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초,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밤 꿈속에서 홀연히 나타나 “손님이 갈 테니 잘 대해주라”는 선친 차일혁 경무관의 당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름도 성도 누군지도 몰랐다.
마침 면담하는 날이라 누군지 자못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 부산에서 왔다는 중년의 한 부인께서 간곡하게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국가유공자가 되도록 도와주세요.”
부인의 선친은 전투경찰 시절 차경무관의 부하 'R경사'였고, 그녀는 다름 아닌 그의 장녀였다. 고인은 전공이 많고 근무성적이 우수하여 대통령상까지 받았지만 생전에는 “공직자로서 당연히 국가에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며 국가유공자를 신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을 떠나고 세월이 흘러 뒤늦게 후손이 신청하려니 관공서에서는 증빙을 요구한 것이다.
그녀는 서류봉투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사진이 선명한 대통령표창과 결혼 축전이었다. 축전 필체가 내 눈에 확 들어왔다. 요즘 축전이야 획일적 문체의 타이핑이지만 옛날 축전은 관공서 용지에 직접 써야했다.
“축전. R군의 화촉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단기 4285(1952)년 3월 25일 무주경찰서장 차일혁”
내가 그 필체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한문을 섞어 정갈하게 내려 쓴 글씨는 선고의 친필이 틀림없었다. 순간 콧등이 시큰해졌다.
당시 결혼 축전은 의례적인 축전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1952년은 6.25 전쟁 중이었고 후방에서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이 한창이던 때였다. R경사는 차 경무관이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부하였다.
전쟁 속의 대원들은 매일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사선을 넘나들어야 했다. 결혼은 대를 잇는 거사였음은 물론이고, 우여곡절이 있는 R경사를 보증하는 차 경무관만의 독특한 주선 절차이기도 했다.
필체 외에도 부인께 서적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에서 차 경무관이 임실경찰서장 시절 공비 토벌 후, R경사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까지 확인해주었다. 그녀에게 물었다.
“왜 아들들이 나서지 않고 따님이 고생을 하십니까?”
“예전엔 국가유공자는 장남이 신청해야 했지만 요즘은 가장 나이 많은 자손이 우선이라 장녀인 제가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유산상속에서 남녀차별이 없어진지 오래지만 새삼 격세지감을 느꼈다.
생존한 부대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차 경무관은 공훈을 부하들에게 먼저 돌렸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2011년 경무관 승진 때에도 순직한 경관 236분과, 올해 전쟁기념사업회의 호국의 인물에 선정 때에도 처음으로 경찰 여섯 분과 함께하셨다. 돌아가셨어도 여전히 전우를 챙긴다는 사실에 나조차도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며칠 전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부탁했던 부인이 교사인 딸과 함께 찾아왔다. “됐답니다. 공문만 받으면 됩니다. 법사님, 확인 보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차 경무관 영단에 직접 만든 장미 꽃바구니를 올렸다.
그런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부인이 슬며시 또 다른 청탁을 하는 게 아닌가.
“제 딸년 둘 있는데 모두 시집을 안 갔어요. 중신을 좀 서주시면 안 될까요?”
선고에 이어 후대까지 연을 맺어 달라는 것인데. 나는 그러마하고는 허허 웃고 말았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