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수(30·오미야)에 대한 축구계의 평가에는 공통점이 있다. 실력에 대해서는 대부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K-리그 무대에서 뛰고 있는 수많은 어린 선수들이 '플레이스타일을 닮고 싶은 선배'로 첫 손에 꼽는다. 재기넘치는 발재간과 드리블, 정확도 높은 프리킥을 앞세워 국가대표팀의 실질적인 에이스로 대접받던 시절도 있었다. 2000년대 한국축구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평가받으며 '밀레니엄 특급'이라는 자랑스런 별명도 얻었다.
이천수의 기량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6일 열린 가시마 앤틀러스와 개막전에서 2골을 터트렸다. 일본의 일부 네티즌은 '아시아의 베컴'이 돌아왔다며 환호했다. 기량만 놓고 보면 당연히 대표선수 감이다.
하지만 프로로서의 자세를 논할 땐 분위기가 달라진다. 이천수가 걸어온 길은 수많은 사건·사고들로 점철돼 있다. 정신력과 팀워크에서 낙제점이 매겨진 이유다. 매번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고개를 숙였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게으른 천재' '악마의 재능' 등 찜찜한 내용을 담은 꼬리표들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다.
◇손가락 욕과 주먹감자
K-리그 무대에서 이천수는 '악동'의 전형으로 손꼽힌다. 울산 시절이던 2003년 5월 수원 원정팬에게 손가락 욕설을 해 벌금을 냈다. 2006년 10월에는 인천과 경기에서 팀 동료의 골이 무효 판정을 받자 분을 참지 못하고 욕설과 함께 심판을 밀치는 등의 행동을 저질러 6경기 출장 정지와 벌금 400만원을 선고받았다. 전남으로 적을 옮긴 2009년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서울과의 개막전에서 팀 동료에게 오프사이드를 선언한 부심을 향해 주먹 감자를 날렸다가 6경기 출장 정지, 벌금 600만원이라는 징계를 받았다. 상벌위원회로부터 '홈경기에 페어플레이기수로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아 국제적인 망신을 사기도 했다. 돌출행동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팬들의 뜨거운 인기와 관심은 눈 녹듯 사라졌다.
◇거듭된 해외진출 실패
타고난 기량을 인정받아 해외무대를 노크할 기회를 세 차례나 얻었지만, 하나같이 '실패' 낙인을 찍고 돌아왔다. 2003년 스페인 레알 소시에다드에 진출하며 '오리엔트 특급'으로 관심을 모았지만, 팀 적응에 실패했다. 이듬해 위성구단 누만시아로 옮겨 재기를 노렸으나 이마저 여의치 않았다. 2007년 페예노르트(네덜란드) 진출 과정은 황당함 그 자체다. 2007년 2월 그리스와의 A매치서 골을 넣은 뒤 "해외로 보내주지 않으면 K-리그 경기에 나서지 않겠다"는 협박성 발언을 쏟아냈고, 우여곡절 끝에 같은 해 8월 네덜란드 리그에 진출했다. 하지만 결말은 허무했다. 한 달 여 만에 '향수병이 심해 견딜 수 없었다'는 황당한 변명과 함께 귀국했고, 이렇다 할 활약상을 보여주지 못한 채 귀국길에 올랐다. 많은 전문가들은 "해외무대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한다는 절박함이 보이지 않는다"며 이천수의 정신력을 질타했다. 2009년 알 나스르(사우디아라비아)에 입단하며 세 번째 도전장을 던졌으나 이 또한 연봉 지급 문제가 불거지며 실패로 막을 내렸다.
◇두 차례의 임의탈퇴
임의탈퇴는 선수에 대해 소속팀이 취할 수 있는 '최후의 조치'다. 선수가 같은 리그 내 다른 팀에 이적할 수 없도록 발을 묶어 선수생명을 옥죄는 벌칙이다. 이천수는 K-리그 무대에서 두 차례나 임의탈퇴 신분을 경험했다. 2008년 수원을 떠나 전남으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불협화음을 일으켜 한 차례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됐다. 이듬해 전남 또한 '무조건 알 나스르로 떠나겠다'며 몽니를 부린 이천수를 임의탈퇴 선수 리스트에 올렸다. 현재까지도 임의탈퇴 선수 신분은 유지되고 있다.
◇폭행
폭행사건에 연루돼 물의를 일으킨 것 또한 두 차례에 달한다. 2007년 말 술집 여성을 폭행한 혐의로 피소됐으나 상대방이 소를 취하해 사건이 종결된 사례가 있었다. 2009년 알 나스르 진출 당시에는 전남 코칭스태프와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다.
박태하 코치가 “이천수의 경우 대표팀에서 뛸 정신적인 준비가 됐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