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가 선전한다지만 어쩐지, 착한 가족영화나 로맨틱 코미디가 주류인 것 같다. 80년대의 한국처럼 왜 본격 에로영화, 성인영화는 자취를 감추었을까.
어릴 때 봤던 영화와 드라마 속 정윤희. 그녀는 송혜교나 김태희를 능가하는 시대를 평정하는 여배우였다. 이 지면에도 한 번 소개했지만 그녀가 나왔던 영화 '여자와 비'의 에로신은 최고였다. 약혼 파티에서 연지의 약혼자가 먼저 술에 취해 잠이 들어 버리고, 약혼자의 친구 동우는 혼자 남은 그녀를 강제로 소파에 눕히고 강간한다.
결혼 후에도 동우는 그녀를 협박하며 관계를 지속한다. 따지고 보면 여자 잘못이 아닌데도 당시의 정조 관념은 그녀의 색기를 잘못으로 몰고 간다. 마지막 장면 자꾸만 얽히는 동우에게 칼을 꽂고 빗 속에서 절규를 한다. "비 때문이에요. 비만 내리면 참을 수 없는 욕구가 절 지배해요." 그런데 그런 조선시대 관념은 동우의 또 다른 엔조이 파트너와의 에피소드로 상반된 입장을 보인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자를 수영장에서 만난 동우. 그녀는 동우의 방까지 따라온다. 그리고 빨간 립스틱으로 거울에다 이렇게 쓴다. '섹스는 스포츠다.' 그리고 침대로 올라가는 그녀는 위풍당당하기까지 하다. 주인공은 여전히 연약하고 수동적이지만, 조연 만큼은 달라진 사회의식을 담고 있었나보다. 아마 30년 전의 감성 치고는 파격이었을거다.
물론 당시 에로영화가 현대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구와 땡칠이',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큐라'를 만든 다작의 거장 남기남 감독의 영화 '씨내리'같은 고전물도 있었다. 물론 80년대 유행했던 고전 에로물과 다른데, '씨내리'는 대를 잇기 위해 부잣집 마님과 하룻밤을 보내고 그 집에서 보낸 자객에게 쫓기는 슬픈 씨내리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강팔은 아버지 대부터 내려오던 역적의 누명 때문에 집안이 몰락해 쫓겨 다니던 중 김대감 집에 숨어들었다가 인연이 되어 그 집의 씨내리가 된다. 그러나 그 집 며느리 숙향의 임신 뒤 그 집에서 자객을 보내 목숨을 위협하다 숙향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지만 도망자 신세가 된다.
슬픈 여자의 일생을 다룬 씨받이와 아류는 흔했지만, 남자인 씨내리 이야기가 흔치는 않았다. 굴레에 갇힌 여자의 슬픈 한은 성 차별인 동시에 신분의 차이로 인한 사회의 갈등이라는 메시지가 조금 느껴질만 하다가 숙향도 역시 도망 다니는 신세로 밝혀지면서 메시지가 전해지다 마는 이 영화가 '서편제'가 개봉했던 그 해에 나왔다는 사실이 약간 신기했다. 역시 메시지가 살려고 하다가 그냥 에로물로 가는 게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런 에로물을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때가 새삼 좋았다는 생각이다. 그 때의 사회 분위기는 세계화와 ‘우리 것’이었지만 그게 ‘우리의 에로물’은 아니었나보다.
있을 때가 좋았다. 요즘 나오는 말이다. 가족영화가 나쁜 게 아니지만 없어지는 건 슬프다. 에로물은 모두 개인 컴퓨터의 하드로 들어간 지금 스크린으로 볼 수 있는 화려하고 큰 스케일의 성인물을 보기 어려워 참 아쉽다.
이영미는?
만화 '아색기가' 스토리 작가이자 '란제리스타일북' 저자, 성교육 강사, 성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