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암입니다." 의사로부터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 가족들의 선택은 둘로 나뉜다. 환자에게 사실을 말할 것인가, 말하지 않을 것인가. 미국 임상의들은 반드시 말해주는 것을 원칙으로 여긴다. 환자에게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그렇지 않다. 아직도 가족들이 환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삶의 희망을 꺾고 싶지 않아서다.
J씨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한 거짓말이 늘 마음에 걸렸다. 평생을 예술가로 살아온 아버지가 시한부 말기암 판정을 받으셨지만 J씨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빨리 나으실 거예요"라고 위안을 드렸다.
그는 구명시식으로 아버지에게 사죄하고 싶었다. 구명시식을 하기 전까지 그는 반신반의했다. 과연 구명시식에 아버지 영가가 나타날까. 구명시식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사죄를 올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다.
그런데 구명시식을 시작하자마자 J씨는 아버지 영가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생전 아버지 말투 그대로였다. "내게 거짓말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나는 심약한 사람이라 네가 거짓말을 안했다면 암에 대한 공포로 6개월도 못 살았을 것이다. 네 덕분에 평온하게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J씨는 그대로 눈물을 흘렸다. 부친은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식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끝 무렵에는 나도 얼마 못 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네 말을 들으면 마음의 위안이 됐다."
나는 평소 시한부 환자들에게 반드시 남은 시간을 말해줘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J씨 부친의 구명시식을 한 뒤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에 따라 원칙도 바뀌어야 한다. 아무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해도 시한부 선고는 사람을 봐가면서 말해줘야 한다.
죽음에 통달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평소 심성이나 종교·생각 등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 '1+1'이 꼭 '2'가 되란 법은 없듯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고 그대로 환자에게 말을 전해서는 안 된다.
시한부 선고는 사형수와 같다. 사형수도 사형당일에는 '사형한다'고 말하지 않고 '면회왔다'고 말하고는 끌고 간다. 그러면 열이면 열, 오늘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사형장 문 앞에서도 '정말 면회 온 것일 수도 있어'라며 스스로 위안을 찾는다고. 과거 총살로 사형을 집행할 시절에는 집행관 8명 중 한명에게는 공포탄이 지급됐다. 집행관들은 방아쇠를 당기면서도 자신의 총에는 실탄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죽음과 가까이 지내는 그들이었지만 죽음에 초연하기란 그만큼 쉽지 않다.
새우깡을 먹었다고 새우를 먹은 것은 아니다. 죽어보지 않으면 죽음에 대해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죽음은 매뉴얼대로 처리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는 남은 시간을 말해줘야 하지만 우리 정서상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 J씨 부친처럼 환자의 아름다운 최후를 위해서라면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