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에 하는 구명시식은 쉽지 않다.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에어컨도 잘 틀지 않는 법당에서 수십 명이 모여 영가를 천도하기 위해서는 꽤 단단한 집중력이 요구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올리는 구명시식에 가장 힘이 되는 지원군은 아이러니하게도 영가들이다.
잠실 석촌동 후암선원 시절엔 주로 가족 영가님들이 많이 도와주셨다. 증조부님·조부님 그리고 아버지·어머니께서 항상 나를 응원해주셨다. 특히 어머니 무위심 보살님께서는 생전처럼 돌아가신 뒤에도 늘 내 옆에서 구명시식을 지켜주셨다.
그런데 대학로로 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달라진 분위기에 꽤 어색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아셨는지 대학로와 인연 있는 영가들이 후암선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특히 대학로와 가까운 창경궁과 서울대학교 병원 등지에서 떠돌던 영가님들이 구명시식 때마다 후암선원을 찾아주신다. 믿거나 말거나한 얘기지만 사실이다. 처음에는 낯선 영가님들의 등장에 놀라기도 했다.
분명 초혼하지 않은 영가님들인데 마치 구명시식에 정식 초청을 받은 영가님들인양 앉아계셨다. 영가 명단과 비교해 봐도 알 수 없는 이름이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라고 묻자 영가님들은 뜻밖의 이름을 말씀하셨다.
모두 왕실의 주요 직책에 계셨던 영가님들이었다. 그 분들 중에는 창경궁의 주인도 있었다. 조선의 왕도, 왕비도, 비운에 눈을 감은 왕세자도 있었다. 정확히 어떤 분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놀라운 역사의 비밀을 품고 있는 주인공들도 있었다.
그 중 가장 나를 놀라게 한 영가님은 영조의 어머니인 최숙빈을 궁궐로 들여보낸 김춘택이었다. 그는 감히 왕실 영가님들 사이에 섞여 앉아있었다. 나는 아무리 최숙빈 영가님과 깊은 인연을 가진 분이라 해도 법도가 있어 왕실 영가님들 사이에 앉으실 수 없다고 했더니 김춘택 영가는 "무려 세 명의 왕이 내 핏줄이오!"라며 호통을 쳤다.
'사씨남정기'를 쓴 서포 김만중은 김춘택의 작은 할아버지였다. 노론의 핵심이었던 김장생의 5대 손인 그는 부귀한 가문에서 귀하게 성장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의 탁월한 문장실력을 눈여겨봤던 김만중은 김춘택을 무척 아꼈다. 하지만 노론인 가문 탓에 김춘택은 벼슬에 응시하거나 관직에 나간 적이 없었다. 대신 풍류를 사랑해 장안의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며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장희빈 때문에 노론이 밀리자 김춘택은 인현왕후 복귀운동을 위해 남몰래 세를 규합했다. 이 무렵 작은 할아버지가 쓴 '사씨남정기'를 한글판으로 번역해 백성들에게 널리 읽히게 한 사람도 김춘택이었다. 그는 정치세력만 조종한 것이 아니었다. 장희빈을 내치기 위해 건장한 체격을 가진 최숙빈을 궐에 들이게 했다.
김춘택의 작전은 성공했다. 인현왕후는 복귀했고 장희빈은 사약을 마시고 죽고 말았다. 또 장희빈이 낳은 경종도 병치레를 거듭하다 요절하고 말았다. 그런데 영조가 자신의 아들이라니? 내가 그 연유를 자세히 묻자 김춘택 영가는 난색을 표하며 '나의 초상화와 영조의 어진이 남아있으니 비교해보면 될 것'이라며 더 이상의 말은 아꼈다.
과연 김춘택과 영조는 무슨 관계일까. 어찌됐건 그 날 이후 김춘택 영가는 대학로 구명시식을 가장 열심히 도와주고 계신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내가 그림을 그릴 때나 글을 쓸 때 꼭 내 곁에서 옛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분이기도 한다. 더운 여름 대학로 구명시식을 매번 무사히 끝낼 수 있게 도와주시는 영가님들에게 감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