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마이너리거'가 일본 열도를 흔들고 있다. 야쿠르트의 외국인 타자 블라디미르 발렌틴(29)이 '전설의 홈런왕' 오 사다하루(왕정치·73) 소프트뱅크 회장이 갖고 있는 일본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홈런(55개) 기록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발렌틴은 11일 도쿄 진구구장에서 열린 히로시마와의 경기에서 시즌 55호 홈런을 쳤다. 0-6으로 뒤진 6회 말 1볼-1스트라이크에서 상대 선발 오타케 간의 시속 147㎞의 바깥쪽 직구를 밀어쳐 우중간 담장을 넘겨버렸다.
3경기 연속 홈런을 때린 발렌틴은 일본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홈런 타이 기록을 세웠다. 55홈런은 1964년 왕정치(요미우리), 2001년 터피 로즈(당시 긴테쓰), 2002년 알렉스 라브레라(세이부)에 이어 네 번째다. 발렌틴은 역사상 가장 빠른 팀 122경기 만에 55홈런에 도달해 신기록 달성이 유력하게 점쳐진다.
네덜란드령 퀴라소 출신인 발렌틴은 16살인 2000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마이너리그에서는 8시즌 통산 200홈런을 날렸으나, 메이저리그에서는 2007년부터 3년간 170경기에 출전해 홈런 15개를 때려내는 데 그쳤다. 2010년에도 빅리그 입성에 실패한 발렌틴은 이듬해 비교적 헐값인 60만 달러(약 7억 원)을 받고 야쿠르트에 입단했다. 그해 31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센트럴리그 홈런왕을 차지한 발렌틴은 지난해에도 31개의 홈런을 쳐 1위에 올랐다. 이세 다카오 야쿠르트 타격 코디네이터의 조언을 받아 정확도를 끌어올린 덕분이었다. 올 시즌 일본프로야구가 '날지 않는 공'으로 불리는 통일구 대신 반발력이 좋은 공을 쓰기 시작하면서 홈런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발렌틴의 홈런 행진이 모두에게 환영받는 건 아니다. 외국인 선수가 일본의 야구영웅인 오 회장의 기록을 깨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시선도 많다. 노무라 가쓰야 전 라쿠텐 감독은 최근 "왕정치의 기록이 깨져서는 안 된다. 재미없다. 메이저리그에서 방출된 선수가…. 일본의 수치다. 일본인 타자가 깨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야구가 외국인 선수에 대해 배타적인 모습을 보인 건 이번만이 아니다. 로즈와 카브레라는 각각 2001년과 2002년 오 사다하루의 홈런 기록에 도전했으나 끝내 타이인 55개를 치는 데 그쳤다. 로즈는 5경기를 남겨두고 한 개의 홈런도 추가하지 못했다. 상대팀이 일부러 볼넷을 주거나 좋은 공을 던지지 않는 등 견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발렌틴만큼은 신기록 수립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11일 현재 야쿠르트는 시즌 종료까지 22경기를 남겨두고 있다. 일본 기록은 물론이고 2003년 이승엽(37·삼성)이 세운 아시아 최다 56홈런도 어렵지 않게 넘어설 전망이다. 오 회장은 "대단한 속도다. 앞으로 20경기 이상 더 남았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도전을 지켜보자"며 발렌틴에게 격려를 보냈다. 발렌틴도 "자신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