 빛바랜, 일간스포츠가 준비해 간 흑백 사진 두 장을 보며 깜짝 놀라워했다. 두 장 모두 모두 김 씨가 72년 세계 정상에 섰을 때 사진. 한 장은 장 씨가 김 씨에게 술을 따르며 축하하는 것이며, 또 한 장은 라커에서 찍었던 기념 사진이다. 장 씨는 일간스포츠 취재진에게 "어디서 이 사진을 찾았느냐. 나도 없는 사진이다. 이 소중하고 값진 사진을 내게 줄 수 있느냐"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취재진은 곧바로 장 씨에게 이 사진을 선물했다.
그는 김 씨를 비롯해 이날 자리를 같이 했던 이노키 등과 함께 이 사진을 보면서 "선배님은 대단한 레슬러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또 질퍽한 농담도 건넸다. 김 씨 부인 이인순 씨(60)에게 "우스갯소리 하나 해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한 뒤 "선배님이 가장 `컸고`, 정력도 좋았다"라고 농담, 참석자들이 파안대소했다.
■사나이 중 사나이
장 씨는 또 이날 이노키에 대해서도 평가했다. 그는 "일본 사람들 중 50%는 이노키가 `좋은 사람이다`고 하고, 또 50%는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다`고 해서 난 어느 쪽일까 판단이 안 섰다. 하지만 오늘 그를 다시 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난 병마와 싸우는 선배님을 한 번도 찾아 뵙지 못했다. 하지만 이노키 씨는 한국을 두 차례나 방문, 선배님을 병 문안했다. 특히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선배님을 보기 위해 멀리 호주에서 날아왔다"라고 까닭을 밝혔다. 그러면서 이노키를 향해 "안타, 오토고야(당신 진짜 남자야)"라고 말한 후 "당신이야 말로 진정한 챔피언이다. 당신을 새로 봤다"라고 치켜세웠다.
■감동의 바다
김일 씨의 후계자 이왕표 씨는 "두 분의 만남은 감동 그 자체였다. 두 분은 서로를 그리워했다. 그런 두 분이 3.1절을 앞두고 일본 땅에서 만났으니 그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진 히데토시 요시프로모션 상무와 함께 이 자리에 참석했던 일본 엔카 가수 가오리(33)는 "오늘 김일 씨가 이노키.장훈 씨와 만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김일 씨가 정말 위대한 선수란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가오리는 이어 "한국을 새로 생각했다. 노래를 통해 한국과 일본 사람들에게 감사함과 따스함을 전달하겠다"라고 다짐했다. 가오리는 일본 엔카 국민 가수 요시 이쿠조와 함께 엔카와 한국 전통 트로트를 번갈아 불러 화제를 모으고 있는 가수다.
한편 일본서 하룻밤을 보낸 김일 씨는 28일 오후 도쿄의 오타구 이케가미역 부근 사찰 혼몬지(本門寺)에 위치한 스승 역도산 묘지를 참배했다. 이날 참배에는 역도산 제자 등 10여 명이 동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