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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미스터리Q] 224. 후암동의 추억
지난 초파일엔 반가운 얼굴이 많았다. 특히 25년 전 후암동 첫 법회 때 멤버들이 찾아왔다. 법회가 모두 끝난 뒤 나는 그분들과 보이차를 마시며 즐거운 담소를 나눴다. 마치 고교동창을 만난 듯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 보살님께서 남편이 이사가 되는 게 소원이라고 했죠?" A보살은 남편의 승진 때문에 나를 찾아왔다. 남편이 상고를 졸업해 모대기업 과장으로 있는데 이사까지만 승진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랬죠, 저희 남편이 학벌 때문에 이사가 되기 힘들다고 했거든요."
이후 A씨 남편은 이사는 물론이고 상무까지 진급한 뒤 정년퇴직했다. 그녀는 바라던 소원은 다 이뤘다며 수줍게 웃었다. 그녀 옆엔 B씨가 앉아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부친이 명문법대 학장을 지내신 B씨는 잃어버린 혈육을 찾기 위해 구명시식을 올렸었다. 그러나 눈병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 내눈을 가리며 "찾지 말아달라"고 하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다.
당시 C씨의 기억도 선명하다. 구명시식을 올리자 수십 명의 가족 영가들이 모두 머리에 하얀 보자기를 쓰고 나타났다. "영가님들이 머리에 하얀 보자기를 쓰고 계시는데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러자 C씨는 "저희 집안은 할머니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왔어요. 그래서 하얀 보자기를 쓰셨나봅니다." 아무리 법당에서 올리는 구명시식이라도 천주교 신자 영가님들은 미사포를 잊지 않았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라 부친과 인연이 깊었던 D씨. 당시 70세였던 부친이 늑막염으로 모대학병원에 입원한 뒤 나를 찾아왔다. 노환이라 걱정은 되도 깊은 병이 아니니 금방 회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첫 마디는 가혹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반문했다. "저희 아버지는 늑막염입니다. 큰 병도 아닌데 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나요?" 착잡했다. 병원의 오진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유명 대학병원이라도 실수는 있는 법.
"부친은 늑막염이 아니라 폐암 말기십니다. 두 달 정도 남았으니 잘해드리세요." 처음엔 부친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D씨는 내 말을 들은 뒤 최선을 다해 부친을 모셨다. 부친은 2달 후 세상을 뜨셨다.
E씨 부부 아들에겐 지방대학교를 가라고 했다. 지방대에 갈 정도로 나쁜 성적은 아니었지만 딱 잘라 지방대에 보내라고 했다. "처음엔 눈앞이 깜깜했죠. 그런데 저희 아들이 지방대에 가더니 더 공부를 열심히 외국으로 유학 가서 석박사까지 모두 마쳤습니다." 지금 D씨 아들은 미국에서 가정을 꾸려 잘 살고 있다고 한다.
후암동 시절, 그 때는 영적으로 기이한 현상이 참 많았다. 구명시식 도중 나도 모르게 공중으로 붕 떠올라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고 영가에게 올린 쌀알이 마치 시계추처럼 딱 한 알씩만 바닥으로 톡톡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어떤 보살님은 내가 절을 너무 많이 시켜 무릎에 병을 얻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제가 그렇게 절 한 덕분에 우리 아들 좌골신경통이 다 나아 기적적으로 군대까지 갔다 왔습니다."
후암동을 떠난 지 25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후암'이라는 이름을 쓴다. 그때의 인연은 대부분 떠나갔지만 두터울 후(厚)에 바위 암(巖)이라는 뜻처럼 이곳을 두텁게 지키는 분들이 있기에 잠실에서도, 뉴욕에서도, 대학로에서도 후암선원은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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