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또래보다 키(194㎝)가 컸다. 강한 공을 뿌렸고, 빼어난 외모로도 주목받았다. 톱스타와의 결혼으로 화려함을 더했다. 더 많은 사람들의 눈이 그를 향했다. 하지만 사생활 문제가 불거진 후, 화려함은 외로움에 묻혔다. 조성민은 6일 여자친구의 집 욕실에서, 40세를 일기로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아마시절 조성민은 빛나는 투수였다. 둔촌초교 4학년 때 야구에 입문한 그는 신일중·신일고·고려대를 거치면서 전국구 스타로 명성을 쌓았다. 고교시절 임선동·손경수와 함께 트로이카로 불렸으며 박찬호·정민철·염종석 등 다른 투수 동기생보다 앞서갔다.
1994년 박찬호가 미국프로야구에 진출하자, 조성민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미국과 일본의 영입전쟁이 펼쳐졌고, 1995년 말 '8년 계약, 계약금 1억 5000만엔(당시 15억원)'이라는 초대형 계약 속에 일본 최고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조성민을 영입했다.
데뷔 2년차인 97년 조성민은 '거인의 미래'로 불렸다. 후반기 팀의 임시 마무리를 맡아 1승2패 11세이브 평균자책점 2.89를 기록한 그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됐다. 조성민은 이듬해(98년) 요미우리 선발진에 진입했다. 전반기에만 7승(6패 평균자책점 2.75)을 거뒀다. 완봉승은 3차례. 센트럴리그 다승과 평균자책점 1위에 오르며 조성민은 신인왕 후보 0순위로 꼽혔다. 꿈꾸던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
그러나 그해 올스타전에서 조성민은 평생 잊히지 않는 악몽에 휩싸였다. 7월23일 마린스타디움에서 열린 올스타 2차전에 등판한 그는 팔꿈치 통증 속에서 공을 던졌고, 결국 인대에 문제가 생겼다. 조성민은 98년 시즌을 조기마감했고 99년 4월 수술대에 올랐다.
2000년 12월5일 톱스타 최진실씨와 결혼을 하며 재기를 꿈꿨지만 일본프로야구 1군 통산 58경기 11승10패 11세이브만을 남긴 채 2002년 10월 요미우리에서 방출됐다. 결혼 생활에도 문제가 생겼다. 불화설이 불거졌고 2004년 9월 이혼했다.
조성민의 지인은 "일본에서 돌아오고, 이혼 소송을 하면서 성민이의 말수가 급격하게 줄었다"고 했다. 2004년과 2005년 국내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를 신청했지만 지명받지 못했고, 사업도 실패했다. 연이은 악재 속에 2005년 5월 김인식 당시 한화 감독의 도움으로 한국 프로야구 마운드에 섰지만 3년 동안 3승4패 4홀드의 초라한 성적을 남긴 채 2007년 은퇴했다.
전 부인 최진실씨의 사망으로 다시 실의에 빠진 조성민은 2010년 방송해설자, 2011년 두산 코치로 제2의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코치직을 사임했다. 그의 지인은 "사생활에 관한 보도가 나올 때마다 조성민이 답답해했다. 해명을 하고 싶어하진 않았지만 억울한 마음도 있는 듯했다"고 전했다. 조성민은 외로웠다. 어디에도 자신의 상황을 속시원하게 털어놓지 않았다. 세월을 견디지 못한 조성민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