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계사년이 막 시작될 때 일이다.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한창 쥐불놀이를 하다가 불꽃놀이처럼 공중으로 크게 불을 쏘아 올렸는데 이상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선친의 서장 관사 옆에는 태평양 전쟁 때 파놓은 큰 방공호가 있었다. 비행기 폭격을 피하기 위해 만든 방공호였는데 불꽃놀이로 사방이 밝아지자 동굴 속에서 희미하게 사람들 모습이 나타났다. 한 두 명이 아니었다. 노인부터 아기를 등에 업은 아주머니까지 족히 수 백 명은 되어 보였다. 마치 목욕탕에서 김이 모락모락 날 때 보이는 모습 같았다.
“엄마, 저 방공호 안이 이상해요.” 어머니는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셨다. “방공호 안이 어때서? 아무 것도 없는데?” 그러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 동굴 안에 사람들이 많아요. 할아버지도 있고, 아기를 업은 아주머니도 있어요. 너무 슬픈 눈으로 나를 보고 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방공호 안에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북한군이 산으로 후퇴하면서 마을 우익인사들의 가족들을 한꺼번에 몰살시킨 학살 장소였다. 불과 3년 전 일이었다.
어머니는 천도재를 올리기로 결정하셨다. 며칠 뒤 임실의 무속인이 와서 방공호 앞에서 천도재를 올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굿을 본 나는 모든 게 신기했다. 무당은 방공호 옆에 상을 차려놓고 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은 뒤 바가지를 업어놓고 두드렸다.
‘둥둥둥둥!’ 바가지는 북소리를 내며 방공호 안에 울려 펴졌다. 대낮에 벌어진 일이라 방공호 안의 영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다만 그 후 우리 집엔 좋은 일이 많았다. 며칠 뒤 선친은 임실 지역의 악명 높은 빨치산 괴수였던 외팔이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셨다.
좌우 대립이 극렬할 때라 임실 지역엔 유난히 비극이 많았다.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산에서 한 여자가 튀어 나왔다. 그녀는 머리는 산발하고 옷은 모두 찢긴 채 깔깔 웃으며 돌아다녔다. 나는 놀라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마을 사람은 모두 그녀를 미친 여자라고 피해 다녔지만 나쁘게 대하진 않았다. 알고 보니 2년 전만해도 그녀는 마을에서 참한 새색시로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얼굴도 예쁘고 성품도 참했다. 그런 그녀에게 비극이 닥쳤다. 마을의 젊은 농사꾼이던 남편이 2년 전 육군 모사단에 의해 참혹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을 그대로 목격한 것이었다.
총살보다 더 끔찍한 방법이었다. 여자는 그 날 이후 실성하더니 그만 정신착란에 걸리고 말았다. 동란 중이라 정신병원도 없던 시절, 여자는 남편을 찾는다며 미친 여자처럼 마을을 뛰어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혹시 그녀가 굶어 죽을까봐 자신의 집에 나타나면 밥이라도 먹여 보내곤 했다.
선친은 임실에서 총경으로 승진하신 뒤 지리산 토벌작전에 연대장으로 지휘를 맡게 되셨다. 나는 이듬 해 3월 전주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어머니와 함께 임실을 떠나게 됐다. 어린 나이였지만 영적인 능력이 발휘됐던 임실의 6개월은 내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됐다.
최근 임실에 교통사고가 잦은 지역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나는 1951년 1월에 자행된 학살사건이 떠올랐다. 모사단이 폐광에 몸을 숨겼던 부역자 가족 300여 명을 연기로 집단 질식사시킨 사건이었다. 바로 그 지역의 도로가 폐광 인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