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이집트 축구장 최악의 참사, 최소 73명 사망
이집트 프로축구 경기 도중에 최악의 관중 난동 사태가 벌어졌다. 축구팬 74명이 사망했고, 부상자도 1000여 명에 이른다. 부상자 중 150여명은 위독한 상태라 사망자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대참사'는 2일(한국시간) 이집트 북동부의 항구도시 포트 사이드에서 일어났다. 이집트 프리미어리그(1부리그) 경기에서 강호 알 아흘리가 라이벌 알 마스리와의 원정경기에서 1-3으로 패한 게 발단이 됐다. 예상 밖 패배에 화가 난 알 아흘리의 팬들이 홈팀 팬들을 조롱하는 현수막을 내걸며 먼저 도발했다. 이어 알 마스리 팬들이 경기 종료 직후 그라운드와 원정팀 관중석으로 난입해 유혈 난투극을 벌였다.
알 아흘리 선수와 팬들을 향해 돌과 유리병이 날아들었고, 경기장 곳곳이 화염으로 뒤덮였다. 칼·각목 등 흉기를 사용한 이들도 있었다. 달아나던 관중이 좁은 출구로 한꺼번에 몰린 탓에 압사자가 많이 나왔다. 이날 경기장에는 2만2,000명의 관중이 입장했으며, 이중 2,000명 가량이 원정팀 서포터였다.
알 아흘리 미드필더 모하메드 아부트리카는 현지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것은 축구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내 눈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갔다. 현장에는 보안요원도, 앰뷸런스도 없었다"고 사건 당시를 회상했다. 이집트 축구연맹은 리그 일정을 무기한 연기하고 자체 진상 조사에 착수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경찰과 군인들이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서지 않았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파장은 더욱 커지고 있다. 알 아흘리의 팬클럽 관계자는 "경찰이 당시 상황을 본체만체 했다. 구급차 도착도 늦어 우리가 숨진 팬들을 직접 옮겼다"고 증언했다. 이어 "폭동이 일어난 뒤에도 경찰이 출입구를 열지 않아 알 아흘리 팬들이 경기장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이 단순한 훌리건끼리의 다툼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AFP는 "지난해 '아랍의 봄' 당시 시위 진압에 나섰던 경찰과 치안부대가 국민의 반감을 샀고, 정권 붕괴 후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상태"라면서 "폭동 당시 진압명령 조차 내려지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집트에서는 지난달 25일 민간정부로의 권력 이양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과도정부를 이끄는 군부가 시위대에 발포하는 등 유혈사태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군부와 경찰이 '군부 주도의 안정'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유혈 사태를 방치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집트 의회 제1당인 무슬림 형제단 소속의 에삼 알-에리안 의원은 "이번 사건은 무바라크 전 정권의 잔당이 보낸 메시지"라고 해석했다. 수십년간 철권통치를 하다 쫓겨난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잔당들이 민심을 흔들기 위해 이번 일을 계획했다는 주장이다. 시기도 절묘하다. 무바라크 축출 후 지난달 24일 국회(하원)가 처음 개회됐고, 29일은 시민혁명 1주기였다.
◇세계축구 경기장 참사 일지
발생년도 장소(국가) 사망자 발생 원인
2012년 포트사이드(이집트) 최소73명 관중난동
2001년 아크라(가나) 120명 관중난동
2001년 요하네스버그(남아공) 43명 압사
1996년 과테말라시티(과테말라) 78명 압사
1989년 셰필드(잉글랜드) 95명 압사
1988년 카트만두(네팔) 93명 압사
1985년 브래포드(잉글랜드) 56명 화재
1982년 모스크바(러시아) 340명 압사
1971년 글래스고(스코틀랜드) 66명 경기장 붕괴
1968년 부에노스아이레스(아르헨티나) 150명 압사
1964년 리마(페루) 318명 관중 난동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