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여왕` 5월도 어느덧 중반이다. 지난 주말(6일)이 여름으로 들어선다는 입하였으니 이젠 새로운 계절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할 참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먼저 계절의 변화를 읽는 혜안을 가진 이가 바로 식물이다. 화려한 꽃송이로 봄을 알리더니 이젠 앙징맞은 잎사귀를 내놓았다. 때마침 신록이 아름다운 웅진 백제의 고도 충남 공주를 찾았다.
계룡산 동학사와 웅진성이 있었다는 공산성은 명성 그대로였다. 아득한 옛날 첫삽을 떴을 때에도 이런 모습이었으려니 하는 생각을 품으니 5월이면 변함없이 찾아오는 신록은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된 양 아득한 옛날로 안내하는 듯했다.
■계곡물에도 물든 신록의 소나타
“봄 동학사 가을 갑사”라는 말이 있다. 물론 마곡사의 봄도 빼어나지만 계룡산 동학사의 그것도 못지않다. 이로 인해 동학사의 이맘때 풍경은 ‘계룡 8경’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동학계곡 신록의 감상 포인트는 일주문을 지나야 만날 수 있습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계룡산 동학사 매표소 직원의 설명이다. 실제 일주문을 지나니 앞을 완전히 가로막을 듯 울창한 수림이 펼쳐졌고. 그 사이로 동굴처럼 길이 보였다. 길 옆에는 자연성능. 쌀개봉 능선. 장군봉 능선. 황적봉 능선 등 계룡산을 대표하는 능선에서 흘러내리는 동학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숲은 성긴 잎 사이로 하늘이 보였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완전한 ‘잎새터널’을 이룰 것처럼 울창했다.
사찰까지 이르는 약 2㎞의 길을 따라 다양한 종류의 잎새가 신록을 뽐내고 있는데 얼마나 싱그러운지 느티나무·신갈나무·소나무 등 일부밖에 알아보지 못하는 짧은 지식도 솟아나는 앤돌핀을 막지 못했다.
이양하는 자신의 수필 <신록예찬> 에서 “이즈음 신록은 우리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고 역설했다. 실제 신록이라는 ‘젊은 피’로 온몸을 닦아 내니 모든 욕망과 굴욕. 고통과 곤란이 모두 사라지고 그 빈 자리에는 별·바람·하늘·풀이 기쁨과 노래를 갖고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동학사에서는 계룡산 신록의 장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동학사는 비구니 스님들의 전통 강원이다. 학인 스님들이 수행자로서 거듭나기 위해 4년 동안 몸과 마음을 닦는 승가대학이다. 1860년 이후 150명의 스님을 배출했다고 한다.
때마침 방학이어서 동학사 주지 요령스님이 평소 닫혀 있던 산문의 문을 열었다. 그 가운데 졸업반 학승들이 공부하는. 절 맨 뒤편 가장 높은 곳 실상료로 안내했다. “잘 봐 둬. 여기서는 계룡산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어.”
과연! 이런 곳이 존재하다니. 왼쪽 문필봉(796m)으로 시작해 관음봉(765m). 자연성능. 삼불봉(775m). 그리고 그 뒤 최고봉 천왕봉(845m)이 연한 초록옷을 입은 채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아마 녹음이 짙은 여름이었다면 이런 감동은 덜했을 듯싶었다.
■무령대왕을 만나다
공주 공산성은 1500여년 전 쌓은 성이다. 백제의 최고 융성기로 꼽히는 무령대왕 시절에 이 성은 백제의 수도였다. 곳곳에 당시 흔적이 남아 있다. 금강변 해발 110m 능선에 쌓은 공산성은 동서 약 800m. 남북 약 400m. 둘레는 2660m가량 된다. 강 건너에서 보면 성 전체가 담록(淡綠)을 띠고 있어 아무리 보고 있어도 눈이 피로하지 않다.
공산성 관람은 금서루에서 출발한다. 금서루를 지나 오른쪽 언덕을 오르는 길은 ‘무령왕이 걸었던 길’로 불린다. 지금은 말끔하게 포장돼 있지만 1500년 전 무령왕이 오가며 정사를 돌봤던 현장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그 길을 따라 오르니 넓은 잔디밭이 나온다. 백제 왕궁 추정 터이다. 한쪽에는 돌로 정교하게 지은 연못터도 있다. 이곳에 왕궁이 있었음이 분명하다고는 하나 정확한 자료가 없어 추정 터로 부를 뿐이다.
공산성은 가볍게 눈도장만 찍어도 한 시간은 족히 필요하다. 성곽을 따라 걸어도 좋고. 이곳저곳 기웃거려도 상관없다. 곳곳에는 한층 물이 오른 민들레가 홑씨를 흩날리고 있고.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푸른 잎으로 따가운 햇살을 가리면서 살랑살랑 땀을 식혀 준다.
웅진 백제는 한성 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의 침공으로 죽게 되자 475년 문주왕이 남하해 도읍을 웅진으로 정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삼근왕→동성왕→무령왕에 이어 성왕이 538년 사비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64년 동안 웅진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였다. 이 시기가 웅진 백제이다.
그 도읍지가 지금의 공산성 자리다. 당시 웅진성이란 이름의 토성이었으며 그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고려 때 공산성으로 바뀌었다. 조선 인조 후에는 쌍수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백제 왕궁 추정 터에서 북쪽으로 보면 쌍수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그 자리에는 원래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피신해 있을 당시 이 나무 너머 북쪽 한양을 바라보며 ‘난리가 하루빨리 끝나야 할 텐데’라며 시름에 잠겨 있을 무렵 난이 평정됐다는 낭보를 들었다. 왕은 너무 기쁜 나머지 그 두 그루의 나무에 벼슬을 내렸고. 그때부터 쌍수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조선시대 벼슬을 받은 나무는 이 두 그루와 속리산 정이품송 등이 있을 뿐이다. 두 그루의 나무가 수명을 다하고 죽자 그 자리에 정자를 세워 그 뜻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