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은 남자로서 가장 매력적인 3대 직업으로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항공모함 함장 그리고 프로야구 감독을 꼽는다. 수십에서 수백명의 구성원 한 명 한 명을 지휘하면서 하나의 완벽한 팀을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스포츠 종목의 감독을 코치(coach) 또는 헤드 코치(head coach) 라고 부르지만 프로야구 감독은 특별히 매니저(manager)라고 일컫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선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타순과 포지션을 짜고 수 많은 변수가 순간순간 발생하는 경기를 지휘하는 프로야구 감독은 그만큼 매력적이고 아무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직업. 한국에도 단 8명이 있을 뿐이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미국 일본을 꺾고 세계 4강 신화를 달성한 명장 김인식 한화 감독(59)의 하루를 뒤따라가봤다. 김 감독의 일기 형식으로 각색했다.
▲ 9일 오전 7시=기상
보통 시즌 중에는 아침 7시 전후로 일어난다. 야간 경기 후 12시 넘어 잠자리에 든 다음 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점점 늙어가니 아침잠도 없다. 2004년 말 한화 감독으로 부임한 후 구단이 마련해 준 대전 시내 아파트에서 유지훤 수석 코치와 함께 지내고 있다. 2004년 말 뇌경색으로 몸이 불편해진 이후에는 유 코치가 옆에 있는 것이 든든하다. 유 코치는 항상 나보다 일찍 일어나 신문 등을 챙겨준다. 1955년생인 유 코치가 마치 방졸(운동세계에서 선후배가 한 방을 쓸 때 잔심부름을 하는 후배를 방졸이라 하고 선배는 방장이라 부른다)인 것 같아 미안하다. 어제 황사 탓인지 목이 컬컬하다.
▲ 오전 9시=교회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재활을 하면서 아내 권유로 교회에 나가는 것은 다들 알고 있으리라. 오늘은 일요일. 집에서 가까운 교회로 걸어갔다. 항상 기도하는 내용은 똑같다. "건강을 살펴주시고 한화가 우승하도록 도와주소서." 나의 믿음의 근원은 이제 신앙이다. 원정 가면 숙소 인근의 교회를 찾아가 잠시라도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
▲ 오전 10시=식사
WBC 후 시범경기 동안에는 아침 식사를 많이 걸렀다. WBC에서 긴장하고 고생한 탓인지 입맛이 별로 없다. 오늘은 오후 2시 낮 경기라 싫어도 아침 겸 점심 식사를 챙겨 먹어야 한다. 이렇게 한 끼를 먹고 나면 경기 끝난 후 저녁을 먹게 된다. 참, 밥 먹은 후에는 약을 꼬박꼬박 챙겨먹어야 한다. 아~ 쓰다. 언제쯤 약을 안 먹는 날이 올런지.
▲ 오전 11시=훈련
교회 다녀 오느라 조금 늦었다. 코치와 부지런한 선수들은 일찌감치 나와 있다. 사복에서 야구복으로 갈아입으면 `팀`이라는 조직의 수장이 된다. 나의 지시 하나에, 작전 하나에 팀의 운명이 결정되고 책임을 져야 한다. 권한이 나에게 모두 있는 만큼 혼자만의 고뇌가 뒤따르는 것이 감독이다.
선수들의 몸놀림을 체크한다. 신인 외야수 연경흠의 타격이 괜찮아 보인다. 어제 첫 경기부터 방망이를 자신있게 돌리고 있다. 김인철은 지난 해 타격폼이 괜찮았는데 WBC를 갔다와서 보니 타격폼이 이상해져 있다. 왜 바꾸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타자들이 전체적으로 부진해 걱정이다.
▲ 미팅
3연전의 첫 경기 때는 전력분석팀에서 작성한 상대팀의 투수.타자들의 보고서를 본다. 전력분석팀이 작성한 상대팀 정보는 투수코치.타격코치 등이 담당별로 선수들에게 간단한 미팅을 한다. 타격 코치가 상대 선발을 분석하고 투수 코치가 투수진들의 컨디션을 체크하면서 훈련을 시킨다.
나는 가끔 큰 요점이나 전력분석 보고서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점을 이야기한다. 상대 투수의 주무기가 무엇인지, 볼배합은 어떤 지를 주지시킨다. 때때로 1사 만루에서는 병살타를 유도하는 몸쪽 볼을 아예 포기하라든가, 몸쪽 공의 스트라이크.볼에 대한 대응 등을 지시하기도 한다. 가끔씩 얘기해줘야 선수들이 실전에서 받아들인다. 반복 학습이다.
▲ 오전 11시 반=기자
덕아웃에 앉아서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으면 기자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다. 다들 어제 개막전 후 폭탄주 한 잔을 했는지 오늘은 조금 늦는다. 뇌경색 이후 술을 멀리하면서 함께 하지 못해 아쉽다. 예전에는 같이 술도 많이 마셨는데 그 때가 그리울 때도 가끔 있다. 후후. 젊은 친구들이 한창 때라 많이들 마시겠지만 적당히 몸 관리도 하라고 한마디 한다.
어제 경기 상황을 묻고 구대성 조성민 등의 컨디션을 또 묻는다. 매일매일 보면서도 궁금한 것이 많은지 질문은 쏟아진다. 그래도 감독 생활에서 경기 전 기자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고 하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 오후 1시=라인업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에 심판에게 그날 경기의 선발 라인업을 제출한다. 수석 코치나 타격 코치로부터 선수들의 몸 상태를 보고 받는다. 타자들은 모두 몸 상태가 괜찮다고 한다. 어제 타순 그대로 오늘도 적으라고 했다. 어제 이긴데다 대체할 선수들도 없다. 상대 선발이 우완이니까 어제 타순 그대로 좌타자들을 위로 올려야겠다.
▲ 오후 1시 반=마사지
뇌경색 이후 굳어진 몸을 회복하기 위해 경기 전이나 경기 후에 하루 한 차례 조대현 트레이너로부터 마사지를 받는다. 하루 일과 중 빼놓을 수 없는 행사다. 조 트레이너는 지난 해부터 매일같이 지극정성이라 너무 고맙다. 하와이 전훈 때는 따뜻한 날씨에 제자리뛰기도 했는데 WBC를 갔다오면서 조금 더 안 좋아졌다. 날씨가 추운데다 운동을 제대로 못해서 그런가보다. 마사지 받고 운동장 외야를 산책하기도 한다. 걷는 것이 최고다. 예전에는 건강에 신경을 별로 안 썼는데 쓰러지고 난 다음에는 의사의 권유로 꼬박꼬박 산책을 한다.
▲ 오후 2시=시작
특별한 주문은 없다. 그저 자신있게 플레이하라고 할뿐. 경기 중간 중간 공격에서 원 포인트 레슨을 하기도 한다. 계속해서 부진에 빠지거나 어처구니 없이 삼진을 당하고 들어올 때는 그냥 넘어가기 힘들 때도 있다. 덕아웃 앞에서 타자들에게 한 마디 하는 것을 TV 카메라에 잡히는 것을 본 적이 있으리라. 그러나 시즌 초반에는 별 얘기를 안 하는 편이다. 다 알아서 하라고 맡긴다. 내가 얘기를 안 하더라도 담당 코치들이 다 지적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 오후 5시=종료
오늘도 이겼다. 2연전을 모두 이겨 기쁘다. 시범 경기 때 타자들의 방망이가 안 맞아 걱정했는데 투수들이 잘 막아줬다. 기자들이 역시 우승 후보라고 추켜세운다. 단 두 경기 했을 뿐인데 무슨 소리냐고 한 마디 했다. 앞일은 모른다. 오늘 이겼지만 내일 지는 것이 야구다. 특히 우리 선발진은 다들 나이가 많아 조심조심 보살펴야 한다. 구단 직원이 타 구장 경기 결과를 알려준다. 흠, 개막부터 다들 치열한 접전이구나.
▲ 9일 경기 후=고마운 팬들
경기 내용은 만족할 수 없지만 선수들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홈 팬들에게 2연승의 좋은 선물을 해 줘 고맙다. 오후 7시 반쯤 운동장을 나오는 데 아직도 수십명의 팬들이 늘어서 있다. 그런데 선수가 아닌 내 사인을 받고 싶다고 한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 9일 저녁=생일축하
오늘도 저녁은 문화식당이다. 아들 내외와 손자 범수(5)가 서울에서 일부러 생일축하한다고 내려왔지만 제대로 생일축하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범수는 보자마자 "할아버지 오늘 이겼어"라고 묻는다. 그래 이겼다. 10일이 내 생일인데 미리 축하해 주러 온 것. 범수가 할아버지 선물이라고 큰 액자를 들고 왔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범수의 사진이 담겨 있다. 시간이 없어 선물만 전달하고 서울로 가 조금 아쉽지만 볼 때마다 기특한 녀석이다. 감독 생활 몇 년 후에는 저 녀석도 훌쩍 크겠지. 아쉽지만 오늘도 늦은 저녁은 유지훤 수석코치.우경하 타격코치 등과 함께 했다. 대전 구장 바로 옆인 문화식당은 지난 해부터 자연스레 단골이 됐다. 인심도 푸짐하고 입맛에도 맞다. 요즘은 수저랑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도 아예 여기다 가져다 놨다. 이겼다고 아줌마가 푸짐하게 해오는데 이긴 후에 먹는 밥은 꿀맛이다.
▲ 오후 9시=늦은 귀가
팀이 지더라도 그날 잘 친 타자나 잘 던진 투수는 고민하지 않겠지만 감독은 매 경기가 스트레스다. 참, 아쉬운 역전패가 많았던 쌍방울 시절 일화를 적어본다. 야간 경기 후 12시쯤 집에 들어가 소파에서 그날 경기를 되짚어봤다. 씻기 전에 잠시 생각해본다는 것이 그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계 바늘은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경기에서 이렇게 했다면, 저렇게 했다면 하는 생각에 시간은 하염없이 흐른 것이다. 덧붙인다면 비 오는 날 경기에 지고 들어오면 제일 처량하다.
▲ 오후 11시=취침
씻고 가끔 TV를 보면서 경기 결과를 잊기도 한다. 하지만 집에서도 야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꾸 경기 장면이 떠오르고 다른 팀 결과도 신경쓰게 된다.
내일은 오전 훈련 후 서울로 이동한다. 시범 경기 1위팀인 LG와의 원정 경기다. LG가 개막 후 주축 투수들이 부상으로 빠지고 비상체제라고 한다. 이순철 감독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겠군. 남의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쨌든 내일은 내일의 해가 다시 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