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천상 코미디언이었다. 한국적 ‘원맨쇼의 달인’ 백남봉(70). 그는 지난 4월 늑막염 수술 중 왼쪽 폐 부근에 암종양이 발견, 10시간에 걸쳐 제거 수술을 받았다. 5월부터 꾸준히 항암 치료를 받고 있다. 이제는 주사도 끊고 많이 좋아져 무대에 서서 일도 한다. 대단한 건 아파도 웃는다는 것. 그리고 남을 웃긴다는 것.
지난 21일 KBS TV ‘가요무대’ 리허설 장. 무대에 선 그는 잠시 휴식 중에도 영화 ‘석양의 무법자’를 휘파람으로 불었다. 말발굽 소리와 “히이잉” 말 울음소리로 주변 사람을 즐겁게 했다. 그를 만나 무대 인생 42년 웃음재테크에 대해 들어봤다.
천의 얼굴 가진 한국적 웃음의 달인
그의 고향은 전국 팔도다. 특기도 팔도 사투리와 성대모사다. 전국 어디를 가나 구수한 팔도 사투리를 간이 맞게 버무려가며 거침없는 입담으로 가장 한국적 웃음을 선사한다. 뱃고동에서부터 기관총 소리, 탈곡기 소리까지, 전 소재를 본인이 연구 개발한 성대모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심형래·김병조·이홍렬·황기순·최양락 등이 그의 LP를 사서 연습해 개그맨이 되었다고 할 정도다.
그는 어렸을 때 전쟁과 피난을 경험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면서 가난과 싸워야만 했다. 고아원에 맡겨지기도 했고, 껌을 판 적도 있다. 잣대공장 사원·구두닦이·아이스케이크 장수·장돌뱅이 등 전국 팔도를 떠돌며 수십 가지의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한국적인 웃음을 제대로 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쓸데 없는 곳에 절대 돈 안 쓴다”. 몸에 밴 것은 알뜰한 생활이다.
지금 살고 있는 서울 구의동 명성여고 뒤 2층 양옥 자택은 38년 전에 구입했다. 그는 자신에 재테크에 대해 “집 한 채 있고, 노후에 우리 부부 먹고 살만하면 되지, 하나도 내세울 게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주위에서는 그가 ‘소문없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고 전했다. 고아원 생활을 해선지 노인과 청소년 등을 물질적으로나 웃음으로나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있다는 것.
최근 폐 종양을 잘라낸 그는 연예계 후배들에게 충고를 했다. “아파 보니 나이가 들수록 돈이 없으면 안 되더라. 과거 선배들은 화류계 등에서 탕진해 노후에 돈 한 푼 없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기운 있을 때, 인기 있을 때 보험 등 미래에 대비해라.”
자전거 전도사의 실족, 고마운 아내
무대에 서면 사람들의 배꼽을 잡게 하는 포복절도 코미디의 대명사이지만 15년 전부터 자전거 타기에 푹 빠져 지금은 ‘자전거 전도사’가 됐다. 하루 4갑씩 피던 골초였던 그는 1년을 두고 금연에 성공했다. 그런데 몸이 20㎏가 불면서 당뇨라는 최악의 적과 마주쳤다.
그때 “수치가 450이 나오는 등 당이 더글더글”했다. 당뇨 약을 먹으니 좋아졌지만 아내가 “자전거가 좋다”고 권했다. 하루에 80㎞씩 꾸준히 자전거를 타면서 당뇨를 싹 고쳤다. 서울 주변의 웬만한 산도 다 섭렵했다. 바다 너머 제주 일주까지 했다.
하지만 3년 전 용문산에서 자전거를 타다 사고를 당했다. 71㎞로 내려가다 커브에서 미끄러져 옆구리 갈비뼈가 부러졌다. 뼈는 다 나았는데 2년 후 옆구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병원에 갔더니 피가 갈비와 유착, 돌덩어리가 돼 있었다. 피 제거 수술 중 폐에 종양이 발견돼 왼쪽 폐를 잘라내야 했다. 9월에야 주사를 끊었지만 항암치료의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조금만 더 살게 해주세요. 대중 앞에서 50년만 더 설 수 있게 해주세요. 웃음 없는 각박한 세상에 내가 더 필요합니다”라고 기도했다. 기도가 통했는지 이제는 식사도 잘하고 조금씩 자전거도 탄다.
“아파도 주둥이 놀리는 사람이 돼서 입술 근질근질해 잠 못잘 때가 많았다”며 유머를 던졌지만 지극정성 간호한 “마누라의 소중함도 처음 알았다”고 고백했다. 자전거 사고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국민이 건강을 위해서 자전거를 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쪽 폐를 잘라냈지만 “한쪽만으로도 20~30대처럼 워낙 폐활량이 좋아 괜찮다”는 그는 무대에 올라 ‘불효자는 웁니다’를 연습했다.
“지휘관의 유머감각은 일개 사단병력과 맞먹는 파워를 가진다”라는 말이 있다. 백남봉은 KBS TV 장노년층 프로그램 ‘언제나 청춘’의 코너와 피겨스케이트 대표로 첫 메달을 딴 딸 박윤희씨와 함께 위성케이블 방송사인 실버TV ‘백남봉쇼’를 진행하기도 해 ‘노인들의 영원한 친구’로도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