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주파수를 맞추는 일은 두근거리며 연인의 마음을 찾아가는 길을 닮았다.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주파수를 맞춰 듣던 아날로그식 라디오 수신기. 비록 버튼 조작 한 번으로 원하는 채널을 찾아내는 편리함은 없지만 약간의 소음만큼 인간적인 맛이 있던 그 시절 라디오가 ‘빈티지 라디오’로 돌아왔다.
지난 10월 KBS 라디오 2FM(수도권 89.1Mhz)의 청취자 게시판은 ‘빈티지 라디오’ 이야기로 달아올랐다. KBS 라디오 2FM이 가을 개편을 맞이해 총 891명에게 빈티지 라디오를 상품으로 주는 이벤트를 실시하자 청취자들의 참여가 쇄도한 것이다.
KBS 2FM의 인기 프로그램인 ‘메이비의 볼륨을 높여요(매일 오후 8시~10시·이하 볼륨)’에는 이벤트 기간 동안 하루 평균 1000∼2000건에 가까운 문자와 참여 사연이 도착해 빈티지 라디오를 받으려는 사람들의 경쟁률이 무려 100:1을 기록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MP3플레이어나 DMB 수신기, 혹은 인터넷 라디오 수신기로 편리하게 라디오를 듣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다.
상품으로 빈티지 라디오를 받은 청취자들은 라디오 마니아들의 웹사이트인 디씨인사이드 라디오갤러리에서 저마다 자신이 받은 빈티지 라디오를 자랑하며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사람들은 왜 불편한 빈티지 라디오에 이토록 애착을 보였을까?
볼륨의 윤선원 PD는 그 이유를 ‘아날로그의 따뜻함’에서 찾았다. 이벤트가 진행된 뒤 윤 PD는 “평소 인터넷 라디오로 듣던 것과는 ‘소리가 다르다’”는 청취자의 후기를 읽고 무릎을 쳤다.
사실 인터넷 라디오든 빈티지 라디오든 소리의 차이를 사람의 귀로 식별하기는 힘들다. 윤 PD는 “그럼에도 ‘아날로그의 향수’를 품은 마음 때문에 두 가지 소리가 다르게 들리는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윤 PD는 “요즘은 ‘실용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시대라고 생각한다”며 “하루의 1분 1초를 꼭 필요한 일에 쓰지 않으면 경쟁에 뒤처져버리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뭔가 비효율적인 수고를 들여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따뜻함을 느끼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비효율적인 시간과 공간을 할애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게 바로 아날로그의 매력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아날로그 방식이 늘 호응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청취자들의 사연을 전해주던 엽서는 이제 거의 찾기 힘든 것이 현실. 볼륨에서는 최근 DJ의 초상화를 엽서에 그려 보내는 이벤트를 했지만 청취자들로부터 “주위에 엽서를 파는 곳이 없다”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당연히 평소 문자로 받던 이벤트보다 참여도가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엽서는 사라졌을 망정, 종이 위에 또박또박 글씨를 쓰던 그 시절 정성은 그대로다. 예전 청취자들이 엽서를 꾸미는 정성을 보여줬다면, 요즘 청취자들은 보이는 라디오 화면을 UCC로 재가공하기도 하고, 여러 이미지를 포토샵으로 합성해 사연과 함께 보내오는 정성을 보인다. 방법은 달라졌을지언정 아날로그적인 따뜻함은 그대로 남은 것이다.
차곡차곡 시간의 덧게비가 앉은 것들이 그리워지는 12월,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다 보면 추억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구민정기자 [lychee@jes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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