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콘서트’는 일요일 밤에 방영하는 KBS의 스탠딩 코미디 프로그램이다. 1999년 9월에 첫 방송을 내보냈으니, 벌써 13년째 방송을 이어가는 중이다. 온갖 ‘리얼 버라이어티’가 대세인 흐름 속에서도 ‘개그콘서트’는 방청객 앞에서 세태 풍자와 말장난, 그리고 해학을 펼치는 스탠드 업(stand-up) 코미디로 입지를 굳혔다.
‘개그콘서트’가 매회 펼쳐내는 12개에서 15개의 코너들이 다 웃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코너들이 지나치게 많아 산만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더러는 식상하고, 더러는 불편하며, 더러는 억지스럽다. 그럼에도 ‘개그콘서트’는 나를 낄낄거리게 하고, 일요일 밤을 나른한 행복에 젖게 만든다.
‘개그콘서트’를 보는 시간은 몸과 마음을 게으름 속에 한껏 방치한 채 순수한 놀이와 멈춤(休止)의 참맛을 누리는 향락의 시간이다. '놀이는 자기 자신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 활동'(호이징하의 '호모 루덴스' 중), 즉 놀이는 그 자체가 목적인 향락이라면 말이다. 따라서 굴욕과 수모를 안기는 극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개그콘서트’는 꼭 필요하다. 웃음은 현실의 번뇌들을 희석시키는 *세레토닌의 분비를 촉진시키고, 현실의 의무들로 인해 쓸데없이 높아진 혈압을 낮추고 맥박을 안정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개그콘서트’가 더 독하게 웃기길 바라는 이유다.
여러 코너 중 특히 ‘용감한 녀석들’과 ‘생활의 발견’에서 나는 웃음이 팡팡 터진다. 터무니없이 용감한 발언과 동작으로 웃음을 이끌어내는 신개념 음악 개그라는 ‘용감한 녀석들’에는 박성광·신보라·정태호·양선일이 나온다. 박성광·정태호·양선일은 남자고, 신보라는 여자다. 그럼에도 그들은 성의 차이를 지우고 ‘녀석들’로 균질화하면서 세상의 모든 권위들과 관습의 권력들에 맞서 랩을 쏘아댄다.
예를 들면 '그놈의 돈 때문에 어딜 가나 돈 때문에/사람 인생 하나 바뀌는 건 시간문제/그놈의 돈 때문에 어딜 가나 돈 때문에/사람은 물고 뜯고 싸움을 즐기며 살아가지 돈 때문에', 바보가 되는 세상을 꼬집는다. 택시를 타고 가진 돈보다 넘치게 나온 택시비 때문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곤경을 외면한다. 마찬가지로 애인의 반응 역시 다르지 않다. 돈이 없어서 '발바닥에 땀나도록 쉴새없이 달려온 나'는 바보가 되고 좌절하게 만드는 세태에 대한 풍자다(아이 돈 케어 I don't care).
‘용감한 녀석들’은 “한숨 대신 함성으로 걱정 대신 열정으로 포기 대신 죽기 살기로”라고 외친다. 이렇듯 팍팍한 현실에서 기죽은 청춘들에게 기죽지 마라고 응원하는 것이다. ‘용감한 녀석들’은 사자와 같이 힘 있는 자들과 주류 풍속을 뒤틀며, 우리 안의 비열함과 속물성을 발가벗기고 조롱한다. 이때 용감함은 2%쯤 부족한 *테스토스테론에 의해 드러나는데, 이것이 무모함에 더 가깝다고 느낄 때 내 마음은 애잔해진다.
용감함은 존재론적 도약의 결과지만, 그 이면은 늘 두려움과 비겁함이다. 그들은 자신 안의 두려움과 비겁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해 ‘진실’을 내지르며 도발한다. 어쩔수없이 약자인 박성광이 방송 편집권을 쥔 서수민 피디를 향해 발칙하게 도발할 때마다 애틋해지는 것도 그 안에 숨은 두려움과 비겁함이 가려지지 않는 까닭이다.
특히 ‘녀석들’ 중의 하나로 등장하는 신보라의 연기에 나는 자주 웃음이 터진다. 신보라는 국민아이돌로 꼽히는 아이유에서 세계적인 가수인 레이디가가에 이르기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말도 안 되는 독설을 날린다. 독설과 분노로 무장한 신보라는 그 본질에서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여성이다. 연약함이라는 정체성과 독설은 부조화를 이룬다. 인생의 비극과 유머 사이에서 그 부조화는 별처럼 반짝거린다. 신보라는 ‘용감한 녀석들’을 성공으로 이끄는 중요한 축이다.
신보라는 연약함과 독함, 발랄함과 소심함, 영리함과 어리숙함, 의연함과 소심함이라는 모순적 요소를 동시에 내면화하고 있는 캐릭터다. 코너에 활력과 신명을 불어넣는 신보라가 빠진 ‘용감한 녀석들’은 상상하기 어렵다. 누가 보더라도 요즘 신보라가 ‘개그콘서트’의 대세다.
진지한 상황에서도 깨알같이 작은 일상으로 살아야 하는 이야기를 반전 코미디로 보여주는 ‘생활의 발견’에서 신보라와 송준근은 오래된 연인을 연기한다. 그들의 연애는 관습이 되어버린 채 답보상태다. 그들의 연애에는 이미 권태라는 지방질이 두꺼워지고, 지루함이라는 동맥경화가 시작된 셈이다. 송준근이 신보라에게 말한다. “나 여자 생겼어, 우리 헤어지자”. 그리고 송준근의 새 연인으로 깜짝 게스트가 등장한다. 신보라는 이 연애의 적수에게 흠집을 내는 독설을 날린다. 이를테면 가수 백지영에게는 ‘연하남 킬러’나 ‘성형미인’이 흠집의 소재가 된다. 때로는 나도 나를 화나게 하는 현실과 대상들을 향해 분노하며 독설을 날리고 싶어진다.
‘막장’ 현실의 황당함과 무규범성이 도에 지나쳐 웃길 때 ‘개그콘서트’의 자리는 위태로워질 수 있다. 악이 부흥하고 악인들이 활개를 치는 ‘막장’ 현실이 주는 웃음은 쓰디쓴 웃음이다. ‘막장’ 현실은 미래 시제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이 ‘막장’ 현실에서 쓴웃음만 짓다가 괴물로 변할까봐 겁이 난다. 내 무의식에 있는 공포가 나를 더욱 ‘개그콘서트’의 웃음에 기대고 매달리게 하는 것일까.
내가 ‘개그콘서트’를 보는 것은 그저 웃고 싶기 때문이다. ‘뻘짓’을 하는 정치에 실망하고, 바닥을 기는 경제에 낙담하면서 현실의 나는 의기소침하고 침울하다. 침울과 불행에 잠식된 나에게 웃음은 일종의 보상이다. 나는 그렇게 웃기 위해서, 일상의 지리멸렬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개그콘서트’를 본다.
도대체 웃음이란 무엇인가. 웃음은 흔히 사람들의 정상에서 벗어난 몸짓·말·행위들과 관련된다. 더 구체적으로 일탈·과장·가장(假裝)·비틀린 몸짓·의도하지 않은 실수·말장난·엉뚱함이 웃음을 만든다. 아울러 웃음은 징벌적 요소를 품는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사회는 신체나 정신, 성격이 품은 경직성을 제거하고 그 대신에 사회성이나 유연성으로 대체하고자 하는데, 이때 '경직성은 웃음거리이며, 웃음은 이에 대한 징벌'('웃음' 중)이라고 말한다.
웃음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강자와 약자,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진보와 보수 모두가 웃음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웃음은 굳이 도덕과 윤리의 편이 될 필요도 없고, 실제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웃음은 도덕의 잣대로 재자면 중립적이다. 오히려 웃음은 대상에 대하여 무자비하고 공격적이다. 웃음은 딱딱한 것, 엄숙한 것, 기계적인 적, 형식적인 것, 즉 모든 경직성과 타성을 태워 없애는 불쏘시개로 삼는다. 웃음이 공동체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늘 공평하거나 정의롭거나 착한 것만은 아니다.
웃음의 사회적 유용성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인물들의 뻔뻔함과 추악함을 까발리는 것으로 징벌을 줄 때 나타난다. 웃음이 항상 다수의 이익을 도모하거나 사회의 공익성 실현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웃음이 있는 사회와 그것이 없는 사회에는 실로 큰 차이가 있다.
웃음이란 온갖 긴장과 억압의 해소에 기여하고, 내면의 해방과 자유로의 도약을 실현한다. 나는 증오로 미치거나 혹은 분노로 폭발하지 않으려고 웃고, 웃기 위해 ‘개그콘서트’를 본다. 웃어라, 행복해질 때까지!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세레토닌 : 행복감을 느끼도록 해주는 호르몬 *테스토르테론 : 남성성을 발현하도록 하는 호르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