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영화 '어벤져스'가 엄청난 관객들을 끌어 모으며 연일 화제다. 개봉하고 불과 열 하루만에 관객이 400만을 넘어섰다고 하니 기세가 대단하다. 영화 전문가들은 미국 마블코믹스 슈퍼히어로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이 영화가 슈퍼히어로물 영화 관객 신기록을 깨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한다.
이 영화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단순한 서사 구조다. 영화 '토르'에 나온 악역 로키가 외계 군단을 이끌고 지구를 침공하자 아이언맨·토르·헐크·캡틴 아메리카·블랙 위도우·호크아이와 같은 슈퍼히어로들이 힘을 합쳐 싸운다는 내용이다. 뻔한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벌떼처럼 몰리는 것은 물론 영화가 보여주는 깨알같은 재미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와는 다르게 사회적 제약들과 자연적 제약들을 간단히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들이 우리 안에 숨은 무의식적 욕망을 기분좋게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이 영화는 황당무계하지만 그것을 뻔뻔하게 감당할 수만 있다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다. 어쩌면 이 영화가 주는 재미와 즐거움은 현실에서는 전혀 가능하지 않은 슈퍼히어로라는 ‘초월적 기호’들을 ‘동일시로서의 투사’(projection-identification)라는 외설적인 방식으로 드러낸 것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영화에서는 항상 선이 악을 이기고, 착한 자들이 당하는 고난은 언제나 우여곡절 끝에 보상을 받는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현실에서는 자주 악이 선을 이기고, 착한 자들이 당하는 고난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할뿐더러 끝나지도 않는다. 정의가 불의에 짓밟히는 사태를 보고 ‘아, 더럽군, 더러워!’ 하면서도 살아야 하는 게 현실이다. 영화는 현실과 다르기 때문에 즐거움과 대리만족을 안겨준다. 그래서 우리는 8000원을 내고 저 어두컴컴한 극장 안으로 자발적으로 입장한다. 어쨌든 '어벤져스'를 보고 기분좋게 나올 때, 아마 당신 안에서 이런 단순하고 당연한 물음이 스멀스멀 기어나왔을 것이다.
초자연적 힘과 마법적인 능력을 갖춘 이 슈퍼히어로들은 누구이고, 우리는 왜 슈퍼히어로에 열광하는 것일까? 이 물음을 바꾸면, ‘슈퍼히어로에 열광하는 우리의 무의식 안에 있는 것은 어떤 욕망일까’가 될 테다. 자, 이제 그 욕망을 덮고 있는 꺼풀을 벗겨내고 그 안을 들여다보자.
영화화는 달리, 우리 존재는 정말 작고, 우리가 살아야 하는 현실은 비속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사는 것 역시 결코 재미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는 게 재미없으니까, 영화라는 쾌락을 찾아 극장엘 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마주치는 자명한 현실은 영화가 선물로 안겨준 달콤한 몽환을 바로 깨버린다. 꽤 비싼 파스타를 주문했는데, 파스타는 아무 맛이 없고 종업원들의 서비스는 엉망이다. 게다가 음식점 바로 앞 도로에 주차해놓은 차량 유리창에는 불법 주차 스티커가 붙어 있다. 짜증이 왕창 밀려오고 혈압은 급상승한다. 그게 현실이다.
우리는 날마다 비속한 세계에서 깨어나 비속한 삶을 산다. 우리는 작다. 날마다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일을 하러 지하철을 타고 회사라고 부르는 일터로 나간다. 회사에는 나와 똑같은 고만고만한 작은 존재들이 있다. 작은 존재들과 어울려서 우리는 작은 존재로 산다. 아주 가끔씩 우리는 이 작은 존재의 삶에 멀미를 느끼기도 한다. 반세기 전에 시인 김수영은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라고 절규했다.
우리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더비에서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하는 박지성의 영리한 플레이에 열광하고,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아시아 선수 신기록을 세우고 일본 리그를 거쳐 돌아와 한화 유니폼을 입고 공을 던지는 박찬호의 호투에 박수를 친다. 그들은 우리의 영웅이니까! 모래보다 작고, 먼지보다 작고, 풀보다 작은 우리들에 비해서 영웅들은 정말 크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 작은가? 우리는 생물학적 존재로서 작은 게 아니다. 작다는 것은 한 번도 영웅이 되어보지 못한 사회적 존재로서 작다는 뜻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욕망의 크기, 문명화된 정도의 크기, 사회적 존재의 크기가 작다는 뜻이다. 뒤르켐은 “인간은 단지 그가 문명화된 정도만큼만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진정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문명이라고 불리는 관념·신념, 그리고 행동 계율의 집합을 얼마만큼 소화하고 이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 마음, 혹은 우리 존재가 좀팽이처럼 작은 건 우리 탓이 아니다.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문명이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태어난 세계의 문명화가 덜 되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 문명이라고 불리는 관념·신념 그리고 행동 계율의 집합을 작게 소화하고 이해했기 때문에 우리가 작은 것이다. 정말 그럴까?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가 작은 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얘기다. 우리가 좀팽이처럼 살기 때문에 우리는 작은 것이다.
인류가 신화를 창작해내고 그것에 빠져 열광하는 것은 우리의 작은 존재됨 너머의 세계를 꿈꾸기 때문이다. 신화의 세계를 “상상적인 행동 및 상황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면, 신화의 속에 사는 존재들은 초인간적 힘을 가진 영웅·신들이다. 제우스·헤라클레스·아폴론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인류의 환상과 사랑을 먹고 영웅이 되고 신이 되었다. “영웅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간에서 활약한다. 그 활동을 통해서 영웅은 신이 되기를 갈망하며, 인간을 그 한없는 비참함으로부터 구출하기를 열망한다. 영웅은 인간의 전위(前衛)로서, 신격화과정에 있는 인간이다.”(에드가 모랭, '스타')
‘물신’(物神)의 시대, 대중의 시대에 영웅들은 헤라클레스나 아폴론이 아니다. 그들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허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새로운 영웅들을 창조해냈는데, 그들은 바로 ‘스타’라고 불린다. ‘스타’은 신화의 영웅들이 그랬듯이 우리의 환상과 사랑을 먹고 자란다. 그들은 우리의 뜨거운 사랑과 열광적인 숭배를 받는 한에서 영웅이며 ‘반신’(半神)들이다. 그 반신은 어떤 사람에겐 김태희고, 어떤 사람에겐 이효리고, 어떤 사람에겐 ‘소녀시대’의 누구일 것이며, 어떤 사람에겐 ‘동방신기’의 누구일 것이다. 우리는 영웅이 죽어버린 시대에 ‘스타’라고 불리는 모조 영웅들을 만들어 그들을 숭배한다. 왜? 우리의 존재됨이 작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초인적 힘에 대한 욕망, 불사의 욕망이 영웅들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키운다.
'어벤져스'에 우르르 떼로 몰려나오는 슈퍼히어로들은 우리의 집단무의식 안에 숨은 심리적 원형들을 반사한다. 그 심리적 원형들은 오랫동안 사람들이 욕망했지만 끝내 이룰 수 없었던 욕망들을 투사해서 만들어낸 것들이다. 이 슈퍼히어로들은 우리의 불가능한 것을 향한 욕망들에 의해 빚어진다. 우리 안에 있는 욕망들은 우리를 조종하고, 우리 삶의 양태를 제약하고 규정한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 욕망,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망, 무엇을 먹고자 하는 욕망들이 우리의 존재를 빚는다. 철학자들은 ‘욕망이 결핍이며 무의식적으로 생산하는 힘’이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슈퍼히어로들은 우리 안의 결핍들이 뭉쳐서 만든 환영이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되고자하는 그 무엇이다. 삶이 고단할수록, 혹은 현실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슈퍼히어로를 열망하게 될 것이다.
'어벤져스'가 관객이 몰리고 흥행이 잘 된다는 것은, 한편으로 씁쓸한 일이다. 그것은 초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들을 열망하는 그만큼 우리 현실이 꼬여 있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까닭이다. 더 씁쓸한 것은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환상 속의 그대’일뿐인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바로 현실에서 살며 현실의 문제들을 만들어낸 우리들 자신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