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1루까지 열심히 뛰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난 지금까지 야구를 하면서 한 번도 걸어서 1루까지 간 적이 없다.”
양준혁 SBS 해설위원이 현역 시절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자신의 말대로 그는 언제나 전력질주했다. 안타성 타구든 빗맞은 타구든 양준혁은 항상 온 힘을 다해 1루로 뛰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마지막 순간에도 한결같았다. 은퇴경기 마지막 타석에서 그가 친 타구는 장쾌한 홈런이나 폼나는 결승타가 아닌, 평범한 내야 땅볼이었다. 하지만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1루로 내달렸다. 그리고 아웃됐다. 지극히 양신다운 마무리였다. 그렇게 해서 양준혁은 전력을 다해 달리는 아름다운 마지막 모습으로, 팬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았다.
왜 전력질주였을까. 양준혁처럼 전력으로 뛰는 타자주자는 수비진을 위협한다. 여유있게 굴다가는 타자를 살려줄 수 있다는 압박을 준다. 타자가 죽을 힘을 다해 달릴 때 수비수는 마음이 급해지고, 평소보다 서두르게 된다.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원래 야구는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스포츠다. 빗맞은 땅볼이 돌에 맞고 높게 튀어오르는 일도 생기고, 내야 높이 뜬 공이 조명에 사라져 수비수가 놓칠 수도 있다. 일단 전력질주를 하면 살 수 있는 다양한 경우의 수가 생겨난다. 100번 중에 한번 생길까 말까한 그 별 것 아닌 차이는, 2할 9푼 타자와 3할 타자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가 될 수 있다. 양준혁은 그래서 숨이 턱에 닿게 뛰고 또 뛰었다.
물론 실용적인 이유가 다는 아니다. 양준혁은 진정한 프로였다. 프로는 팬들의 사랑과 응원을 먹고 산다. 프로야구 선수라면 팬들에게 언제나 최고의 경기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줄 의무가 있다. 어영부영 무성의한 플레이를 하는 건 팬들에 대한 큰 모욕이다. 팬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선수도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아웃이 될 때 되더라도 상대를 최대한 괴롭히는, 의미있는 아웃을 당해야 한다. 그러자면 어떤 타구에도 열심히 1루까지 뛰는 모습이 필요하다. 양준혁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팬들은 그런 양준혁에 열광했다. 그들이 사랑한 건 수천개 안타와 수백 홈런을 쳐낸 최고의 타자가 아니라, 열과 성을 다해 야구에 모든 걸 바친 진정한 프로의 모습이었다.
타격 후에 1루로 뛰는 건 고교-대학의 아마추어 선수들도 마찬가지. 이들에게도 1루를 향한 전력질주는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프로 선수들의 질주보다도 더 중요할 수 있다. 왜냐. 백네트 뒤에 수많은 프로 스카우트들이 ‘매의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스카우트들은 타자가 타격할 때마다 손에 든 초시계로 시간을 잰다. 라면 끓는 시간을 재는 게 아니다. 타자가 1루까지 얼마나 빨리 도달하는지를 측정하는 것이다.
박철영 SK 스카우트는 “지도자들이 학생들에게 가르쳐줘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스카우트들이 뒤에서 다 보고 있다. 선수가 타석에서 1루까지 뛰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순간 스피드는 어떤지, 아니면 가속이 붙는지 등을 알고 싶은 거다. 그런데 어떤 선수들은 타격한 뒤 아웃이 될 것 같으면 열심히 뛰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내야플라이를 치고 제 자리에서 지켜보는 타자도 봤다. 스카우트들 입장에서는 주력을 보고 싶어서 초시계를 들고 있는데, 정작 선수가 주력을 보여주질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게다가 스카우트들은 선수의 표면적인 성적 외에도 경기에 임하는 자세, 성격, 동료와의 관계, 야구 IQ 등의 수많은 요소를 관찰하고 평가한다. 타격 뒤 1루로 열심히 뛰지 않는 선수는, 팀이 지고 있거나 상황이 나쁠 때 최선을 다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지나치게 겉멋만 들었거나,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랄 게 없는 선수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스카우트 사이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지명순위도 그만큼 낮아진다. 당연히 계약금과 연봉총액도 내려간다. 스스로의 가치를 크게 깎아먹는 결과를 자초하는 셈이다.
다른 예도 있다. 박철영 스카우트는 예전에 한 아마추어 포수를 지켜보다 “투수가 바운드볼을 던져 몸으로 막았을 때 표정을 찡그리는 것에 주목”했다. 그 포수는 타석에서 심판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배트를 바닥에 내리치며 격앙된 반응을 보이곤 했다. “다른 선수도 아닌 포수가?” 포수가 심판의 신경을 긁으면, 다음 회 수비 때 동료 투수가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포수들은 자기 타석에서 좀처럼 심판 판정에 항의하는 법이 없다. 자기 희생이다. 그 포수는 짜증스런 반응과 분노 표출을 통해, 자신이 포수 포지션에 부적합한 선수임을 증명해 보였다. 성격이 그렇다면 타격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포수로는 뽑히기가 어렵다.
그런가 하면 150km/h 가까운 광속구를 뿌리는 한 투수는, 팀이 지고 있거나 홈런 등을 얻어맞고 나면 성의 없는 투구로 일관한다. “자기가 던지기 싫다고 무언의 시위를 하는 거다. 계속해서 위력이 떨어진 볼을 어이없는 곳에 던지면서 감독에게 바꿔달라고 요구하는데, 이런 성격은 프로에서도 의외로 다루기가 어려울 수 있다.” 박철영 스카우트의 말이다. 역시 성적과는 별개로 ‘성격’이 마이너스가 된 사례다.
결국 선수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길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는 없다. 성적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법. 하지만 1루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고, 동료를 배려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선수의 모습에는 슬럼프가 없다.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는 아무도 신경을 안 쓸 것 같지만, 스카우트들은 꼼꼼하게 다 지켜보고 있다.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을 것 같아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러니 혼신의 힘을 다해 뛰어라, 양준혁이 그랬듯이. 그의 타격 솜씨를 따라갈 수는 없어도, 열심히 뛰는 태도를 배울 수는 있다. 그게 진정한 프로가 되는 지름길이다.
<야구라> 배지헌 (http://yagoo.tistory.com/)
* 위 기사는 프로야구 매니저에서 제공한 것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야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