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마문화
①특급 익스프레스 기발
②무력의 상징 기마대
③귀족들의 놀이 격구
④성공의 상징 말 그림
⑤우리식의 말타기
한민족의 기마 놀이인 마상격구(이하 격구)는 귀족들의 놀이였다. 현재 폴로가 국내에서 상위 0.001%를 위한 놀이인 것과 마찬가지다. 격구는 고려시대에 가장 많이 흥행했다. 한민족 역사상 고려시대는 유럽의 중세와 비교된다.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열었을 정도로 귀족들은 강했고 숫자도 많았다. 이들은 격구를 통해 자신들의 힘을 과시했고 기마 문화를 발전시켰다.
채준 기자 [doorian@joongang.co.kr]
▲격구의 유래 격구의 본류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한 ‘쇼간’이었다. 쇼간은 BC 6세기~AD 1세기에 페르시아에서 성행했다. 국왕 직속 기마대를 비롯한 정예 기마대의 훈련용 경기로 이용됐고 당시 쇼간은 페르시아의 국기로 귀족들 사이에서 널리 행해졌다. 야성적인 단체 승마경기는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티베트 중국을 거쳐 남북국시대(발해·통일신라시대) 전해져 격구라는 이름으로 한민족에 정착했다.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무(武)를 숭상했던 고려시대였다.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무관들이 무예를 연마하는 군사적 목적 외에 격렬한 마상놀이로 행해지기도 했다. 고려 말기에는 왕이 참관하는 대규모 격구대회가 벌어졌다. 특히 의종이 격구에 능숙했고 이후에는 격구가 국가적인 오락행사로 정착했다. 격구의 전통은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격구가 귀족들의 놀이였던 이유는 비용 때문이었다. 선수 한 사람당 한 경기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최소 3~4마리의 말이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말의 스피드가 중요했고 말끼리 몸싸움을 벌여야 하는 경기라 말의 체력소모도 많았다. 선수는 경기 중 계속 말을 갈아타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역사에 기록된 격구 격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한치운의 ‘해동역사’에 나타난다. 발해 사신 왕문구 일행이 889년 일본에 가서 격구를 했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사’에 격구가 나타난다. 태조 왕건 2년에 상주의 토착세력인 아자개가 고려에 투항할 때 환영식 연습을 격구장에서 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여전히 격구가 널리 성행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뛰어난 격구술을 자랑했으며 세종은 격구를 무예로서 중시하여 무과시험 과목으로 채택했다. 세종은 “격구를 잘 하는 사람이라야 말 타기 활쏘기를 잘 할 수 있으며 창과 검술도 능란하게 된다”고 말했을 정도다.
▲격구 경기방식 격구의 경기방식은 경기장 좌우편에 선수들이 줄 지어 선 가운데 한 사람이 들어가 공을 공중으로 쳐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고 4명의 선수가 한 팀이 된다. 승부는 일정한 시간에 공을 구문(골대)에 누가 많이 넣느냐로 갈렸다. 이때 선수가 사용하는 채는 1m 정도의 장시이고 공은 나무를 둥글게 깎은 것으로 표면에 붉은색 옻칠을 하거나 수놓은 비단으로 싸기도 한다. 복장은 선수들의 눈에 쉽게 띄도록 하기 위해 서로 다른 색 옷을 입었다.
격구는 구문을 세우는 위치·개수·구문의 형태에 따라 세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경기장의 양쪽 끝에 구문을 설치하는 쌍구문인 경우 서로 마주보고 공을 빼앗아 상대방의 구문에 공을 넣는다. 이것은 서로 마주보고 경기를 하기 때문에 매우 격렬하고 부상의 위험이 높다.
고려시대에 성행한 격구 방식이 이에 해당된다. 단구문인 경우 격구장의 한쪽 끝에 구문을 세우고, 다른 쪽에서 일제히 말을 달려 서로 공을 차지해서 일정하게 구문 사이를 통과시키는 방법이다. 마지막 방법은 경기장 한곳에 구문을 세우고 일정한 순서에 따라 공을 치면서 돌아오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