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이 공자 다음으로 존경한다는 제갈량은 어떤 결혼을 했을까? 정략결혼이었다. 제갈량은 형주에서 이름난 명사였던 황승언의 딸과 결혼했다.
원래 제갈량과 황승언은 사제지간으로 만났다. 제갈량은 숙부 제갈현을 따라 형주로 이주한 후 형주 지방의 저명한 학자들인 방덕공·사마휘·황승언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연마했다.
황승언에게는 과년한 딸이 하나 있었다. 재능과 학문이 뛰어났지만 인물이 형편없었다. 머리카락은 노랗고 얼굴은 시커먼 추녀였다. 반면에 제갈량은 일등 신랑감이었다. 제갈량은 신장이 팔척에 얼굴이 백옥같이 희었다. 한마디로 말해 키크고 잘생긴 '훈남'이었다. 게다가 집안 좋겠다, 수재로 이름 났겠다, 무엇 하나 빠진 구석이 없었다. 황승언은 일찌감치 제갈량을 사윗감으로 점찍어 두었다. 황승언은 제갈량과의 친분이 깊어지자 슬며시 의중을 떠보았다.
"남자는 장성하면 결혼을 해야 하고 여자도 다 컸으면 시집을 가야 하는 법이라네. 듣기로는 자네가 배필감을 찾는다 하던데 나에게는 못난 딸이 하나 있네. 얼굴은 검고 머리카락은 노랗지만 재주만은 가히 자네와 어울릴 만하다네."
제갈량은 신부감의 얼굴도 보지 않고 즉석에서 혼인을 승낙했다. 그는 황승언의 사위가 됨으로써 형주정권의 핵심세력과 친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 황승언은 형주 지방 최고의 명문가인 채풍의 사위였으며, 형주목 유표와는 동서지간이었다. 당시 형주의 군권을 쥐고 있던 채풍의 아들 채모와도 처남매부지간인 셈이었다. 제갈량은 황승언의 못생긴 딸과 결혼함으로써 형주정권의 핵심 인맥에 편입될 수 있었다.
제갈량이 계속해서 학문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결혼 덕분이었다. 유표에 의해 예장 태수로 임명됐던 숙부 제갈현이 죽고 나자 제갈량은 몸소 밭을 갈고 농사를 지으며 가족들을 부양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말이 주경야독이었지 외부의 도움 없이는 생계조차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제갈량은 결혼을 통해 형주의 명문가들과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들의 후원을 받아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세상사람들은 제갈량과 황씨 부인의 결혼을 비웃었다. 사람들 사이에 이런 농담이 회자됐다고 한다.
"아내를 취하려거든 공명처럼만 하지 말게나. 기껏해야 황씨 영감 추녀 딸이나 얻게 될 터이니."
제갈량은 이 결혼으로 '실속'을 챙길 수 있었다. 기록은 없지만 제갈량과 황씨 부인 사이의 소생이 제갈첨 한 명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속궁합이 잘 맞았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두 사람의 사이는 동지적 관계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황씨 부인은 지혜롭고 학문적 실력이 출중해 제갈량에게 훌륭한 조언자가 됐다. 제갈량이 집안 살림 걱정 없이 청렴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황씨 부인의 내조 덕이다.
[미화된 영웅] 제갈량, 라이벌 숙청의 칼 휘둘러
제갈량의 권력은 황제를 능가했다. 촉나라의 모든 일은 그의 수중에서 처리됐다. 오죽하면 후주 유선이 이렇게 말했을까. "정무는 갈씨(葛氏)보고 하라 하고, 과인은 제사나 지내겠소."
유선 역시 이러한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가 제갈량의 사후 사당을 설치하는 문제에서 유독 인색을 떨었던 까닭이다. 유선은 어쩔 수 없어 제갈량의 권력독점을 방관했을 뿐이었다. 제갈량이 국가의 권력을 독점하게 된 것은 단순히 재능이 부족했던 유선이 국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갈량이 치열한 권력투쟁을 통해 경쟁자들을 제거했기 때문이었다.
제갈량은 권력욕이 매우 강했다. 그는 함께 *탁고를 받았던 이엄을 숙청했고, 팽양과 요립 등 잠재적인 경쟁상대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집요한 공작의 산물이었다. 자신이 제어하기 어려웠던 관우나 유봉이 죽도록 내버려 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권력에 대한 독점욕이 강했던 제갈량이 군대와 국가의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 그 결과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비 역시 이러한 상황을 심히 걱정했다.
사실은 저 유명한 탁고(託孤) 사건도 이러한 유비의 걱정과 염려 속에서 발생했다.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를 포함해 후세의 학자들은 탁고 사건을 ‘진실로 가장 모범적인 군신간의 관계를 보여준 것’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탁고의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면 전혀 사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이 임박한 유비가 제갈량을 백제성으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재능은 조비보다 열배나 나으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고, 종국에는 천하대사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후사를 이을 자식이 도울만하다면 도와주시오, 만약 그가 재능이 없다면 그대가 스스로 내 자리를 취해도 좋소!"
이 말을 들은 제갈량은 온몸이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이마를 땅에 찧어 피를 흘려가며 유선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이것이 서로 두 마음을 품지 않고 국가와 자손의 장래를 전적으로 맡긴 장면으로 이해되는가?
애당초 유비는 자신의 사후 제갈량에게 권력을 독점시킬 생각이 없었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필적한 만한 재능을 지닌 인물인 유파에게 권력을 분점시켜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게 하고자 했다. 불행히도 유파는 유비의 사망 직전에 죽었다. 유비는 어쩔 수 없이 이엄에게 그 역할을 맡겼으나 그는 재능이 부족했다. 이 상황에서 유비는 제갈량에게 마지막으로 어린 군주에 대한 충성의 다짐을 받아둘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탁고의 본질이다.
이엄은 역시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고 결국은 책을 잡혀 제갈량에게 숙청당했다. 이로써 촉나라 조정에서는 아무도 제갈량의 권력독점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없게 되었다. 유비의 의도와는 사뭇 다른 결과였다.
제갈량이 유선을 내치고 황위를 빼앗지 않은 것은 그의 충성심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제갈량이 정권을 찬탈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당시의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삼국시대에 촉의 위치는 매우 취약했다. 위와 오와 같은 강대한 적국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함부로 찬탈을 시도했다간 내우외환이 겹쳐 조기에 패망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만약 제갈량이 북벌에 성공해 천하를 제패했다면 어찌 됐을까? 그가 끝까지 한나라의 충실한 신하로 남을 수 있었을까? 모든 권력과 신망이 제갈량에게 집중되게 된 상황에서 모든 권력을 황실에 되돌려주고 물러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후세 사람들에게 만고의 충신으로 칭송되고 있는 그가 '삼국지연의'에서 간교한 역적이요 찬탈자로 묘사되고 있는 조조나 사마의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거짓말 벗겨보기]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동남풍을 빌었기에 주유와 황충이 화공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제갈량은 *호풍환우할 수 있는 신적 인물로 묘사되기까지 한다. 전혀 사실과 다르다. 적벽대전의 승리는 전적으로 주유의 공이었다. 제갈량은 유비와 손권의 동맹을 체결하는 외교적 역할 이외에는 한 일이 없었다. 이때까지도 제갈량은 군사적인 일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풀이]
*탁고=고아의 장래를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함. *호풍환우=요술로 바람과 비를 불러일으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