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이 지난 4일 한국도로공사를 꺾고 정규시즌 2연패에 성공하자 황현주(41) 감독은 한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명예회복'의 순간이었지만 감전된 것처럼 온몸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멋진 말을 준비했는데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되더군요. 그냥 선수들에게 고맙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죠."
1991년 창단 이후 하위권을 전전하던 흥국생명은 이번 정규시즌 2연패로 명문구단으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황현주 감독의 배구 인생도 흥국생명의 행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챔피언결정전을 위해 또 다시 맹훈에 들어간 황 감독을 8일 훈련장에서 만났다.
▲나는 비주류 배구인
황 감독이 배구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조금 색다르다. 경남 하동 악양초에서 배구공을 처음 잡은 황 감독은 5학년 때 진주 상대초로 전학을 가면서 본격적인 선수의 길로 접어 들었다. 당시 상대초에는 배구부가 없었는데 담임이었던 윤봉수 선생님이 생활기록부에 적힌 특기란을 보곤 이웃 학교인 배영초에 황 감독을 소개했다. 때문에 상대초 학생이면서도 배영초 유니폼을 입고 대회에 출전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동명고 2년 때 첫 고비를 맞았다. "고1 이후로 키가 자라지 않는 겁니다. 한수 아래였던 학교에 밥먹듯 지고 나니 배구를 할 맛이 나지 않더라고요." 돌파구는 독기 어린 연습이었다. "밤 12시는 기본이고 새벽 운동까지 하고 등교를 했습니다. 덕분에 고3 때는 다시 톱글래스가 됐죠." 황 감독은 "몸 속에 내제돼 있는 거친 승부욕은 이때 길러진 것"이라고 했다.
비교적 '화려한' 선수 생활은 여기까지. 1985년 동명고를 졸업하고 서울시청을 거쳐 금성사(LIG 전신)에서 92년까지 현역으로 뛴 황 감독은 그의 말마따나 철저한 "비주류"였다.
서울시청에 입단하자마자 팀 22연패를 끊었고, 금성사에서도 간간히 주전 세터로 활약했지만 리그 우승은 꿈에 불과했다. 태극마크 역시 황 감독에게는 사치였다. 그는 "우승이요? 89년 슈퍼리그 결승에 오른 게 전부"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굴곡 많은 지도자 길, 그러나 행복하다
1992년 시즌 후 군입대(일반병)로 은퇴하다시피한 황 감독은 94년 제대 후 보험 영업사원으로 잠시 '외도'를 한 적이 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3개월 만에 때려치웠다. 그리고 대신고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지도자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LG정유를 떠날 때는 구단의 처우에 실망을 했고, LG화재에서 그만 둘 때는 일반직으로 새출발할 생각도 했다.
흥국생명에서 지휘봉을 잡은 3년째인 지난 해 2월 선두를 달리고 있는 와중에 '자진 사퇴'하는 비운을 맛보기까지 했다. '젊은 감독'을 믿지 못하는 구단이 92연승의 승부사 김철용 감독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수석코치로 강등시키자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한두 달은 하루 24시간 가운데 20시간은 술로 보냈다."
이후 여자 국가대표팀 코치로 도하 아시안게임 등에 출전한 황 감독은 지난해 12월 도하 현지에서 구단으로부터 '다시 팀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12월11일 10개월만에 제자리에 복귀했다. 1위팀 감독이 경질되고 다시 복귀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셈이다.
선수 시절 못지않게 굴곡 많은 지도자 길을 걸어온 황 감독이지만 "돌이켜보면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라고 했다. "햇수로 따지면 13년을 한 셈인데, 어느 해이고 완전히 쉰 적은 없었다. 그만 두고 나오더라고 마치 계산된 것처럼 또 다시 코트에서 선수들과 땀을 흘리고 있었다. 선배들이 잘 봐준 덕분이다."
▲아, 어머니
황 감독의 배구인생에서 가장 큰 버팀목은 돌아가신 어머니 정금자 씨다.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제법 먹고 살만했던 집안은 황 감독이 초등학교 6년 때 아버지가 장기간 병원신세를 지면서 어려워졌다.
이 때부터 어머니 정 씨가 집 안팎의 살림을 도맡아 하며 4형제를 키웠다. "어머니께서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다. 심지어 남자들이 하는 건설 현장의 막일까지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아무리 힘든 훈련이 있더라도 밖에서 고생하시는 어머니만 떠올리면 쉽게 넘길 수 있었다."
지금 정금자 씨는 세상에 없다. 황 감독이 실업 2년차인 1986년 저혈압으로 쓰러졌다. 당시 나이 47세. 황 감독은 아직도 어머니 생각만 떠올리면 두 눈은 금새 붉어진다. "고생만 하시다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겨우 내가 돈벌이를 시작해 편히 모시려고 했는데…."
어머니를 통해 피와 땀의 소중함을 배웠기에 황 감독은 스스로를 끊이없이 채찍질한다. 리그 우승에 대해 황연주·김연경 등 좋은 선수를 만난 운으로 돌리는 견해도 있지만 황 감독은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주류
황 감독이 '우승 감독'이란 칭호를 얻기 위해선 챔피언 결정전이라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 챔프전보다 정규시즌 우승이 더 값지다는 평가도 있지만 그는 내침김에 둘 다 욕심을 내고 싶어 한다. 지난 시즌 중도 사퇴라는 아픈 과거가 있기에 입술은 더욱 탄다.
황 감독은 정규시즌 우승을 결정지은 뒤 곧바로 선수들을 훈련장에 불러 들였다. "공을 피하지 말라"는 주문과 함께 선수들의 머리를 향해 볼을 때리면서 다그치고 있다.
황 감독은 "모든 축하는 챔피언 결정전 뒤로 미루겠다. 챔프전을 대비하는 훈련에서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선수들에게 더 모질게 대하고 있다"고 스스럼 없이 밝혔다.
'비주류'의 설움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 흥국생명이 통합 챔프 2연패에 오르는 순간 황 감독과 흥국생명은 '주류'로 자리잡을 것이다.
정회훈 기자 [hoony@ilgan.co.kr]
▲황현주 감독 프로필
-생년원일=1966년 4월20일 -가족관계=부인과 1남1녀 -출신교=진주 상대초-진주 동명중·고-서울 시립대 -배구 입문=하동 악양초 3년 -선수 경력=1985년~86년 서울시청 1987년~1992년 LG화재 -지도자 경력=1994 대신고 코치 1995~1998년 LG정유(여자팀) 코치 1998년 한일전산여고 감독 1999~2001년 LG화재(남자팀) 코치 2002~2003 흥국생명 코치 2003~2006년 2월 흥국생명 감독 2006년5~12월 도하 AG 등 여자국가대표 코치 2006년 12월~현재 흥국생명 감독 -우승 경력=힐스테이트 2006~2007 V리그 정규리그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