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를 절룩인다. 체육을 좋아한다. 국회의원이다. 대한장애인체육회장 윤석용(60)이 바로 그 사람이다. 장애인이며, 체육을 몹시 사랑하며, 정치력까지 겸비했다. 그만큼 대한장애인체육회장이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대한장애인체육회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목소리도 크고, 성격도 거침없었다. 장애 때문에 수동적이고, 내향적이며, 사교적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그는 기자보다 능동적이고, 외향적이며 사교적이었다.
그러나 한 때 윤회장은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삶을 비관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가 장애인체육회장이라는 자리를 맡고 있는 것은 자기처럼 자살 따위를 생각하는 장애인을 줄이기 위해서다. 체육 활동은 장애를 딛고 이겨낼 수 있는 디딤돌이기 때문이다.
-왜 장애가 생겼나. “한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장애 때문에 힘들었던 건 언제부터인가. “초등학교부터다. 그 전에는 집밖에 잘 안나갔으니까 몰랐다. 앞집 여학생이 뒷걸음질로 가도 나보다 빠르더라.”
-자살을 몇 번 시도했다던데 언제였나. “초둥학교 4학년 때다. 교회 주일학교에서 친구들과 손을 잡고 둥글게 도는 걸 해야하는 데 옆에 여학생이 팔을 뿌리치더라. 4학년 때는 수업시간에 소아마비가 법정 전염병이라는 게 나왔다.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장애가 생긴것이고 더이상 전염이 되지 않는 것인데 친구들이 그 날 이후 밥을 같이 안먹더라.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던데 왜 나만 이런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크레졸을 마셨다. 청소할 때 쓰는 독극물이다.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났다. 지금은 나에게 주어진 소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신은 극복하지 못할 시련은 주지 않는다.”
-한 번 자살을 시도한 사람은 또 하곤 하는데. “3번 했다. 고교 때도 한 번 있었고. 그 이야기는 그만 하자.”
말 문을 닫던 그가 다시 자살 이야기를 꺼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살 방지 이야기다.
“지난 3월 자살방지예방법이 통과됐다. 내가 발의한 것이다. 생명의 전화도 만들었다. 한남대교, 마포대교 등 한강 다리 4곳에 설치했다. 전화기를 들면 상담자와 연결된다. 119도 바로 출동한다. 누구랑 말 몇 마디만 해도 안 할 수 있는 게 자살이다. 자살 방지에 기여했다고 시민단체로부터 상도 받았다. 한 때 자살을 했던 내가 그런 상을 받았다는 게 아이러니컬하다.”
그는 한의사였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한의대생 시절에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도 다녀왔다. 제적을 당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졸업했다. “후배들 물들일까봐 정부에서 적당히 졸업시킨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크게 웃었다. 긍정과 부정이 섞인 웃음이다.
-한의원은 잘 됐나요.“200만원을 빌려서 1982년에 개업했다. 처음엔 장사가 안돼서 두 달 후에 간판업자가 돈을 내라며 간판을 떼가더라. 인삼·녹용 같은 비싼 약재를 살 수가 없어 소고기나 맘껏 사먹으라고 처방을 내리기도 했다. 비싼 약 처방안하고 정직하게 한다는 소문이 났는지 어느 순간 환자가 너무 많아 고민이 될 정도로 번성했다. 개업 때부터 매주 일요일에는 20년 넘게 매일 무료 진료를 했다. 탁아소도 만들고, 결혼 못하는 가난한 사람 연결도 시켜줬다. 서른 네 살부터 주례를 봤다. 자연히 빈민운동을 하게 됐다. 그게 복지 운동으로 변했다.”
천호동 곡교 어린이집, 성내동 신바람 어린이집 등에 그의 손때가 묻어있다. 대한사회복지개발원도 설립하고 결혼생활지원센터라는 것도 만들었다. 장애인을 목욕시켜줄 수 있는 차량도 개발해 운영했다.
-왜 국회의원을 하려고 했나요. “사회 복지 운동을 하다보니 법과 제도를 고치는 게 너무 어려웠다. 이럴 바엔 내가 제도권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당 공천 심사를 받는데 나보고 걸어다닐 수 있냐고 묻더라. 화가 났지만 꾹 참고 ‘설악산 대청봉, 한라산도 다녀왔다’고 했다. 그때 한 여자가 용기있다며 박수를 쳤다. 나경원 의원이었다.”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도 장애를 가진 자녀를 두고 있다.
그는 2004년 선거에서는 탄핵역풍을 맞아 1000표 차이로 낙선하고, 2008년에는 1만표 차이로 강동구에서 당선됐다. 오랫동안 사회 운동을 한 게 밑거름이 됐다. 그는 장애아동지원법 등 장애인과 소외계층의 복지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복싱을 했다고 들었다. 복싱은 스피드가 중요하고 하체가 받쳐줘야 하는 운동 아닌가. “중 2때 탁구를 쳤다. 그런데 공을 잡는 게 너무 힘들더라. 지금은 뚱뚱해졌지만 고교 때는 50kg밖에 안나갔다. 얼마 전까지 한의원에 샌드백을 매달아놓고 운동하고 그랬다. 장애인이라고 못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장애인에게 할 수 있다라고 용기를 주고, 기회를 주는 게 정말로 중요하다.”
-평창 겨울 올림픽을 유치하게 됐다. 더반에도 다녀오셨는데, 어떤 활동을 했나. “난 평창 겨울 올림픽을 하고 싶다는 말은 안했다. 다만 한국에서 장애인 겨울 올림픽을 하게 해달라고 했다. 열심히 뛴 분들이 많지만 나도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기 위해 애쓰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이번 기회에 장애인 겨울 종목의 여건이 한 단계 발전해야한다.”
-겨울 종목은 다 열악한 상황 아닌가. 장애인 겨울 스포츠에만 투자할 수는 없지 않나. “장애인 복지를 따로 생각하면 안된다. 장애인과 일반인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함께 간다는 생각이 중요하다. 그래서 장애인 교육도 일반인과 함께 통합 교육을 하며 어릴 때부터 어울리고 배려하는 것을 익혀야한다. 체육도 마찬가지다. 문화부에서 겨울 스포츠 발전을 위한 드림 프로그램에 예산을 3000억원 배정했는데 장애인 체육에 할당된 것은 30억원이다. 평창 겨울 올림픽과 평창 겨울 장애인 올림픽은 동떨어진 행사가 아니다. 함께 해나가자는 취지다.”
한 사회가 얼마나 건강하고 성숙했느냐의 척도는 여러 가지다. 장애인도 행복할 수 있다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게 윤 회장의 신조다. 그는 절룩이면서 오늘도 달린다.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모두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향해.
이해준 기자 [hjlee72@joonga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