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극장가의 최고 화제작은 단연 '베를린'이다. 하정우·한석규·류승범·전지현 등 톱스타들을 캐스팅한 것 뿐 아니라 100억여원이란 제작비를 실감케할만큼 숨막히는 액션을 보여줘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흥행성적도 좋다. 개봉 5일만에 누적관객수 200만명을 훌쩍 넘겼고, 8일만에 300만 고지를 넘어섰다. 하지만, 영화가 가열차게 흥행가도를 달리는데도 감독 류승완(40)은 좌불안석이다. '초반 인기가 갑자기 시들해지면 어떻하나'라며 조바심을 내고 있다. 재기발랄한 '충무로 액션키드' 류승완이 지금껏 한번도 보여준 적 없던 모습이다.
류승완 감독과의 취중토크는 '베를린'이 200만 돌파를 눈앞에 둔 시점에 진행됐다. 강남의 한 호프집에서 만난 류승완 감독은 "너무 신경을 써 몸이 안 좋다"고 양해를 구하면서도 시종일관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취중토크를 즐겼다. 류승완 감독의 아내인 영화사 외유내강의 강혜정 대표도 이 자리에 동참했다.
▶대작 '베를린' 부담감에 우울증까지
-'베를린'이 워낙 대작이라 부담도 큰 것 같네요.
"흥행성적이 좋지 않았던 제 영화 '다찌마와 리'의 작품은 제작비가 28억원이었어요. 그런데 '베를린'은 100억원대 영화예요. '다찌마와 리'가 잘못됐을 때도 한동안 아무것도 못했는데 '베를린'이 망하면 아예 영화계를 떠나야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또 저 혼자만 힘들어지는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힘들어지기 때문에 감독으로서 부담이 클 수 밖에 없어요."
-대작을 하고 싶어 '베를린'을 만든 건가요.
"그 반대죠. '베를린'을 만들려다보니 대작이 된 거예요. 처음엔 산업스파이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려봤어요. 그러다가 머릿속 한쪽에서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스토리가 지나가더군요. 스파이, 그리고 누명을 쓴 인물…. 그 두 가지 이야기가 떠돌다가 여전히 남북으로 갈라져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에 빗대 풀어보면 좋겠다는 판단이 섰죠. 실제 탈북자들과 정보원 활동을 했던 분들로부터 자료를 수집했어요. 어떤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너무 '영화'같아서 오히려 활용할수가 없었어요."
-촬영장에서 악마같았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맞는 말이예요.(웃음) 이번 촬영때는 좀 심했죠.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심적 부담감 때문에 몸과 마음이 엉망이었어요. 매일같이 악몽을 꾸며 잠을 못 잤고 시간마다 컨디션이 바뀌었어요. 극심한 우울증도 앓았어요. 체중도 62kg에서 54kg까지 빠졌어요. 촬영이 진행되던 어느날 삭발을 하기도 했죠. 머리감을 시간도 없고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어요."
-촬영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아 힘들었던건가요.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파리저 광장 촬영때는 아예 머릿속이 하얘져 당황스러웠어요. 이랬던 적이 없었거든요. 수백명의 보조출연자와 스태프들이 나만 쳐다보고 있는데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군요. 신경이 예민해져 소리만 질렀어요. 그 와중에 해외영화제 관련해 베를린에 왔던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과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이 응원차 현장을 찾아왔어요. 양익준 감독은 내가 하도 악을 쓰니까 자기도 모르게 보조출연자들 속에 섞여 동선대로 움직였다고 하더군요.(웃음)"
-한동안 쉬고 싶으시겠네요.
"항상 작품을 발표할때면 다음 작품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진짜 푹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예전에는 영화를 볼때마다 '어떻게 찍었을까'를 염두에 뒀는데 언젠가부터 '관객은 얼마나 들까'라는 계산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렇다고 영화산업의 시스템 바깥으로 나갈 정도로 튀는 행보를 보일수도 없고 참 고민이 많아요."
▶더 이상의 유명세 사양하고 싶어
-'짝패'에선 주연으로, 또 여러 작품에 카메오로 등장했어요. 연기를 계속 보여줄 계획은 없나요.
"안 하려고요. 연기에 흥미를 잃었어요. 너무 설치고 다니는것 같기도 하고요. 게다가 우리 딸도 아버지가 연기하는걸 좋아하진 않아요. 차라리 누구나 알아볼 정도로 유명하면 모르겠는데 '어디서 본 것 같은데'라는 인상을 주거든요. 그러니 어디 나가면 흘끗흘끗 쳐다보는 사람들만 많아 신경쓰이는거죠."
-황정민씨는 공연 연출자로, 하정우씨도 영화를 연출했어요. 류승완 감독이 계속 연기하는 것도 '설치는' 것처럼 보이진 않을 것 같은데요.
"예전에 황정민씨가 제게 '나대지 좀 마'라고 했던 적이 있어요.(웃음) 하지만, 저는 더 많은 배우들이 연출을 경험해봤으면 좋겠어요. 연출자의 마인드를 가진 배우들은 확실히 감독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또 대처하는 능력도 뛰어나요. 대표적인 배우가 황정민씨를 비롯해 하정우, 최민식 선배님 등이 있죠."
-'베를린'에서 전지현이 유독 돋보였어요. 분량이 많지 않은데 연기를 잘 끌어내 인상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더군요.
"그렇게 보였다면 그건 100% 배우 전지현의 공이예요. 저는 그 캐릭터에 몰입할수 있도록 외롭게 만들려고 한 것 밖에 없어요."
-작은 배역인데도 톱스타 전지현씨가 하고 싶다고 해 놀랐겠어요.
"네, '도둑들'의 안수현PD를 통해 연락이 왔어요. 출연분량도 그렇고 예산이 안 맞아 전지현급의 배우는 생각도 안했거든요. 설명을 해줬는데도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길래 미팅을 하러 갔다가 그 자리에서 서로 의견이 맞아 출연이 성사됐어요. 이번 작업을 통해 느낀건 전지현이란 배우의 무한한 가능성이예요. 저보다 좋은 연출자를 만나 몇 작품만 거치면 스펙트럼이 엄청나게 넓어질거라 확신해요. 저 역시 전지현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지네요."
-하정우씨와의 작업은 어땠나요.
"굉장히 스마트한 배우예요. 적절하게 힘을 분배하는 방법을 알더라고요. 아이디어가 좋고 영리해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것 같아요."
-촬영중 힘들때 박찬욱·김지운·봉준호 등 해외에서 작업중이던 '절친' 감독들에게 조언을 구해보진 않았나요.
"그렇게 했죠. 그런데, 서로 자기가 제일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박찬욱 감독님은 '내 상황에 비하면 김지운은 왕자야'라며 김지운 감독을 부러워하고, 막상 김지운 감독님은 '여기 PD들이 나를 너무 힘들게 한다'며 푸념하더라고요. 봉준호 감독님은 '스트레스 때문에 너무 먹어서 무릎이 안 좋아졌다'고 우는 소리를 했어요."
-워낙 스타감독이라 매번 평가를 받을때 손해보는 것도 많은 것 같아요.
"건방진 소리처럼 들릴수 있을텐데 이젠 더 이상 유명세를 타는게 싫어요. 괜히 기대치만 높여놔서 작품을 만들때마다 심한 부담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스스로 저를 평가해볼때 그다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거든요. 능력없는게 죄는 아니잖아요.(웃음)"
▶가족들과의 소소한 행복 방해된다면 영화 그만둘수도
-세 자녀를 대안학교에 보낸 이유는 뭔가요.
"밤 11시의 대치동 학원가에는 고급차들이 즐비해요. 아이들을 데리러나온 학부모들이죠. 학원문이 열리면 지친 아이들이 좀비처럼 걸어나와요. 우리 세 아이들이 그렇게 살아가면 일단 애들 뿐 아니라 저와 아내도 못 버틸것 같았어요. 또 제가 대학을 나오지 않고 노력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된 케이스라 아이들에게도 '똑같은 삶'이 아닌 '창의적인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어요."
-자녀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인가요.
"얼마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주먹왕 랄프'를 보러갔어요. 극장에 '베를린' 포스터가 즐비하게 붙어있더군요. 그러니 둘째가 '여긴 좋은 극장'이라고 하더라고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러 갔을 때도 '베를린 현수막이 걸려있었어요. 배우들의 이름이 크게 들어간데 비해 제 이름은 작았어요. 그러니 막내가 '여기는 안 좋은 극장'이라더군요. 원래 배우 이름이 크게 들어가야한다고 설명했는데도 '아빠 이름이 크게 들어가야한다'고 우기더라고요. 아빠 생각해주고 항상 건강하게 자라줘 고맙죠."
-나이가 들면서 가치관이 좀 바뀐 편인가요.
"신상옥 감독의 자서전 제목이 '나는 영화다'예요. 저 역시 제 삶 자체가 영화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즘엔 소소한 행복에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제 등을 두드려주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게 너무 행복해요. 만약 영화 때문에 이 행복을 빼앗겨야 한다면 영화를 그만둘수도 있지않을까 생각하기도 해요."
-삼촌 류승범씨는 조카들과 잘 놀아주나요.
"조카들을 좋아해요. 그런데 5분 이상 함께 놀지를 못해요.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어쩔줄 몰라해요. 다칠까봐 안절부절하다 스스로 지치죠. 오랫동안 승범이와 작업을 해왔는데 결과도 참 좋았어요. 이젠 감독과 배우 관계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간다고 보는게 맞는것 같아요. 워낙 준비정신이 뛰어나 뭘 시켜도 믿을만해요."
-어린시절부터 영웅이라 불렀던 성룡이 내한하잖아요.
"제 인생의 영웅이죠. 과거 성룡이 '미라클'을 내놓고 내한했을때 공항까지 나간적이 있어요. 당시 성룡 팬클럽 회원이었거든요. '신화'를 들고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을때는 술자리에서 인사를 하기도 했어요. '존경한다'고 말했는데 기억 못할거예요. 막상 앞에서 보니 생각보다 많이 늙었더라고요. 마음이 아팠죠."
오랜만에 만난 류승완 감독은 역시 달변이었다. 영화와 인생에 대한 생각을 조리있게 펼쳐놓는가하면 분위기가 너무 진지해진다싶으면 재치있게 유머를 꺼내며 분위기를 전환시키기도 했다. 아내 강혜정 대표도 말을 거들며 대중의 평가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는 남편의 곁을 든든하게 지켜줬다. 본인은 "영화 만드는게 너무 힘들다"면서 너스레를 떨었지만 대화를 나눠본 기자의 입장에서는 충무로 대표감독 류승완이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는지 느낄수 있었다. 13년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들고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젊은 감독 류승완의 열정은 여전한듯 했다.
류승완 프로필
생년월일 : 1973년 12월 15일 가족: 아내 강혜정(영화제작자, 외유내강 대표이사), 동생 류승범 강혜정과의 사이에서 1남 2녀 출생지 : 충청남도 온양시 수상 : 한국 독립단편영화제 관객상, 부산 단편영화제 우수상 데뷔 : 1996년 단편영화 '변질헤드'
주요작품
연출 :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00) '다찌마와 리'(00년) '피도 눈물도 없이' (02) '아라한 장풍대작전'(04) '주먹이 운다'(05) '짝패' (06)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08)'부당거래' (10) '베를린'(11) 등 출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00) '복수는 나의 것' (02) '오아시스' (02) '친절한 금자씨' (05) '짝패' (06)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