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명대학교에서 ‘등산의 이론과 실제’라는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산악인 엄홍길씨가 수업 중에 강조하는 말이다. 올해 처음으로 개설된 이 과목은 30명 정원 3개 반이 수강 신청 5분 만에 모두 마감되는 인기를 누렸다.
평상시 산을 자주 찾는다는 경제학과 3학년 홍기호군은 엄 교수를 찾아가 정원 외로 들어가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론 교육 때 들었던 히말라야 원정 경험담은 재미도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며 지금까지의 수업에 만족해 한다.
이론 수업과 함께 야외 수업도 병행하는데 한 학기에 두 번 도봉산과 북한산을 오른다. 기자가 직접 도봉산 산행 수업을 참관했다. 엄씨가 3세 때부터 40세까지 살았던 집터와 중 2때 암벽 등반을 배웠던 두꺼비 바위 등을 소개할 때 그의 눈빛은 산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했다.
섬유공예과 4학년인 김정현양과 최문주양은 “오르는 게 너무 힘들었지만 정상에 서니 기분이 너무 좋아요. 남자 친구가 생기면 꼭 함께 산에 오르고 싶어요”라며 어느새 산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엄 교수의 산에 대한 사랑이 자신을 키운 도봉산을 통해 제자들에게 오롯이 전달된 듯싶다. 산행 수업에 참가했던 학생의 산행기를 담아 본다.
●친구. 잠깐만 쉬었다 가게나(산악인 엄홍길씨와 함께 한 원도봉산 등반기)
참 바쁜 세상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달리고 있고 나도 그들 속에 있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좀 더 앞서 나가기 위해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지만 이러한 일상이 때론 공허감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가을 바람 시원한 9월의 어느 날.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원도봉산이라는 친구가 나를 초대했다. 든든한 가이드되시는 엄홍길 교수님과 함께 말이다.
산에 들어서자마자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상쾌한 기운이 나를 반긴다. 자연의 기운 덕분이었을까? 뭔지 모를 에너지에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발걸음이 힘에 넘친다.
우리의 산행 코스는 대략 망월사를 경유하여 산의 능선을 타고 가는 것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소풍 가듯 얼마간 갔을까. 우리는 교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던 곳에 서게 되었다. 세계 최고의 산악인을 품에 안고 키운 도봉산. 그 옛날 이곳에서 뛰놀았던 귀여운 소년이 눈에 보이는 듯하여 도봉산이 더욱 친근하고 정답게 느껴졌다.
더욱 발걸음을 재촉하여 위를 향하니 이제는 제법 숨도 가빠오고 쉬는 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이렇게 조금씩 지쳐갈 무렵. 교수님께서는 그동안 당신이 살아오시면서 힘들어 포기하고 싶었을 때 일어설 수 있게 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길 수가 없어.” 이미 어딘가에서 들었을 듯한 그 말씀이 이렇게 감동적으로 들리는 것은 그분이 생생하게 겪으신 삶. 그 자체이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드디어 온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정상에 도착했다. 내 발 아래 펼쳐진 세상이 모두 내 것인 것만 같았다. 이곳도 이렇게 좋은데 모진 역경 다 이겨내고 10배가 넘는 높이의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을 때. 교수님의 마음은 오죽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려가는 길. 힘든 코스는 끝이 났고 내려가는 것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교수님께서는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언젠가 교수님께서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한 한 동료 분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해 주신 적이 있다. 8000여m의 정상을 정복한 그분은 너무나 기쁘고 흥분된 마음에 눈을 보호하기 위해 쓰고 있던 고글을 벗고 환희를 즐기다 결국 돌아오는 길에 설매로 시력을 잃어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 우리 모두의 목표이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자신의 성공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돌아가는 길 역시 안전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려가는 것. 이것 또한 우리 삶의 소중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바쁜 일상에 지쳐 있던 내게 산은 언제든 와서 쉬었다 가도 좋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를 품에 안은 산은 쉼과 더불어 우리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다. 엄홍길 교수님의 첫사랑. 원도봉산의 매력에 푹 빠진 행복한 하루였다. 상명대학교 소비자주거학과 2년 김경복. 국제통상학과 4년 윤지영
●“넌 주저앉을 놈이 아니야” 독려
■엄홍길이 말하는 원도봉산
원도봉산에 오르면 언제나 푸근하고 따뜻합니다. 또 항상 제 자신을 공손하고 겸허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렸을 적에는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놀이터였죠. 세 살때 이쪽으로 이사와 부모님이 매점을 운영하셨거든요.
산속의 바위와 나무는 저에게 장난감이었죠. 산속에서 살았던 셈이죠. 그러다 보니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산사람’들이었어요. 중2 때는 두꺼비 바위에서 암벽타기를 배우기 시작했죠. 산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한 셈이죠.
1998년 안나푸르나 원정 중에 발목을 다쳤을 때는 정말 자포자기였습니다. 쇠못을 네 개나 박는 수술을 받고 나서 의사는 더 이상 산에 오를수 없다고 하고 …. 그때 원도봉산이 저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넌 주저앉을 놈이 아니다. 지금 너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야. 일어서야지. 넌 해낼 수 있어.”
정말 큰 힘을 얻었습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희망의 봉우리로 저를 끌어올렸죠. 이때부터 네 살짜리 딸을 캐리어에 들쳐 업고 원도봉산을 오르기 시작했죠. 힘이 들면 딸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오르기도 하고요. 10개월의 재활 기간 가족과 사랑도 키우고 희망도 키우고. 모두 원도봉산 덕분입니다.
지금은 도시 생활에 지쳐 있거나 고민거리가 생기면 원도봉산을 찾습니다. 산속을 걷다 보면 해답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르더군요. 또 남을 배려하지 못했는지. 겸손함을 잃었는지 돌이켜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저에게 있어 원도봉산은 평생의 어머니이자 스승인 것이죠.
■엄홍길 배낭 속엔 특별한 게 있을까
아시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고봉 14좌 완등에 성공한 산악인의 배낭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했다. ‘무슨 특별한 것이라도 있을까?’ 살짝 엿보는 마음으로 배낭을 들쳐 보았다. 1.5ℓ 생수 한 통. 방석 매트리스. 기능성 반팔 티셔츠. 보온을 위한 파일 자켓. 윈드 자켓이 들어 있었다.
1.5ℓ나 되는 생수는 실제로는 물이 다 떨어진 학생들을 위한 배려 때문이다. 반팔 티셔츠는 땀을 많이 흘리는 탓에 갈아입을 옷으로 넣어 둔다고 한다. 먹을 것으로는 김밥 한 줄과 오이. 그리고 산에 오르다 사과를 한바구니 사서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