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1년 전이다. '거미손' 이운재(40)가 2002년 한일월드컵 스페인과 8강전에서 승부차기를 막고 손을 모으며 씩 웃던 모습. 한일월드컵 4강 주역인 이운재는 한국 골키퍼 중 유일하게 A매치 100경기 이상 출전했고, 월드컵에 4차례나 참가했으며, 골키퍼로서는 최초로 K리그 MVP를 거머쥔 '전설의 수문장'이다. 지난해 12월 현역 은퇴 후 지도자로 축구인생 제 2막을 준비 중인 이운재를 최근 수원 자택 근처에서 만났다.
-은퇴한지 9개월 정도 지났다.
"11살 딸, 9살 딸, 6살 아들이 있다. 현역 시절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늘 함께 있어주지 못해 미안했다. 다행히 세 차례 출산 모두 아내 곁을 지켰다. 은퇴 후 아이들과 경주, 부여 등으로 역사 탐방을 다녔다. 못다한 이야기도 나누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국대말이는 한우 살치살 얇게 썰어 버섯과 인삼을 돌돌 말아 꼬치로 고정하고 구운 요리다. 아내가 만든거 보고 따라했는데 호응이 좋더라. 좋은 재료를 쓰는 게 가장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30년 넘게 해온 축구를 그만둬 힘든 점도 있었겠다.
"머릿 속이 백지처럼 멍했다. 현역 시절 누군가에 의해 짜여진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컨트롤해주지 않는 시간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당이 안됐다. 홍명보 감독님에게 전화를 걸어 '저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한 두달 정도 그랬던 것 같다. 지난 겨울이 그렇게 흘렀다. '여기서 멍청하게 있지말자,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고 마음을 고쳐먹고 외국으로 나갔다. 지난 2월 스페인,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잠시 현역 시절로 돌아가보자.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했을 당시 김병지(전남)가 주전 골키퍼였다. 어떻게 주전경쟁을 이겨내고 이후 승승장구한건가.
"1994년 미국월드컵 독일전 후반 45분을 뛰었다. 하지만 1996년 폐결핵으로 1년간 그라운드를 떠났다. 김호 감독님 덕분에 다시 일어섰고, 1998년과 1999년 수원의 전성기에 일조했다. 이후 상무에 입단해 26개월 동안 운동에만 전념했다.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김병지 선수가 홍콩 칼스버그컵에서 하프라인 근처까지 드리블을 했다. 난 안정적이고 묵묵한 골키퍼가 되는길을 택했다. 하루에 3~4번씩 개인훈련을 하며 스스로에게 '나는 대표선수다'는 텔레파시를 계속 줬다. 히딩크 감독님이 노력하고 준비하는 모습에 기회를 주셨다."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이라고 들었다. 현역 시절 체중 관리 때문에 애를 먹었겠다.
"솔직히 물만 먹어서 살이 찐 건 아니다(웃음). 1994년 비쇼베츠 감독이 뚱뚱하다는 이유로 올림픽대표에 뽑지 않았다. 살과의 전쟁 속에 1996년 74kg까지 뺐다.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해 검진을 받아보니 폐결핵 2-3기였다. 입원해 1년간 쉬었다. 4기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 체중 마지노선을 정했다. 2009년 이란 원정 때 뱃살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체중이 불어 경기력에 문제가 생긴다면 은퇴하겠다는 마음으로 꾸준히 체중을 유지했다."
-현역 시절 가장 행복했던 기억과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축구한 것 자체가 가장 큰 행복이었다. 한일월드컵 후 근 7~8년간 1인자 자리를 지키는일이 가장 힘들었다. 정말 외로운 싸움이었다."
-은퇴식에서 멋진 지도자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스파뇰, 3월 영국 퀸즈파크레인저스로 축구 연수를 다녀왔다. 프로 경기는 TV로도 볼 수 있으니 유소년 교육을 보고 싶다고 요청했다. 바르셀로나는 골키퍼가 연령별로 다 합쳐 7명이나 됐다. 8-9세는 골감각, 14세는 하체 훈련과 밸런스, 16세는 기본기와 캐칭, 18세부터는 실전 등 연령별로 교육이 딱딱 정해져있더라. 한국도 타산지석 삼아야 한다. 골키퍼 자격증은 이미 다 땄다. 내년까지 프로팀 등 성인팀을 지도할 수 있는 필드 1급을 딸 계획이다. 기회가 된다면 현장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귀네슈 전 서울 감독과 디노 조프 전 이탈리아 감독이 골키퍼 출신 사령탑이다. 골키퍼 지도자만의 장점이 있다면.
"골키퍼는 가장 최후방에 위치해 넓게 볼수 있다. 대화를 통해 수비수들의 위치도 조정해준다. 물론 필드 플레이어에 비해 세세한 전문적인 부분은 부족할 수 있다. 그래도 꿈은 크게 가질 수록 좋지 않나.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십 몇년 후에 기회가 되면 감독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기회가 왔을때 준비가 안돼있다면 억울할 수 있다. 그래서 필드 지도자 자격증도 준비중이다."
-골키퍼 후학을 키우는 재능기부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고 들었다.
"지난 5월 청주, 수원에서 고등학교 골키퍼 대상 재능기부를 했다. 지난달 정성룡(수원)과 함께 수원 삼성 클럽하우스에서 초중고 골키퍼 일일코치를 했다."
-요즘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 골키퍼 경쟁이 치열하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부터 최근까지 붙박이 수문장이었던 정성룡을 김승규(울산)가 위협하고 있다.
"수원 유소년 클리닉에서 성룡이를 만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줬다. 성룡이에게 '분야를 막론하고 1인자 자리를 지키는건 쉽지 않다. 마라톤도 경기 중 1등이 가장 외로운 법이다. 천하의 이케르 카시야스(레알 마드리드)도 벤치를 지키고 있지 않나. 조급하게 생각한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해줬다. 성룡이는 월드컵과 올림픽 등 큰 대회를 경험한 엄청난 메리트를 지녔다. 나도 한일월드컵 경험 덕분에 독일월드컵을 차분하게 임했다. 또 성룡이는 안정적이다. 골키퍼는 화려하게 슈퍼세이브를 1개 막는 것보다 평범한 슈팅 9개를 막는게 더 중요하다."
-김승규는 어떤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 보고 아주 큰 선수가 될거라고 생각했다. 팔이 엄청 길고 신체조건도 좋다. 2008년과 2011년 포항과 플레이오프에서 페널티킥을 3차례나 막은 것을 보면 동물적인 순발력을 지닌 것 같다. 단 골키퍼는 최소 3~4경기는 쭉 지켜봐야 한다. 코칭스태프에게 꾸준히 어필해 계속 기회를 얻는게 중요하다. 나도 한일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님이 체중감량을 요청해 2주 만에 7㎏을 뺀 적이 있다. 히딩크 감독님이 '넌 프로다'고 인정해준 뒤 꾸준히 중용하셨다."
-둘 중 한 명의 손을 들어준다면.
"아직 2014년 브라질월드컵까지 9개월이 남았다. 메이저리그의 전설적 포수 요기 베라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고 하지 않았나. 정성룡은 좌절하지 말고, 김승규는 자만하지 말라. 또 둘만의 경쟁이 아니다. 김진현(세레소 오사카)과 김영광(울산), 신화용(포항) 등도 포기하지 말고 도전해라. 난 폐결핵 3기를 이겨내고 정상에 올랐다. 후배들이 날 넘어서길 바란다."