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골프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된 박세리(30·CJ)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국스포츠사에 길이 남을 영웅 중에 한명이다.
그러나 그 골프영웅이 '골프신동'에서 '골프여왕', 그리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까지는 숱한 고난과 좌절이 함께 했다.
1977년 8월 대전 유성에서 태어난 박세리는 유성초등학교 때 골프광이던 아버지 박준철씨(57)의 손에 이끌려 골프채를 쥐었고 바로 두각을 나타냈다.
투포환 선수로 활약했던 덕인지 박세리는 또래들에 비해 힘이 월등하게 앞섰지만 특히 승부근성에서 프로들도 두려워 할 만큼 강인했다.
골프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싱글 핸디캐퍼가 됐다는 아버지 박씨가 당시 박세리에게 아무리 높은 건물도 계단으로만 오르내리도록 했다거나 근성을 키우기 위해 한 밤 중에 '공동묘지'를 혼자서 다녀오도록 혹독한 정신력 훈련을 시킨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박세리는 15세이던 지난 1992년 라일&스코트여자오픈에서 1990년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원재숙을 연장전에서 꺾고 우승을 차지해 '골프신동' 탄생을 알렸다. 1995년에는 8개 밖에 없었던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대회 가운데 3승이 아마추어인 그의 몫이었다.
프로 무대에 뛰어든 1996년 4승을 올린 박세리는 2승을 보탠 1997년 한국 땅을 벗어나 세계 무대로 눈길을 돌렸다. 삼성전자라는 든든한 후원을 업고 LPGA투어 퀄리파잉스쿨에 응시, 수석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그렇지만 세간의 평가는 냉혹했다. 박세리가 "LPGA투어에서 우승하려면 10년은 걸릴 것"이라는 평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박세리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LPGA투어에 데뷔한 지 일골 달 밖에 지나지 않아 1998년 시즌 두번째 메이저대회 맥도널드LPGA챔피언십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이어진 시즌 세 번째 메이저대회 US여자오픈마저 우승하자 세계 언론들은 "한국이 수출한 최고의 상품(?)"이라는 찬사를 쏟아냈다. '여자 타이거 우즈'라는 별칭도 얻었다.
무엇보다 US여자오픈 당시 닷새 동안 93홀에 걸친 혈투를 벌인 박세리가 보인 '맨발 투혼'은 IMF 사태의 그늘에서 신음하던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일대 사건이었고 박세리는 어느덧 '국민스타', '골프여왕', '골프영웅'로 발돋움했다.
이후 두 차례 우승을 추가한 박세리는 신인왕이 됐고 이듬해 4승을 올리며 LPGA투어 최강자로 군림했다.
2000년을 무관으로 보내 잠시 주춤했던 박세리는 2001년 메이저대회인 브리티시여자오픈을 포함해 5차례나 우승컵을 들어올려 골프여왕의 자리를 넘봤고 2002년에도 메이저대회인 맥도널드 LPGA챔피언십을 비롯해 5승을 수확했다.
박세리가 승전보를 전해올 때마다 온 국민은 환호했고 '사치성 오락'이던 골프는 '국민 스포츠'로 사랑받기 시작했다.
이어 그는 LPGA투어 진출 7시즌 만인 2004년 시즌 초반 5개 대회에서 세 차례 '톱10'에 이름을 올려 변함없는 기량을 선보이며 5월 초 미켈롭울트라오픈에서 우승, '명예의 전당' 헌액 포인트 27점을 모두 채우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제 남은 마지막 관문은 'LPGA투어에서 10시즌을 활동해야 한다'는 단 한 가지 조건만을 남겨 놓았다.
하지만 목표를 너무 일찍 달성한 탓에 밀려온 허탈감 때문일까. 박세리는 끝없는 추락의 길로 떨어졌다.
쳤다 하면 70대 후반 타수였고 80대 타수를 치는 일도 잦아 '주말골퍼 수준'이라는 비아냥까지 감수해야 했다. 박세리는 이 '주말골퍼 수준'이라는 혹평을 죽기보다 더 싫어했다.
2005년에는 12개 대회에서 세 차례나 컷 오프됐고 하위권을 전전하다 '시즌 중도 포기'라는 극약처방까지 선택해야 하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다. 그러나 포기하지도, 주저 앉지도 않았다. 지난해 6월 자신의 LPGA투어 생애 첫승을 거머쥐었던 맥도널드LPGA챔피언십을 제패하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우리의 '골프영웅' 박세리는 바로 그 대회와 장소에서 8일 지난 10년간 회한의 눈물을 뿌리며 한국인 첫 '명예의 전당' 헌액의 선포를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