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는 머리가 비었다는 말을 듣기 싫었다. 그래서 아무리 바쁜 촬영 스케줄 속에서도 책을 읽고, 사색을 했다. 젊은 시절 내 정신적 각성(覺醒)을 도운 문학 스승을 처음으로 만난 곳은 1962년 여름 종로 단성사 시사실이었다.
영화 '아낌없이 주련다' 초대 시사회에 많은 손님이 몰려들었다. '사춘기여 안녕' 촬영 중 입은 부상으로 붕대 감은 손을 멜빵에 받친 나는 골목으로 난 시사회장 쪽문 앞에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 중 한 분이 소설 '목마른 나무들'의 정연희 작가였다. 소설 '비극은 없다'의 홍성유 작가를 부군으로 둔 정 작가는 유명한 미모의 여류 지성인이었기에 라디오 방송와 신문을 통해 목소리와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보다는 한 살 위였다. 그녀는 내게 "아, 주인공이시로구나"라며 방긋 웃으며 입장했다. 그 날 영화 담당 기자와 평론가·지방업자들이 모두 '아낌없이 주련다'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신성일 연기 개안(開眼)의 작품이다'란 평이 이어졌다.
얼마 후 대한극장 앞 세운상가에서 영화 촬영이 있었다. 그 날 따라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촬영이 중단됐다. 하늘을 보니 금방 그칠 비가 아니었다. 마침 대한극장에서 화제의 외화 '남태평양'이 상영 중이었다. 워낙 보고 싶었던 영화였기에 극장에 들어갔다. 맨 뒷자리에 앉아있다가 인터미션 시간에 휴게실 모퉁이에 조용히 앉아있던 정연희 작가를 발견했다.
"정 선생."
"미스터 신, 여긴 웬일이예요? 미남자가 여자 친구도 없이 혼자 왔어?"
"세운상가 앞에서 촬영 중에 비가 와서 구경왔어요."
우연히 극장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영화를 감상했다. 이 날 촬영은 더 이상 없었기에 자유시간이었다. 소공동 반도호텔(현 롯데호텔)의 전통 한복 전시회에 들른 후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미국공보관실 근처의 다동 일식집으로 향했다. 이화여대 국문과 출신인 정 작가와 이야기하다 보니 정서적 충만감이 느껴졌다. 나는 즉흥적인 제안을 정 작가에게 내놓았다.
"비오는 날 오후 3시는 내가 대체로 쉽니다. 그 때 뵐 수 있겠죠?"
서울역과 가까운 염천교 부근, 정 작가의 아지트인 다방을 만남의 장소로 정했다. 촬영하면서 비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첫 번째 비올 때 가보니 정말 정 작가가 있었다. 그녀는 내가 출연한 영화에 대한 분석을 하고, 각종 문학작품을 비평해주었다. 정 작가의 강의는 메마른 땅에 뿌리는 빗줄기처럼 내게 큰 지적 쾌감을 선사했다. 비오는 날 오후 3시 이외에는 단 한 번도 그녀와 만난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저녁 우리는 염천교에서 걸어서 이화여대 캠퍼스 뒷동산까지 올라갔다가 그녀의 집으로 갔다. 나는 문간방에서 글을 쓰고 있던 부군 홍성유 작가와 인사를 나눈 후, 차 한 잔 마시고 떠났다. 정 작가는 당시 김활란 박사의 자서전을 쓰고 있었는데, 굉장히 자랑스러워했다. 정 작가로부터 책을 읽어야겠다는 강한 자극을 받았다.
정 작가는 우리 집에 가끔 전화를 걸었다. 훗날 시집까지 낼 정도로 문학소녀적인 나의 어머니는 정 작가의 팬이었으므로 그녀와 통화하는 걸 무척 좋아했다. 두 사람은 친구처럼 친해졌다. 어머니는 정 작가같은 수준의 여자가 며느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것 같다.
정 작가와 지적 교제를 나누던 시절은 때 묻지 않은 수채화같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비오는 날 3시, 국문학 강의를 듣던 나만의 비밀을….
▶1976년 1월 20일 서울 한남동 한강보울링장에서 열린 신성일 모친 김연주(왼쪽) 여사의 환갑 겸 출판기념회에서 김 여사와 다정한 포즈를 취한 정연희(오른쪽) 작가.
정리=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