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117승 투수이니까 박찬호(35)는 적어도 투수로서의 단수는 100단 급인 모양이다. “타자의 타격 자세가 변하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스퀴즈를 한다는 것을 파악했다”는 그의 말에서 순간적으로 ‘야구의 신(神)’이라 불리는 SK 김성근 감독이 떠올랐다.
LA 다저스는 8일 다저스타디움 홈구장에서 애리조나와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1위를 놓고 한판 힘 대결을 펼쳤다. 다저스는 선발인 신인 클레이튼 커쇼부터 8회 1사후 마무리 브록스톤을 조기 등판시키기까지 5명의 투수를 대거 투입했다. 박찬호는 2-3으로 뒤진 6회초 3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1사 3루의 결정적인 실점 위기를 불러들였다.
그런데 애리조나의 봅 멜빈 감독은 이어진 8번 크리스 스나이더 타석 때 볼카운트 1-2에서 마치 상대의 허를 찔러보겠다는 듯 스퀴즈 번트 작전을 구사했다. 이닝이 경기 종반도 아닌 6회임을 감안하면 쉽게 하기 어려운 모험인데 전날 패배로 0.5게임 차로 뒤져 선두를 내준 것은 물론 주말 LA 다저스와의 3연전 시리즈를 모두 내주는 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결국 스퀴즈 번트는 실패했고 타자가 번트를 대줄 것으로 믿고 홈으로 뛰어들다가 황급히 3루로 몸을 튼 3루주자 마크 레이놀즈는 횡사를 당했다.
경기 후 박찬호에게 당시 상황에 대해 물었다. 혹시 포수 러셀 마틴과 함께 미리 스퀴즈를 대비했는가를 질문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번트를 할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슬라이더를 던지려는 순간 타자의 자세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슬라이더를 더 바깥쪽으로 틀어버렸다. 아마도 타자가 그래서 번트를 제대로 못 댄 것 같다”고 밝혔다.
만일 이 위기에서 박찬호가 추가 실점했다면 2-4로 점수 차가 벌어졌고 5-3 최종 승리는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베테랑 박찬호의 노련함이 애리조나의 스퀴즈 번트 작전을 보기 좋게 무산시키고 팀의 역전승 발판을 만들었다.
박찬호는 3-3 동점이던 7회초 마운드에서 연습 투구를 하는 도중에 교체된 것에 대해 크게 기분 나빠 하지는 않았다. “투수 자리여서 대타가 나올 시점이었는데 왼쪽 타자 알렉스 로메로가 기용되니까 좌완 궈홍치로 바꾼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어제도 햄스트링이 생겼던 왼다리가 아파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특히 커브를 던지면 더 그랬다. 그래서 조 토리 감독이 교체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오늘 2이닝을 던지면 또 몇경기를 쉬어야 한다. 차라리 1이닝을 던지고 내일 또 대기하는 것이 왼다리에도 좋고 팀에도 보탬이 된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LA 다저스는 9일부터 LA에서 버스로 3시간 거리인 샌디에이고에서 원정 3연전에 돌입하는데 가까운 거리여서 통상적으로 당일 이동하는 관례를 깨고 이날 경기 후 샌디에이고로 떠났다. 박찬호는 “시즌 막판이어서 일찍 이동해 현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게임을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장윤호 특파원 [changy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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