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사건이 나던 날이었다. 20대 초반의 나이, 꿈이었던 군인도 경찰도 되지 못한 나는 학교를 그만둔 지 3년만에 다시 건국대 야간대학에 들어가게 됐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대학교 1학년이라니.
나는 답답한 마음에 종로의 유명한 관상가인 B씨를 찾아갔다. 딱지처럼 생긴 순번표를 받고 반나절쯤 기다렸을까. 마침내 B씨 앞에 앉게 됐지만 그는 나를 보자마자 "볼 것도 없으니 그냥 가십시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때였다. 누군가 B씨 옆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는 반신에 풍을 맞았는지 얼굴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너 혹시 차총경 아들 차길진 아니니?" 너무 반가웠다. 그분은 이승만 대통령의 인사비서실장직을 지낸 차 선생님이었다. 아버지와 성이 같아 형제처럼 지내셨고, 나도 아버지를 따라 경무대에 있는 차 선생님 댁에 몇 번 다녀오곤 했다.
"얘는 내가 잘 아는 분의 아드님이오. 다시 좀 봐주시오." 차 선생님의 말에 B씨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종교의 길을 가던지 아니면 나와 같은 길을 갈 것이오. 어쩌면 나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소."
말도 안됐다. 야간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는 내게 종교가 아니면 관상을 보라니. 화가 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그 후로도 차 선생님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선생님은 국회의원에 두 번이나 도전했다가 몸에 풍이 오는 바람에 잠시 쉬며 B씨 일을 돕고 있었다.
이미 침술의 명인으로 사주와 관상에도 높은 경지에 올랐던 선생님은 내 사주를 보시고는 "길진아, 너는 사주는 좋지만 눈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 네 눈은 단명상이지만 그것을 면하려면 종교 계통의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꿋꿋이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종교계통의 일만은 정말 하기 싫었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폐결핵으로 시한부판정을 받고 다시 차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연신 피를 토하며 기침하는 나를 보면서도 "너는 죽을 사람이 아니다. 사주는 절대 못 속인다. 큰 일을 할 사람이니 기운 내라"며 어깨를 때려주셨다. 그 말에 힘을 얻은 나는 죽기살기로 건강을 회복해 결국 종교인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됐다.
얼마 전 차 선생님이 94세 생신을 맞으셨다. 나는 기쁜 마음에 인편으로 용돈을 챙겨 드렸다.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네게 용돈도 받고 참 기쁘다"며 건강하게 웃으시던 선생님은 "길진아, 내가 소원이 있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마치 오랫동안 생각해놓으셨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여셨다. "죽을 때 말이야, 자는 듯이 갔으면 좋겠다. 길진아, 네겐 그런 능력이 있지?" 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선생님의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었다. "걱정 마세요. 꼭 그렇게 해드릴께요."
그리고 얼마 후 선생님은 소원대로 자는 듯이 돌아가셨다. 선생은 기술을 가르쳐주고, 사부는 직업을 가르쳐주며, 스승은 인생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비록 구명시식으로 영결식장에도 찾아가보지 못했지만 차 선생님은 내 인생의 큰 스승이셨다. "선생님, 제가 장지에 못가도 이해해주시겠죠? 부디 못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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