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일·김지미 주연의 영화 '하숙생'(1966). 한 남자가 애인에게 복수하는 집념을 다룬 이 영화에서 최희준은 주제가로 큰 인기를 얻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맨발의 청춘' '하숙생' '종점'…. 1960년대 중반 내가 주인공으로 히트한 영화이면서 가수 최희준이 주제가를 불러 더욱 빛난 작품들이다. 최희준은 나와 한 시대를 풍미한 단짝이었다.
서울대 법대 출신의 최희준은 미8군에서 냇 킹 콜 노래를 불러 가수가 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팝송의 정통파였다. 그가 속한 포클로버스(최희준·박형준·위키 리·유주용)는 각자 스타일에 맞는 편곡 실력을 갖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64년 '맨발의 청춘' 이후 나와 최희준은 신정·구정·추석 등 명절마다 지방 극장에 쇼 행사를 함께 다녔다. 내가 무대에서 팬들에게 인사했고, 그는 '맨발의 청춘' 주제가와 다른 곡을 추가로 불렀다. 착한 성격을 가진 그는 얼굴에서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정감 넘치는 인물이었다. 어디든 그와 함께 있으면 편했다.
지방 쇼 행사에선 밥 먹는 시간이 일정치 않다. 최희준은 대기실에서 틈을 봐서 자장면을 시켜 먹었다. 그의 얼굴은 둥글넙적하다. 그 앞으로 막 배달온 자장면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 광경을 보던 사회자 김정남은 "금방 쪄낸 찐빵같다"며 웃곤 했다. 그래서 최희준에게 붙여진 별명이 '찐빵'이다.
영화배우 4총사인 나와 신영균·윤일봉·남궁원은 최희준의 '나는 곰이다'라는 노래 때문에 각자 별명을 얻게 됐다. '와하하하 나는 곰이다 / 미련하다 못났다 놀려도 좋다 / 재주는 없다마는 할 짓은 다한다…'라는 가사는 듣기만 해도 웃긴다. 어느 날 우리 네 명이 회식할 때 이 노래가 회자됐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세 선배의 별명을 지었다. 신영균에겐 '곰'. 그는 그 별명을 듣더니 노랫말처럼 "와하하하"하고 웃었다. 윤일봉에겐 '윤코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코가 컸기 때문에 적격인 별명이 됐다.
남궁원은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다소 우유부단한 성격이다. 나는 그를 '순두부'라 불렀다. 바로 내 차례였다. 윤일봉은 "성일이는 말마다 콕콕 쏘니까 '꼬챙이'가 좋겠어"라고 말했다. 내 별명은 그 길로 '꼬챙이'가 됐다.
60년대 최대 히트곡 중 하나는 최희준이 부른 '하숙생' 주제가였다. '인생은 나그네길 /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 듯 / 정처없이 흘러서간다 / 인생은 벌거숭이 /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 듯 / 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관객은 최희준의 애절한 노래와 기 막힌 영화 스토리에 빠져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아코디언 악사 역을, 김지미는 그의 애인 역을 맡았다. 두 사람은 대단히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화재 사고로 인해 남자가 추남이 되자 여자는 애인을 떠난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남자는 성형을 한 후 정체를 감추고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린 집 근처에 하숙생으로 들어간다. 그는 밤마다 연애 시절 여자에게 들려주던 아코디언 곡을 구슬프게 연주한다. 그 곡 중 하나가 '인생은 나그네길…'이다. 처절한 심리전이다. 여자는 매일 밤 마을에 울려퍼지는 그 곡을 들으며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최희준을 생각하면 '인생은 나그네길…'이란 가사가 들려온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