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낭만파 마지막 주먹 낙화유수 김태련씨 별세
'인생은 낙화유수(落花流水)떨어지는 꽃, 흐르는 물과 같은 것. 세월의 흐름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우리 시대 '마지막 야인(野人)' 낙화유수 김태련씨가 2일 오후 1시 지병으로 서울 중구 을지로 국립의료원에서 작고했다. 향년 75세. 사망 원인은 뇌출혈이다.
김씨는 3년 전 인기 TV 드라마 <야인시대> 에서 '동대문파' 이정재의 부하로 유지광과 함께 핵심 참모로 등장했던 실존인물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씨도 세월의 흐름 앞에는 어쩔 수 없었다.
김씨가 사망함에 따라 종로파 김두한, 동대문 사단의 이정재 그리고 명동 사단의 이화룡 등 50~60년대 낭만파 주먹이 모두 사라지게 됐다. 낭만파 주먹은 지금의 조폭들처럼 사시미와 쇠 파이프 등 무기를 갖고 조직적인 결투를 벌인 것이 아니라 김두한·시라소니 처럼 일 대 일로 대결하고, 결과에 승복하는 사나이의 미덕을 지켰던 자들을 일컫는다.
현재 생존해 있는 '왕년의 주먹' 가운데 지존인 김씨는 50년대 최고의 협객이었던 이정재의 사돈이자 후계자인 유지광 계보의 좌장으로 50~60년대 주먹계를 풍미한 인물이다.
175㎝의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학구파 '노신사'처럼 비치지만 과거의 낙화유수는 그렇지 않았다. 한창 때 체중은 100㎏이었다. 그는 '원펀치'로 통했다. 체중이 실린 주먹 한방을 맞고 쓰러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도와 태권도 각각 2단이다.
낙화유수란 늘 유유낙락하게 산다고 해서 서울대 상대(52학번) 시절 여학생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것이 별칭으로 굳어지면서 실명보다 낙화유수란 별칭으로 더 유명했다.
그는 1951년 부산 피난 시절 단국대 출신 장윤호를 만나면서 주먹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62년 이정재가 군사혁명 정권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유지광마저 정치깡패 혐의로 구속돼 힘을 상실했을 때 '동대문사단'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5·16 직후 재판장에 서기도 했다. 당시 재판관들은 대부분 서울대 출신들이었다. 대학 시절 그와 친했던 당시 혁명재판부 양준모 판사가 재판장에 선 그를 보고 "김태련, 아니 자네가 외교관이 된 줄 알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서 있느냐"며 기가 막혀 했는 일화도 있다.
그는 재판정에서도 당당했다. 서울대 출신이면서 주먹을 쓸 수밖에 없었던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우리는 절대 깡패가 아니다. 협객이다. 법을 어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시절이었다. 그래도 약한 사람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았어.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을 향해 주먹을 날렸지."
그가 석방되자 군사정부는 전라북도 군산시장과 전국구 국회의원까지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다. 쿠데타 정권을 도우며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이 협객의 길과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걸어온 길이 사람에 따라 비난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협객의 길을 걸어왔음을 자부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태어나도 협객의 길을 걷겠다"고 덧붙였다.
5년전부터 당뇨 증세가 있어 100kg의 몸무게가 60kg으로까지 줄었든 그는 일주일에 두번씩 투석을 하고 틈 나는 대로 양로원을 돌면서 불우한 노인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았다.
조병용씨는 "큰 형님은 자식들에게는 한푼의 유산도 남기지 않고 여생을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데 바치기 위해 서울 마포구 상수동 자택을 비롯한 전 재산을 사회복지센터 건립기금으로 내놓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씨의 장례는 천일동우회(구 화랑동지회) 주관으로 치른다. 유족은 부인 이부자씨와 1남2녀. 발인 4일 오전 9시 장지 경기도 장흥 선영.
정병철 기자 [jbc@ilgan.co.kr]야인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