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정박물관은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중앙도서관 4층에 있는 고지도박물관이다. 동서양의 고지도·지도첩을 비롯해 민속 관련 유물까지 합쳐 모두 2만여 점의 자료가 소장돼 있다. 문화재적 가치로 따져볼 때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고지도 전문 박물관이다.
총장실보다 한 층 더 높은 곳에 자리한 혜정박물관. 김혜정(66) 관장의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새파란 바다색이 인상적인 고지도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1507년 세계 최초로 ‘지구는 둥글다’는 이론을 지도에 구현한 발트 제뮐러(독일)의 지도다. 콜럼버스 등장 이후의 것으로 아메리카 대륙이 아시아 대륙보다 더 크게 그려져 있다.
“지도는 꿈의 세계입니다. 탐험을 향한 꿈이죠. 그래서 지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탐험가가 될 수밖에 없어요.”
재일교포 3세인 김 관장은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 고서점에서 지도 한 점을 발견하고 삶의 길을 정했다. ‘MER DE COREE’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표기된 동해가 터닝 포인트가 됐다. 그 전까지 ‘일본해’라고 알고 있었다. 1700년대 제작된 프랑스 고지도에서 할아버지 나라의 내력을 발견함과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문을 열었다. 스물다섯 살, 고지도를 수집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유럽으로 떠났다. 그렇게 모은 전 세계 고지도가 현재 3000여 점이나 된다.
그는 평소 관람객을 위해 큐레이터를 자청한다. 일반인에게 보여주지 않는 제1수장고를 가장 먼저 들렀다. 미공개 지도 수백여 점과 수천여 점의 그림·유물이 숨죽여 전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지난해 일본에서 수집한 일본황실의궤가 눈에 띄었다. 김 관장은 3점 중 한 점을 꺼내 바닥에 펼쳐 보였다. 도쿠가와 막부의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를 기록한 의궤. 필사본이 아닌 진본이 눈앞에 펼쳐졌다.
“굳이 일본황실의궤를 한국에 가져온 이유는 수집가로서의 욕심이 아닙니다. 우리는 조선왕실의궤라는 훌륭한 문화재가 있잖아요. 우리 것과 일본의 것을 비교해서,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뛰어난 문화적 재능을 갖고 있었던 지를 알리고 싶었어요. 아이들에게 그런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수장고를 나서면 제1전시실이다. 동서양의 아름다운 지도를 모아둔 곳이다. 11세기 아즈텍 시대에 짐승의 가죽에 그려진 지도가 첫눈에 들어왔다. 국가 보물로 지정된 신경준의 지도 4점도 함께 걸려 있다. 지도라기보다는 한 폭의 수채화다. 제2·3전시실은 동해와 관련된 수많은 지도와 자료가 전시돼 있다. 서양에서는 1700년대부터 지도에 바다를 표기했다. 당시 유럽의 지도학자들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다를 ‘Sea of korea’라고 표기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일본해 표기가 대세가 됐다. 조선의 국력이 쇠하면서 우리의 바다 이름을 잃은 것이다. 김 관장은 1990년부터 ‘동해 찾기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그가 말하는 동해는 ‘East sea’가 아닌 ‘Dong-Hae’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에 ‘동해매’ 라는 기록이 있어요. ‘매’는 물을 가리키는 고구려 말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동해는 방위의 개념이 아니라 국호와 같은 개념이었죠.” 그가 유럽 지도를 수집하기 전까지 “(공개된 지도 중에)동해로 표기된 지도는 2%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는 “30%가 조금 넘을 것”이라고 했다.
전시실 안쪽 어린이전시관은 바닷길·실크로드·하늘길 3개 테마로 구성돼 있다. 지도를 포함해 볼거리가 많다. 특히 초원길에 전시된 몽골 고지도와 전통 가옥인 ‘게르’가 아이들에게 인기다. 게르는 몽골에서 가져온 그대로 재현했다. 겨울방학 기간 동안 혜정박물관은 매일 오전·오후 어린이문화교실을 연다. 또한 가족체험프로그램도 있다. 홈페이지(oldmaps.khc.ac.kr)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